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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Jun 06. 2020

믿음

하나님의 계획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의 믿음, 성화, 교회 3편을 읽고 정리한 기록입니다.


먼저 제 1권 믿음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

가장 신앙적이고도 우스운 질문 중 하나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가?"입니다. '십자가로 개 패듯 로마 놈들을 다 패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지. 그러면 훨씬 더 잘 믿어질텐데. 자기가 죽고 나서 믿으라 하니 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로 로마인들을 다 두들겨 패셨으면 "이런 기독교는 싫다"고 하며 또 반발했을 것입니다. 핑계를 위한 핑계를 그렇게 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아니 그것을 어떻게 참아? 그걸 보고 가만히 있어? 아니 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야?" 이런 말들은 다 옳고 그른 것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스러운 일을 할때, 보다 많은 동조자를 얻어서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태도가 깔려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꺾지 않습니다. 내게 잘못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중간생략) 그래서 마음이 굳어진다는 것은 고집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진리와 사실이 나타나면 그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로 결정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모든 결과는 늘 원인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것을 불신앙이라고 합니다 (중간생략) 여러분은 구원 얻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구원 얻을 만한 조건이 있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여기 앉아 있는 것입니다. (중략) 구원은 내가 믿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도 아닙니다. (중략)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말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를 저 세리와 같이 만들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저 세리와 다른 것을 감사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내고 구제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축복받는 근본이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기준이라면 우리는 아직도 죄가 무엇이고, 죄값으로 사망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 설득당한 자들입니다. 설득당하는 것 가운데 맨 나중에 설득당하는 것이 이해입니다. 이해부터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부터 설득하고, 인생을 설득하고, 그리고 이해를 설득합니다.


구원의 믿음

지금 구원을 얻었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두는 적이 없는 분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지 않고 믿음으로 얻기 때문에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슨 뜻이겠습니까? 원인이 없는데 결과만 있는 법칙입니다. 세상에 없는 법칙입니다. 믿음은 원인이 아닙니다. 원인없이 결과를 만들어 내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은 없습니까? 우리는 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중략) 사람이 돌아오는 데도 하나님의 필요로 하시는 시간이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실수와 그 사람이 하나님없이 돌아다니면서 두들겨 보고 맛보았던 것들이 돌아온 다음에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하고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설명이 안됩니다. 교리 문제로 싸우지 마십시오. 이야기가 안되는 것입니다. 설득시키지 마십시오.


백구십번쯤 져야 두번쯤 이길 것입니다. 늦게 시작하면 늦게 승리합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싸움은 바로 이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빨리 실수해서 더 이상 실수할 것이 없도록 모든 실수를 채우십시오. 그러면 남은 것은 승리뿐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열심

베드로는 가만있으면 중간은 갈 텐데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매번 터지는 사람입니다. 참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원래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따지면 굉장히 좋은 사람입니다. 의리가 있고 따뜻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중략) 우리나라 신자들은 대부분 베드로입니다. 감정적이고 쉽게 격하며 순진하고 열광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도 소용없는 짓만 합니다. (중략) 신앙은 열심으로 증명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적하시는 바대로 고쳐 나가시는 작업입니다. 내가 좋아하던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성품, 원리, 방법, 목표를 붙잡는 싸움입니다. (중략) 즉 나는 할수없다는 파산 선고를 한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일을 행하심으로 우리 인간이 상상하여 가질 수 있는 차원에서의 일이 아닌 것임을 자꾸 증명해내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신자들을 만나면 가장 답답한 것이 너무 잘 운다는 것입니다. 아무데서나 감동합니다 참 답답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신앙은 그것보다 훨씬 냉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략) 여러부ㅠㄴ의 신앙도 괜히 엎드려 울어서 넘기지 마십시오. 차라리 울려고 한 그 정성으로 치열하게 살아서 여러분의 신앙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신앙의 출발은 언제나 좌절입니다. 절망이 있어야 합니다.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나는 악밖에 행할 줄 모르는구나, 내가 꺼내 놓은 것이 하나님에게는 방해가 되는구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하다는 그 고백을 여러분들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입니다.




자기 치장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자랑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꿇고 그분께 도와주시길 전적으로 구해야 하는, 긍휼과 자비를 구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부분을 오해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못난 자들을 동원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귀신론과 신앙

악이란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범죄로부터 출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호의적인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늘 유혹을 받고 시험을 받고 도전을 받지만 거기서 내가 선택해서 하나님 편을 드는 것입니다.




믿음과 일반 은총

신앙이 좋다는 것은 수도꼭지에서 쏟아진 물기둥이 욕조 전체를 넓게 채워 나가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좋다는 것은 한 인간이 갖는 전 인격과 전 존재와 전 사고와 전 습관과 버릇에 녹아 있는 그 수준에서 평가받는 것이며 단지 높은 기둥 하나로 평가받는 것이 아닙니다. (중략) 이것이 잘못되면 신앙은 좋은 것 같은데 만나면 재미가 없고 향기가 없는 신자들이 자꾸 나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는 것이나 전도하는 것을 보면 신자 같은데 다른 면에서 만났을 때는 재수가 없는 신자를 양산해 내게 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병입니다. 만나면 무슨 잘난 소리는 계속 하는데 입을 다물어야 할 때도 떠들고 있습니다.



믿음의 양면성

구원을 은혜로만 보아서 본인의 책임을 놓치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이 은혜로 치중한 쪽을 우리는 구원파라고 합니다. 책임을 강조하는 파는 감리교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설명할 때 구원을 빼놓을 수 없었던 것은 믿음의 시작을 하나님이 하실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구원에서 그렇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이 하나님께서 시작하실 수 밖에 없는 것이었고, 구원받지 않으면 믿음이라는 것은 시작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격에 대한 사역이요 변화요 기적이요 돌이킴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 확실합니다.


즉 구원은 신분과 운명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에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이라서 이 인격적 항복이 당연히 초래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이라기보다 결과요 가장 중요한 초점이 되는 인격적 항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술친구가 찾아오면 그 녀석이 벙어리가 되게 해주세요 술친구가 와서 나를 붙잡고 가려고 하면 발이 안떨어지게 해주십시오" 모두가 이런 기도를 한두번씩은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술친구가 열두명이나 찾아옵니다. 이상하게 그것을 막아주지 않습니다. 내가 결정하기를 요구하시지, 하나님은 절대 조종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외적 조건으로 내가 조종당해서 믿음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이 목적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당황합니다.


어쨌든 내가 붙잡아야 하고 내가 결정하고 노력하고 연습해서 그 자리에 가야 하는 책임의 자리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책임있는 믿음

오늘 성도로서의 삶의 현장에 여러분의 결정으로 받아야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희롱하지 마십시오. 그에게 책임과 원망을 돌리지 마십시오.


믿음의 무대로서의 세상

신자와 불신자 중 누가 더 많이 고난의 길을 걷습니까? 신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고함지르고 정죄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참 끔찍합니다. 신앙생활란 무엇인가? 신행생활이란 논증과 고함이 아니라 살면서 증거하고 시험받는 것이다 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중략) 우리는 그 속에서 시험받고 좌절하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승리하도록 간섭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생활을 더욱 무섭게 하십시오.



시간 속에서 자라나는 믿음

우리가 연약하고 혹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우리가 받은 이 부르심을 하나님이 이루시고야 말 것이라는 신뢰가 믿음의 핵심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너 신발 두켤레 갖고 가라 너 비옷갖고 가라' 이런 이야기이지 신발 두켤레 가지면 발이 안부르트고 비옷을 가지면 비가 안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믿음을 사용하면 난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난관이 있고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모든 사건에 승리해야 훌륭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패한 것으로도 많이 훌륭해집니다. 우리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든 것은 대부분 우리를 울게 만든 사건입니다 웃었던 사건으로 훌륭해진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때 아우슈비츠에 갇혔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는 눈물과 한숨으로 버텼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눈물과 한숨을 보통 포기와 실패의 표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포기하면 울지 않고 웃습니다. 그래서 정신병자는 더 웃습니다.



믿음의 여정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중 누구의 제사에 더 정성이 있었는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누구의 것이 더 비싸고 좋은 제물이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바로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었습니다. (중략) 좋은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플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고난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넉넉히 사십시오. 비오면 우산들고 추우면 내복입고 누가 웃기며 웃고 울리면 울면서 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성도

종교개혁은 교황청이 부패했다든가 면죄부를 판매했다는 것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방법이 초월뿐인가? 자연에는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모습으로만 하나님되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모습 속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되심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종소리로만 말씀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저녁노을이나 바람에 날리는 아카시아 향기 속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 개혁자들이 말하는 바입니다.


종교화되어서는 안됩니다. 종교화되는 것은 은연중에 "내가 하나님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이것을 했으니 이제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도와주십시오"라며 하나님께 다 책임지라고 요규ㅜ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충성스럽게 죄를 피하고 거룩하게 살아 냅니다. (중략) 우리는 이런 신앙생활은 안합니다, 무슨 일을 만들고 사건을 만들고 사업을 벌여 모여서 기도하고 헌금을 내는 편이 쉽습니다. 하루하루를 충성스럽게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지금 교회가 온통 떠들면서 중국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먼저 자기 직장에서 성실히 일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직장을 다르게 만드십시오. 여러분 가정을 지키십시오, 여러분 이웃 앞에 신자같이 사십시오. '저 사람이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르다' 불신자들이 최소한 이렇게 생각하도록 살아야 합니다. "왜 저렇게 사는가 잘난척하려고 그런가 아니다 진급하려고 그런가? 아닌 것 같다 볼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안 볼때도 그러더라 저 사람은 돌았나?" 이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서 소돔 왕이 예수를 믿었는지 고모라 왕이 신자인지는 따지지 않습니다. 의인 열명이 있는가 없는가로 따지는 것입니다. 이 나라와 이 시대의 모든 문제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교회와 성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혀나 끌끌차고 감히 어떻게 나라가 이 모양이냐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다 우리가 잘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안한것입니다. 내가 수돗물 안 잠그고, 가스 불 안 끈 것이니다. 내가 한 것입니다.



신앙의 훈련

이스라엘은 십자가를 믿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선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유대교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 표어는 너나잘해 입니다. 다음주보부터 쓸려고 합니다. 너나잘해! (중략) 다른 사람 흉보지 마십시오. 내가 먼저 잘 살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겠습니다.



기다려 주는 신앙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따뜻한 눈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꼴을 못봅니다. 그런데 자식만은 보지요.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 때문이 아니라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갑각류의 신앙

예수를 믿고 나면 세계관도 바뀌고 인생관도 바뀌고 결혼관도 바뀌고 직업관도 바뀝니다 모든것이 바뀝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번에 정리되는 않습니다.


신자의 처신 원리

분쟁이 일어났을 때 이기기 위해 내편을 만드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모든 싸움은 성냥 불꽃 정도에서 끝납니다. 하지만 이것이 분파로 커지기 시작하면 나중에 거대한 폭탄이 되고 맙니다.


"악역을 맡지 마십시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어떤 원한과 분노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시체입니다. 십자가를 지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악역을 맡지 마십시오"



믿음의 방패

그래 나는 못났다. 나는 더럽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 할말 있느냐? 이것이 믿음의 방패입니다.

하루를 살아내십시오 실패한 날이 있거든 '나는 아닌가보다'하지말고 '오늘은 실패했다. 그러나 내일 또 다시 시작한다' '이틀을 실패했다 삼일째는 아니다' '삼일을 실패했지만 나흘은 아니다'하며 하루를 새롭게 살아내십시오.


좌절과 자기 연민으로 몰아넣는 악한 자의 불화살로부터 부디 여러분을 보호하십시오. 여러분의 현재지위, 아니 영원한 지위가 흔들릴 수 없음을 맞받아 치십시오. 대적을 향해 담대하게 말하십시오. "그렇다 나는 실수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나는 이것보다 더 못했을 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네가 와서 더 떠들려거든 하나님께 한번 대들어보라. 한번만 더하면 내가 하나님께 직접 일러 바치겠다"이렇게 답하십시오, 그것이 신앙입니다.



고난과 환난

여러분이 정말 주를 본받아 살기로 작정한 그날부터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실제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고난과 환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증거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위로를 담을 수 있습니다. 고난과 환난을 당하지 않고서는 여러분이 남을 위로할 수 없고 나눠줄 어떤 것도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에 참여시킴

우리가 일을 해야하는 곳에는 적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일이 없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순탄한 길로 가서 꽃을 꺾어 오고 열매를 거둬올 것이라고 계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군이 많다고 거기에는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회적 책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내 몫이 생기는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주어도 주어도 남는 것입니다.




인격 성숙으로 표현되는 믿음

좋은 신앙이란 어떤 특별한 초월성이나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상식과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좀 쓸모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언제나 자랑스럽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흉보고 비난하고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자세는 언제나 감사하는 것이요, 겸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한평생을 놓고 만들어 나가는 싸움이지 어느 한 순간에 앞섰다고 해서 그사람이 1등은 아닙니다. 신앙은 날 뛰는 것이 아닙니다, 묵묵히 자라나는것입니다. 멋지게 자라나십시오.



신자의 존재론

우리는 다른 사람입니다. 더이상 생존 경쟁의 자리에 서지 않고 더이상 사람을 잡아먹는 자리에 있지 않으며 사람을 우리의 의지력으로 삼지 않고 사람과 경쟁하여 이긴 것을 승리로 삼지 않는 자로 변화된 사람들읿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신자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성공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보란듯한 일을 위해서도 살지 않습니다. 신자의 삶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의 나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기뻐하심 속에 나를 놓습니다. 그 원리들을 만들어 가는 부산물이 아름다움일 수 있고 봉사일 수 있고 헌신일 수 있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일거리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원망들을 일이 없어야 합니다. 

져주십시오. 양보하십시오.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남을 딛고 섰던 것 남을 해하고 가졌던 것 이런 것들은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부끄러운 흔적들입니다. 이것은 전과입니다. 그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다면 그것이 여러분이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언제든지 털어 버리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내일오십니까, 지금 오시지요"이래야 맞습니다. "내일 오신다면 어떻게 할것인가"라는 데서 저촉되는 것이 있거든다 집어 던지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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