2019년에 릴리즈 되었던 HBO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을 주말에 다시 정주행하였다. (5부작)
처음 나왔을 때 보고 흠잡을 곳 없는 연출과 연기,
사실적인 세트 디테일과 분장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는데
무엇보다도 작품이 주는 메세지와 그 안에서
과학자와 정치가가 보여주는 대립적인 가치체계,
극한의 대재앙 상황에서 문제해결을 위해 함께 협력하면서
서로에게서 배우고 영향받으며 키워낸 진한 동지애 등에
깊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나를 만난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나는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의료물리, 그 중에서도 병원에서 “핵의학"에 해당하는
영상장비 개발 랩에서 5년간 박사학위를 했었다.
핵의학은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하여
생체의 대사나 질병을 영상화하며 병을 진단, 치료하는 분야이다.
방사성 동위원소는 핵붕괴, 혹은 방사성 붕괴를 하는 불안정한 원소이기에
그 분야에 있으면 원자핵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에너지의 방출, 인체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깊이있게 공부하게 된다.
한마디로 내가 꽤나 높은 수준의 과학적 이해력을 가지고
이 드라마를 보았을 것이라는 점.
이러한 배경 덕분인지 정말 깊이 빠져들어 보았는데
(물론 보기 힘든 장면도 많이 있었지만.)
사실 정말 몰입하게 된 계기는 과학적 이해도 때문이라기 보단
최근에 내가 겪게 된 가치체계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보는게 더 맞겠다.
드라마의 핵심 모티브는 재난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고자
결성된 “재난대책 본부"의 핵심 인물들이 재난의 후처리를 하고
원인을 파헤치면서 겪게 되는 두 개의 큰 가치의 충돌과 갈등이다.
강박적이리 만큼 사실만을 커뮤니케잇하는 과학자와
위계적이고 경직된 사회에서도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며 살아온 정치가.
이 둘은 그 어느 누구도 절대선이나 절대악을 대변하지 않고
불가항력적인 큰 재난 앞에서
가변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보여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흥미로운 점은 30대 초반까지 뼛속까지 “과학자" DNA,
요즘 유행하는 말로 “너 T야?” 의 전형적인 기질을 가지고 살아온 내가
프로페셔널 경력을 가지게 되고
비지니스와 여러가지 사회 정치적인 상황에 맞딱드리며
사람을 다루게 되면서 경험하고 깨닫게된 가치체계의 변화가
이 드라마 안에서 두 캐릭터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너무나도 잘 그려졌다는 점이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드라마 속 “과학자” 같은 타입이었다.
팩트에 가치를 느끼고 강박적으로 사실만을 커뮤니케잇 하던.
(사실 지금도 팩폭녀이기는 하다. 건조한 대화법에 익숙하다.)
하지만 최근들어서는
팩트 뿐만이 아니라 가치와 감정에 크게 좌우되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다 현명한 방법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재난 사후처리를 위해 원자력 핵발전소 안으로
누군가는 죽음을 불사하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
방사능이 너무 세서, 로봇은 들어가자마자 고장나 버리고
인간도 들어가면 일주일 내로 사망이 예견된 수순의 상황에서
시민들로부터 자원봉사자를 구해야 하는데,
팩트만을 이야기 해서는 아무도 이 일에 뛰어들게 만들 수 없다.
이 때 정치가의 가슴에 호소하는 힘있는 발언은
젊은 청년들을 움직이게 한다.
인간의 높은 가치에 호소하는 그의 짤막한 연설은 파워풀하다.
마지막 재판과정에서 그간의 험난한 과정을 함께 하여 전우애가 쌓인
정치가와 과학자의 가슴 뜨거워지는 소회와 대화는 정말 가슴 뭉클하다.
정치가는 그 자신을 그저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 없는 존재라며
여태까지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진정으로 싸워온 과학자에게 공을 돌린다.
하지만 과학자는 반대로 자신이 한 일은 그 어떠한 과학자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재난해결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인력, 재료, 리소스를 끌어오는
힘을 발휘해 준 건 정치가 당신이었다며
그의 존재를 높이 평가해 준다. 그러면서 하는 한 마디.
“They heard me, but they listened to you.”
이 대화에 정말 깊이 공감했고 감동했다.
서로에게 공을 돌리는, 그리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정치가에게 공을 돌리는
과학자의 마지막 한 마디는 나에게 강력하게 다가왔다.
국가안보와 국제정세, 냉전시대의 국력의 과시,
과학적 팩트와 진실의 은폐, 시민들의 불안을 방지하기 위한 선택적 정보공유,
팩트에 입각한 정보전달과 가치를 우선하는 커뮤니케이션 방법 등
이 드라마는 극한의 상황에서 복잡하게 상충되는 여러가지의 가치판단과
정의와 선에 대해 아주 복잡다단하게 잘 그려낸다.
최근에 내가 꽂힌 “정의란 무엇인가"와 궤를 같이 하는,
뇌를 자극하는 아주아주 잘 만든 드라마.
진실의 “은폐" 라는 적극적인 거짓은 물론
진실에 대한 “부정과 묵인" 등 소극적인 거짓들이 쌓이고 쌓여 불러오게 된 재앙.
사실과 진실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탐구도 중요하고
인간을 움직이고 싶다면 가치와 감정에 움직이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적절한 커뮤니케이션 역시 아주 중요하다는 걸 깊이 절실하게 깨닫는 요즘.
결국은 인간이니깐.
그것이 내가 느끼는 바다.
요즘은 정말이지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인문학, 작가, 연기자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체르노빌 시작 부분 과학자의 “거짓과 진실"에 대한 독백은
정말이지 철학적이고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대단함이 느껴지는 부분.
꼭 한번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