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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Jun 06. 2020

강신주

제니퍼 북리뷰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책부터 차근차근 정리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덧 새벽 3시. 너무 졸려워서 업데이트 자체가 무리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세헤라자데가 떠오른다. 하룻밤을 지내고서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왕은 그녀가 하다만 이야기를 듣기 위해 결국 그녀와 1000일을 보내야했다. 어떻게 강신주가 나의 형부가 되었는지 궁금한 분들은.....내가 이글을 마무리할때까지 (천일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기다려주시기를.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그리 오래지 않은 어느날 아침, 로빈슨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강신주 무려 철학박사님의 꿈을 꿨다는 것. 꿈속에서 그가 형부였다는데, 설레는 언니의목소리를 들으며 그날 아침 나 또한 얼마나 설레였는지 모른다. 큰형부에게 미안했지만..마음속으로 두명의 큰형부를 품게 되었다. 그날 아침 이후로. 그리고 하고싶은 게 수십가지 생각났다.

  

지식인 특권층이라는 에디터가 되고 싶다는 것. 

시대를 읽을 줄 아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는 것.

십년이 지나도 읽힐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것.

내 능력으로 착한일을 하고 싶다는 것 (가령, 작은 출판사에서 책을 내어 그 출판사가 자본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인문학 정신을 지켜가면서 책을 낼 수 있게 하고싶다던 강신주처럼).

강신주 같은 신뢰가 가는 산행파트너가 있다면 지리산은 물론이고 에베레스트 정상도 찍고 싶다는 것.

클래식을 듣고 싶어졌다는 것

일산 고양 아람누리에서 피아노 독주를 드고 싶다는 것.

지승호 같은 인터뷰(이를테면 코피카 터져나오도록 피곤해도 지속해서 말하고 싶고 토론하고 싶게 하는 힘)를 하고 싶다는 것.


편애하는 밑줄

Chapter 1. 인문정신은 당당하다
아픈게 살아 있는 거예요. 삶은 일단 아프다고 봐야 해요. (중략) 오래전에 읽었던 책인데 다시 읽으면 내용이 달라지잖아요? 그건 지금 내가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 과거보다 나아졌다는 거예요. 괴테에게 더 육박해 들어가고, 그 사람에게 육박해 들어가는 거예요. 책이 쉽게 읽히는 비밀은 거기에 있어요. 어렵기는 뭐가 어려워요? 공감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그걸 모르면 더럽게 어려워지죠.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이 중요해요. 인문학적 독서법은 감응의 독서법이요. 인문학은 개인편을 들고 자유의 편을 들어요. 한국 사회에서도 독재에 저항했던 이들은 문인이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돼요. (중략) 어떤 철학자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 사람 책을 잘 인용하면 되는게 아니라 그 사람이라면 이 현상에 대해 이런 판단을 내렸을거라는 것까지 알아야하는 거예요. 한 사람, 한 사람을 이해하는 거죠.
Chapter 2. 사랑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사람들은 서럽기 때문에 기다림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기다림을 포기하면 행복도 함께 없어집니다. (중략)여자가 자기 생활을 개척하면 화장 안 배워요. 그래서 저는 화장이 짙을수록 참 안됐다고 느껴져요. 기다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동의어예요. 내가 자기 뜻대로 안된다고 화를 내는 여자친구라면 헤어져야해요. 착각에 빠진 거예요. 분명히 사랑은 소유하려는 감정이 드는 이유는 그 사림이 자유롭기 때문이에요. 완전히 소유하면 사랑도 끝나요. 사랑의 기저에 있는 감정인 소유욕과 자유, 이소유와 자유의 균형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느냐 마느냐 사랑은 이 게임이라고요. 행복의 높이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은 그 이상이 되어야 결혼을 하는데요. 불행한 사람들은 조금만 잘해줘도 돼요(불행했던 것일까...?) (중략) 어쨌든 변화는 여유가 있어야 해요.
Chapter 3. 철학적 시 읽기와 김수영
우리에게 영원한 것. 영원히 요구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밖에 없어요.
Chapter 4. 제자백가를 통하라
철학자든 시인이든 그 사람이 지금 살아 있다면 이 문제에 이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하는 것까지 알아야 정말로 그 사람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시선을 배워야 하는 거죠. 인문학적 독해는 그렇게 해야 돼요. (중략) 춘추전국시대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 양주예요.
Chapter 5. 유가를 넘어서 
사실 이게 철학자들이 해야하는 작업이에요 기억의 전쟁이잖아요 우리가 과거의 어떤 요소,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니까요.   
Chapter 6. 길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
<오자>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오자의 이름이 오기였는데요. 오기가 장수였을 때 말단 졸병이 치질이 생겨서 그 항문을 핥았어요. (중략) 어쨌든 마음을 얻는 것하고 사람을 얻는게 제일 중요하죠. 마음을 얻는 조직이 제일 강해요. 거기는 봉급을 안줘도 돌아가니까요. (중략) 아테네의 화려했던 논쟁과 토론 얼마나 좋아요. 동양은 애초에 바닥까지 전쟁을 보고산전수전을 다 겪으니 인간에 대한 나이브한 희망 같은게 없어요. 내 사람으로 만들까 말까를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죠.
Chapter 7. 철학, 한국사회를 보다
인간은 인간을 사랑해야 인간이에요
Chapter 8.  자본주의에 맞서라
남태평양의 어느 원주민 사회를 보면 젊은 사람들이 물고리를 잡으면 노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다 나눠줘요. 노인들은 젊었을 때 자기한테 물고기를 나눠줬던 사람들이고, 아이들은 자기가 노인이 됐을 때 물고기를 나눠줄 사람들이에요. 이게 공동체 예요. 소유의 형식과 사뭇 달라요.
Chapter 9.  음악이 필요한 시간
벚꽃이 열흘 반짝 피어도 나머지 기간은 볼품없는 시커먼 나무로 있어도 그 기억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견디는 거잖아요. 겨우 열흘 남짓한 그 시간 때문에 벚나무라고 불리는 거예요.
Chapter 10. 인간을 위하여
산에가면 저는 거의 안 먹어요. 사람들 끌고 가느라. 기질적으로 그렇게밖에 못해요. 치명적으로 저 자신을 해쳐요. 끊어버려야 하는데 못 끊어요. 시작하면 끝까지가요. 혼자 속 아파하면서. 짐이 무거워서 힘든게 아니에요. 저를 의지하고 제 마음을 조금만 이해하면 업고도 가요. 그게 아니라 사람들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 배신감 이런게 상터가 되고 힘든거죠. (중략) 힘든 것에 진정성이 있기 때문에 제일 무서것은 저보다 더 힘든 사람이 뭐라고 할 때에요. 

스피노자의 <에티카>도 제가 좋아했던 선배가 중요하다고 해서 본거예요. 쓰레기 같은 선배가 중요하다고 했다면 죽어도 안 읽겠죠.

사랑에 대한 견해
신이 사랑하라고 해서 하는 사랑이 무슨 사랑이에요? 누군가를 사랑해서 신을 버려야 그게 사랑이죠. 재클린 뒤프레라는 훌륭한 첼로 연주자가 있었는데 남편이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이에요. 뒤프레는 남편 때문에 유대교로 개종해요,. 쿨하게 종교 다 버려요. 사랑은 종교도 국가도 버리는 거예요. (중략) 사랑받으려면 자기의 감정을 표현해야 해요. 자기 감정을 표현했을 때 상대가 자기를 미워할 수 있어요. 그러면 빨리 그 인간을 정리해야 하는 거예요.

글은 두 종류가 있는데요, 먹다가 게워낸 글이 있고 따끈따끈한 똥처럼 나온 글이 있어요. 제가 고생해서 글을 써보니까 지금은 그게 딱 보여요. (중략) 글의 힘은 애정에 있어요. (중략) 10년은 갈 수 있는 글을 써야 해요
음악적 고견
좋은 시나 음악은 어떤식으로든 우리를 변화시켜요(중략) 음악을 들어야해요. 멘델스존만 하루종일 들을때도 있고 쇼팽만 들을 때도 있는데 거의 다 들어요. 주로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이 네사람을 중심축으로 듣는 편이에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쇼팽이 바르샤바에서 지은 곡인데 당시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곡을 연주하려면 사랑이라는 것은 뭐고, 이별이라는 것은 뭐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여자에게는 접근도 못하고 나중에 조르주 상드에게 가거든요. 그 갈망을 느껴야 하는데 대부분 기술적으로 연주하려고 해서 안타깝죠
종교적 견해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한 건 인간이 주인이라는 선언이거든요.
유태인들 입장에서는 예수가 적을 물리치고 자기들 유태인만 살려주면 되는데, 예수는 로마인까지 다 구원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태인들이 예수를 처형하라고 한 거잖아요.
정치 견해
4년 뒤에 도로교통법 개정해라? 젠장 지금 사람이 죽는데! 대의민주주의는 우리의 불만을 계속 유예하게 해요. 매번 직접적으로 의사 표현하고, 행동하고, 간혹 투표도 하고 그러면 좋게썽요. 투표에 올인하라는 건 너희는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얘기죠.

노조가 가지고 있는 묘한 자본주의성이 있어요. 노조활동은 중요하지만 인문주의적이지는 않아요. 등록금 반값 투쟁했을 때 제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너희 그렇게 운동하는 거 아니다. 나는 등록금 다 내겠다. 내 후배들부터는 반값으로 해라. 그렇게 해야한다. 너희 운동이 너희 이익만 생각하고 장차 후배가 될 애들은 신경 쓰지 않으면 너희도 똑같은 거다."   

지금 우리는 사회적 아젠다를 김제동, 김여진, 김미화 같은 연예인들이 만들어요. 교수들은 다 어디로 갔냔 말이죠.

노론 계열이 친일을 한 대가로 자식들이 경성제국대학에 갔고, 나중에는 트렌드가 바뀌어서 미국 유학을 가고 서울대 교수가 된 거예요. 그래서 친일파를 제거하려면 우리 사회의 지배층 자체를 붕괴시켜야 하는 거예요. 더더군다나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인데.

서울대에서 조교 성추행 사건 났을 때 그 교수 안 쫓아냈잖아요. 성추행해도 안 쫓겨나면 다른 교수들도 안 쫓겨날테니까. 서울대 교수들의 기득권 문제예요. 한번 밀리면 나중에 자기들도 잘릴 위험에 처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대충 타협해서 넘겼잖아요.

제가 사회주의를 비판하면 그럼 대안이 뭐냐고 해요. 제일 비겁한 담론이 그거예요. 뭐라고 비판하면 대안이 뭐냐고 하는 것. 집 나가야 하는데 어디 갈 데도 없고 대안이 없다고 못 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건 살 만하니가 그런 거예요. 진짜 힘들면 나가고 보죠. 나가는 것 자체가 대안이죠.

인문학자로서 FTA를 반대하는 이유는 FTA로 인해 자본이 팽창해서 전체 산업으로 경쟁이 확산되고 결과적으로 개개인은 더욱 과도한 경쟁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요.

민영화한 건 회수가 안돼요. 헌법소원 내면 재산권에 위반된다고 무조건 깨져요. 이런 조건에서 누가 정치를 하든 정부가 뭘할 수 있겠어요? (중략) 쿠바처럼 모든 사람이 의료 혜택을 받아야해요. 아픈것 가지고 장난치면 끝나는 거예요. 



철학이 필요한 시간


편애하는 밑줄

페르소나를 찢어버리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연기가 아니라 삶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중략) 현자는 단순히 긴 삶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한다.

인의예지의 명칭은 반드시 우리의 실천이후에 성립한다. (중략) 다시 말해 본성의 함양이 아니라 주체적 결단과 실천이 중요하다는 정약용의 고독한 외침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렌트가 지적했던 것처럼 언제든지 아이히만이 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이히만처럼 무사유의 상태에 빠져 있다면,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 즉 무사유로 인한 악은 도처에서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를 통해 우리는 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생각하려고 하고, 그럴 때마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행복에 젖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슬픔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생각하기보다, 그 사람을 자신의 곁에서 없애줄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하게 된다.

선물을 받고 나면 항상 그 선물의 액면가와 유사한 대응 선물을 고르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관례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고받는 대부분의 선물이 명목상으로만 선물일 뿐, 그 이면에는 뇌물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중략) 사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만 한다.

삶이란 고통이자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라는 통찰이다. 결코 희망찬 메시지는 아니다.

잊지 말자. 불교에서 모든 요동치는 마음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부로부터 요동치는 마음은 극복의 대상이었지만, 외부로 인해 요동치는 마음은 긍정의 대상이었다. 전자가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마음이라면, 후자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조우하여 그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도록 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새로움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유한한 삶에 비추어보았을 때 우리는 도대체 언제가지 새로움의 뒤를 쫓을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새로움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다가 지금 더 소중한 것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를 일이다. 가끔은 뒤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생각보다 오래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촉각으로 접할 수 있는, 즉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여 현실 감각을 키워야 한다. 단지 이것만이 권력과 자본이내건 집어등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진인사대천명!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려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일희일비하지말라!

한비자는 덕은 득이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덕은 단순히 도덕적인 품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헌금의 액수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중략) 예수의 정신, 혹은 기독교의 정신은 카톨릭 교회나 개신교 교회에 있지 않고 해방신학의 전통에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해방신학에 따르면 노동자, 빈민, 여성, 외국인 노동자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면 누구도 자신이 기독교라고 자임할 수 없다. 

삶의 고뇌가 쌓인 만큼 타인의 고뇌가 읽힌다.



감정수업

벙커1 특강 <감정수업> 을 통해 48가지의 감정에 대해 전부 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파했다. 지금 당장 제일 꽂힌 그 감정에 집중하고, 그 감정에 깊이 들어가 볼 수 있는 책을 선택해서 읽으라고. 책을 덮고 제일먼저 떠오른 책이 바로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였다. 미래에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버려짐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순간, 연상의 남자나 여자는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간과하기 쉽다며 그는 마치 연상의 여자와 사귀다 헤어짐을 당해보기라도 한 것처럼 폐부를 찔렀다. 마침내 연상의 연인은 지금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연하의 애인과 결별을 선언하게 될 것이라고. 

하기사.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다고 한들 무엇이 바뀌었을까? 

후회는 언제나 늦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by 프랑수와즈 사강





제목을 보고 의아해 했다. 절벽에서 손을 떼면 죽겠다는 것 아닌가 하고. 하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단독성 그리고 주체성이다. 사다리나, 타인의 손을 비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오롯이 서야 한다는 것. 그것이 비록 절체절명의 절벽에 선 순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조직도와 법계도, 얼개 

어릴적부터 글을 쓰는 걸 좋아했다. 좋은 글이 나오려면 글의 개요, 얼개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배웠고 법을 전공한 로빈슨으로부터 뭐가됐든 '목차'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일까. 일할 때도 얼개를 중요시하다보니 조직도부터 그리며 시작하는데 그건 책을 읽을때도 마찬가지다. 인물관계도나 사건의 흐름을 기록하며 책을 보는 편이다. 이번엔 강신주 덕분에 처음으로 불교 법계도란걸 그려봤다. 석가부족의 성자인 석가모니(싯다르타)에서 시작되어, 무문으로까지 이어지는 법계도를 그려보면서 막연했던 불교 세계에 어설프게나마 입문하게되었달까. 일찍이 석가모니에겐 그의 사상을 잘 이해하는 이론가 미륵(마이트레야)과 애제자 둘이 있었다. 가섭과 아난이었다. 내가 가섭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아난보다 가섭이 먼저 해탈했기 때문이 아니다. 지적인 것에 천착했던 아난에 비해 치열한 수행을 통해 실천에 애썼던 가섭의 삶에 더 마음이 간 까닭에서다. 어쨌거나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선종의 꽃을 이룬 스님들 초조 달마, 육조 혜능, 조주나, 임제 등 걸출한 스님에 대해 만나보게 됐고 그들이 던지는 화두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신기한 것은 초반 3분의 2 지점까지는 대체 저 스님들은 어쩜 저렇게 허무맹랑한 화두를 던지는 것일까, 이해가 1도 안되던 것들이 막바지에서는 이해가 되며 미소까지 지을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아 저 스님이 왜 자기 제자를 이유도 없이 세번 불렀을까, 그 스님은 왜 임제스님을 때렸을까, 임제스님은 맞고도 다시 찾아가서 왜 그 노스님에게 감사인사를했을까 등등등 재미난 화두와 해석들이 즐비하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가며 자기 본래면목 그대로 주인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굳이 권할 필요가 없겠지만,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된 삶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지 않을까싶다. 깨달은 삶을 살아가는 것과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는 말을 명심하면서!


+ 동양철학은 물론 서양철학에도 정통한 작가 덕분에 조주, 임제, 싯다르트, 달마, 혜능은 물론 동양철학자들의 사상과 일견 맥이 닿았던 니체, 들뢰즈, 비트겐슈타인, 키에르케고르, 샤르트르의 사고도 만나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편애하는 밑줄

화엄이란 말은 들판에 잡다하게 피어 있는 수많은 꽃들의 장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그래서 들판에 가득핀 다양한 꽃들처럼 자기만의 향과 색깔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화엄세계입니다.
말은 뺄 수 없는 칼과 같습니다. 그냥 죽을때까지 사람의 마음에 꽂혀 있기 때문이지요. 불교에서는 행동을 업이라고 합니다. 타인에게 좋든 그르든 강한 결과를 남기는 업을 불교에서는 세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바로 삼업. 말로 짓는 구업, 생각으로 짓는 의업, 몸으로 짓는 업을 신업이라고 부릅니다. 묵언수행은 말로 나쁜 업이 아닌 좋은 업을 짓기 위한 스님들의 치열한 자기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주장자는 큰스님들이 길을 걸을때나 설법할때 들고 계시는 큰 지팡이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불교에서는 깨달은 사람 즉 불성, 혹은 본래면목을 실현한 사람을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마 삼근과 같은 사람입니다. 타자가 누구냐에 따라 자신을 그에 걸맞은 옷으로 만들어 그 사람에 입혀줄 수 있으니까요. 개구쟁이 아이를 만나 자신의 머리를 만져도 껄껄 웃으면서 아이의 친구가 되거나, 실연의 아픔을 토로하는 여인을 만나면 그녀의 시린 마음을 따뜻하게 덮어주는 옷과 같은 오빠가 되거나, 지적인 호기를 부리는 제자 앞에서 그의 알음알이를 깨부수는 주장자를 휘두르는 사자와 같은 선생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의 부처의 행동 아닌가요. 마 삼근처럼 말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인과는 달리 손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무엇인가의 눈치를 보면서 삽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본래면목에 따라 살기 힘들 겁니다. 주인이 원하는 가면을 쓰면서 살아갈 테니까 말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 불교는 자비를 슬로건으로 합니다. 보통 불쌍한 사람에게 베푸는 연민이나 동정으로 쓰이지만 산스크리트어를 살펴보면 우정을 뜻하는 '마이트리'라는 말과 연민을 뜻하는 '카투나'로 구성된 합성어가 바로 자비입니다. 자비라는 말에는 근본적으로 높은사람과 낮은사람이라는 수직성보다는 동등한 두사람이라는 수평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우리와 동등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비를 행할 때 우리는 어떤 우월감도 가져셔는 안됩니다. 자비에서 중요한 것은 마이트리의 정신이기때문이지요. 
제대로 환대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해묵은 소유에서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랑의 논리는 소유의 논리와 질적으로 다릅니다. 소유에의 의지가 강할수록 우리에게서 사랑의 힘은 그만큼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가 배고픈데 제게는 빵한조각이 있습니다. 당연히 배고픈 친구에게 빵을 건네줄겁니다. 바로 이순간 빵의 소유권을 포기한 겁니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나눠주는 것이 보시입니다. 무소유의 정신은 보시의 정신이 아니라면 의미없습니다. 게을러서 무소유에 있게 된 사람은 구걸 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한단지보라는 고사가 하나 등장합니다. 초나라 사람이 세련되어 보이는 조나라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다가 조나라 걸음걸이도 익히지 못하고 예전 초나라 스타일의 걸음마저 까먹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장자는 진짜여행을 소요유라고 표현했습니다, 소요라는 말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한가하다는 의미입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라는 아포리즘 모음 시집에서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고 말입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긍정하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외적인 무엇인가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고합니다. 권력과 지위를 추구하거나 엄청난 부를 욕망하고 학위를 취득하려고 하는 것도 다 그런이유에서입니다. 인간의 고질적인 허영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게라도 주목받고 사랑받고 싶은 애절함일 수도 있습니다.
자리이타 소승불교가 아라한을 강조한다면 대승불교는 보살을 강조합니다. 아라한이나 보살은 모두 깨달음을 지향하지만 아라한과 달리 보살은 중생을 미혹에서 인도하는 역할도 아울러 수행합니다. 아라한이 스스로의 깨달음에 치중한다면 보살은 자신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깨달음에도 힘을 기울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까 보살은 '자리'와 '이타'를 동시에 수행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자리이타는 깨달음을 통해 자신도 이롭게 만들고 타인도 이롭게 만든다는 겁니다.
거사라는 말이 있지요. 비록 스님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 스님보다 치열하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시인은 꽃을 보면 꽃에 마음을 가득 담고, 노을을 보면 노을에 마음을 가득 담습니다. 꽃이나 노을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과 부처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유사합니다. 자신이니까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시인이라면 자신의 본래면목으로 말을 하는 것이 부처이니까요. 물론 모든 시인이 부처는 아니지만, 부처는 반드시 시인이라는 단서는 하나 달아야 할 것 같네요
삼매는 참선하여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대승불교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유식학파와 중관학파 등 두가지 학파로 나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말을 빌린다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하는 법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충고를 반복하고 싶습니다. "생각하지 말고 보라 Don't Think, but Look "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럴거야라는 가치 평가나 희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든 중생이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홀로 얻은 깨달음에 만족해서는 안되지요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비오는 주말, '장자'를 읽었다.

타인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방법이 있다면 알고 싶었다.

지난 한달동안 어쩌다 선거캠프에서 일하면서 천태만상 인간군상을 모두 만나고 지쳐있던였다.

장자는 말한다.


끊임없이 나를 비우고,

자신이 옳다는 것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고

타인이 옳다고 하는 바대로 행해주는 것.


다시금 깨닫는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런 타인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방법 또한 부처가 되는 것 만큼 어려운 일임을.

그러나 어쩌겠는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서, 다시금 나는 다친 마음 토닥이며 책을 읽는다.


편애하는 밑줄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_소요유
송나라 상인 이야기의 주인공인 송나라 상인은 월나라에 들어서자마자 그곳에서 차이와 낯섦을 경험하게 된다. 모자를 팔기 위해 월나라에 들어갔지만 월나라 사람들은 모자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이한 공동체에 속한 두사람 사이에서는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 중재를 위해 논쟁에 개입한 제 3자는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첫째, 송나라 상인과 규칙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 둘째, 월나라 사람과 공동체 규칙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 세번째. 송나라와 월나라의 규칙과는 전혀 다른, 예를 들자면, 흉노 족과 같이 변방 지역의 이질적인 규칙을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송나라 상인과 월나라 사람 사이의 논쟁을 어떻게 중재해야 한단 말인가? (중략) 중재가 가능한 논쟁은 진정한 논쟁이 아니며, 진정한 논쟁은 중재가 불가능한 것이라는 역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장자는 우리에게 타자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이란 어떤 합리적 수단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략) 선교사들과 원주민들 사이의 차이 그리고 양자 사이의 마주침! 각각 다른 공동체에 속해 있고 그들이 따르고 있던 규칙 또한 상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서로 화해될 수 없는 두가지 원리”라고 부르고 있다.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 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_지락

이 이야기는 우리를 장자철학의 핵심으로 이끌어 준다. 하나는 타자라는 쟁점이고, 다른 하나는 선입견이라는 쟁점이다. 자신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타자와 마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타자란 자신이 속한 시스템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존재이다. (중략) 장자는 <우매한 보통 사람들>이나 <변화를 알아서 마음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에게도 모두 성심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전자의 경우가 자신의 제한된 성심을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고 믿고 타자에 강제하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타자와 만날 때마다 그에 걸맞는 성심을 능동적으로 새롭게 구성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장자의 성심은 아비투스(배치와 결합)라고 불릴 수도 있고 혹은 아장스망(다중체, 많다+주름의 합성어, 주름이란 일종의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발생한 흔적)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와 마주하면서 새로운 주름을 만드는데 실패했던 인물이다. 그는 기존의 주름만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앎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삶으로 한계가 없는 앎을 따른다면 위태로울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앎을 추구한다면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다 _양생주
유한한 삶과 무한한 앎! 장자철학이 주는 긴장감은 바로 이로부터 발생하고 있다. 모든 것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진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 <형이상학>의 핵심적 관점이다. 장자에 따르면 이런 형이상학적 사유를 따를 때, 우리 삶은 결국 위험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일체의 형이상학은 특정 시스템에만 통용되는 규칙을 절대화하면서 출현하는 유아론적 사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유아론적 사유의 문제점은 결국 애초부터 타자와의 새로운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나 자신의 삶에 대한 궁극적인 폭력으로 기능할 수 있다.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고 말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말했다. 원숭이 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그 원숭이 키우는 사람은 원숭이가) ‘옳다고 한 것’을 따랐을 뿐이다.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으로써 대립을 조화시키고 ‘자연스런 가지런함’에 편안해 한다. 이를 양행 이라고 한다.
 양행은 바로 타자성, 그리고 판단중지와 관련된 두가지 원리는 함께 적용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장자는 양행이란 말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에피소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조삼모사’이야기다. 저공은 원숭이들의 분노를 자아내려고 일부러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고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도 잠자기 전에 배가 고프면 잠을 청하기 어렵듯이 원숭이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저공의 사려깊은 배려에도 불구하고 원숭이들은 기뻐하기는 커녕 도리어 화를 낸다. 저공에게 있어 원숭이의 노여움은 자신이 사전에 미리 예측할 수 없었던 놀라운 사태, 즉 타자성의 사태를 상징한다. 마치 모자를 팔려고 월나라에 들어가서 당혹스러워했던 송나라 상인의 경우처럼 저공 또한 타자성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난처한 상황에 빠진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새로운 제안을 낼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넷, 저녁에 세알. 이제 원숭이들은 이 새로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마침내 저공도 타자성과 마주쳐서 생긴 당혹감으로부터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는 우리가 숙고해야할 두가지 쟁점이 있다. 첫번째, 타자성의 예측 불가능성에 관한 것. 다시말해 새로운 제안도 이전 제안의 경우처럼 여전히 원숭이들의 분노를 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새로운 제안 역시 실패했더라면 저공은 아마도 원숭이들이 기뻐할때까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저공에게 원숭이들의 속내를 미리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두번째 쟁점은 주체가 겪는 마음의 변화 과정에 관련된 것이다. 원숭이들이 수용한 저공의 제안은 ‘옳다’라는 원숭이의 생각에 근거해서 구성된 것이다. 역으로 거절당한 저공의 다른 제안들은 원숭이들이 ‘그르다’고 생각했던 것에 따라 구성되었다. 그렇다면 저공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제안을 부단히 제공할 수는 있지만 최종적으로 그 제안들을 옳은 것으로 확증하는 것은 원숭이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장자는 이것을 ‘인시’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타자가 옳다고 하는 것을 따른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옳다는 판단을 중지해야만 우리는 타자의 움직임에 맞게 자신을 조율하는 섬세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 계속된 거부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제안을 원숭이들에게 제안 하기 위해서, 저공은 부단한 판단중지의 상태를 견대낼 수 있어야만 한다. 판단중지의 상태, 즉 이러 불편한 상태에서 편안해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원숭이들과의 소통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긴장된 상태를 ‘천균’, 자연스런 가지런함이라고 설명한다. 
애태타가 어떤 주장을 내세운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항상 타인들과 화합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 군주의 지위도 없고, 타인의 배를 채워 줄 수 있는 재산도 없으며, 게다가 그의 추함은 이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이다. 타인과 화합할 뿐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며 그가 아는 것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국한된 것인데도, 남녀들이 그의 앞에 모여들고 있다_덕충부

노나라에는 애태타라는 추남이 한 사람 살고 있는데 그는 비움에 성공했던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판단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타인을 지배하려고 하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타인들이 발산하는 모든 미세한 기호들에 마음을 열어두고, 그들과 연결하는데 성공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애태타는 장자가 말한 소통의 진리를 실현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통의 진리를 실현한 것은 사실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들은 왜 그에게 계속 몰려드는 것일까? 군주의 권력도 없었고, 경제적 궁핍을 해결해줄 부유함도 없었다. 육체적인 매력이 충만한 것도 결코 아니다. 자기앞을 비워두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자유의 공간이라는 공백을 확보할 수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자유의 공간으로 타인들이 몰려오는 것이며 이 속에서 그 타인들은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자에 따르면 자발적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선 우선 권력, 부, 아름다움 등의 초월적 가치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제거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결국 그가 국가주의를 자발적 연대를 가로가막는 가장 중요한 장애물의 하나로 인식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걱정, 염려, 변덕, 고집, 아첨, 오만, 허세, 가식 등과 같은 사람의 마음은 음악이 비어 있는 곳에서 나오고 버섯이 습한데서 나오는 것처럼, 밤낮으로 우리 앞에 번갈아 나타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싹터 나오는지 알지 못하겠구나! _제물론
진정한 소리는 타자와 만나면서 발생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타자와 마주치지 않았는데도 발생한 소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소음일뿐이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걱정, 염려, 변덕, 고집, 아첨, 오만, 허세, 가식 등등. 이런 소음속에서라면 우리가 타자와 마주친다고 해서 어떻게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비록 소리가 난다고 하더라도 그소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소음에 묻혀 결국 희미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노자와 장자는 모두 춘추전국시대가 던져 준 문제, 즉 어떻게 하면 갈등과 살육의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절실하게 고민했던 사상가들이다.
만물들과 관계할 때 송견은 ‘선입견으로부터 결별하는것’을 시작점으로 삼았고, 마음의 포용함을 말했으며 (중략)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들을 설정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_천하
송견은 타자와 갈등하고 대립하지 않는 구체적인 행동강령으로 ‘모욕을 받아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준칙을 제안하였다. 모욕을 당한 수치감에 타자에 대한 적대감을 품으면서, 우리는 타자와 갈등하기 시작하는 법이다. (중략) 다시 말해 수치심과 명예욕은 결코 본질적인 욕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욕망은 우리에게 내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외적인 것을 내적은 것으로 착각한다면, 혹은 이런 선입견을 유지한다면, 우리는 타자와 치명적인 갈등관계에 놓이고 말 것이다.
장자는 양주, 송견, 혜시. 세 명의 선배들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다듬어 나갔다. 그는 양주로부터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배웠으며, 송견으로부터 선입견을 해체하는 공부의 중요성을 배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혜시로부터 추상적 논리의 세계와 언어의 구조를 비판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남곽자기가 자신의 제자인 안성자유에게 천뢰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구절. “만가지로 다르게 소리를 내지만 모두 자신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모두 스스로 초래한 소리라면, 그렇게 소리나도록 한 것은 무엇인가?”
비움이나 망각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긍정성을 되찾도록 해준다. 그러나 긍정적인 삶은 고독 속에서는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그것은 오직 자유로운 개체들의 새로운 연결이나 연대를 통해서만 안정적으로 확보될 수 있다.
표면적인 표현이 유사성에 현혹되어 노자와 장자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주와 국가를 위해 전개된 사유가 어떻게 개체와 소통을 꿈꾸던 사유와 혼동될 수 있겠는가!



상처받지 않을 권리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라캉은, 우리 욕망의 대부분이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타자의 욕망이라고 냉정하게 진단했다. 



철학 VS 철학

읽고 있는 중




김수영을 위하여 

거의 다 읽어간다. 







강신주 어록

중식업계의 자폭이죠. 짬짜면. 그거 중국집이 망하려고 작정한 거예요. 짜장면을 먹었을 때 짬뽕을 못먹은 고뇌가 얼마나 큰지 아세요? 그담으날 다시가서 짬뽕 먹어요(웃음) 뭐든지 가지려면 하나를 버려야해요. 중국집 아저씨들이 인문학을 안 해서 그래요. 신자유주의만 배워서(웃음).

베커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보면 돼요. 고도 안나오잖아요(웃음)

다 자기만 생각하자. 그러면 평화가 와, 라고(웃음). 양주는 래디컬해요.

이씨 조선의 가장 큰 문제가 셋째와 넷째 애들이 튼튼하다는 거예요. 첫째 애들은 병약하고.

냉장고가 악의 축이에요. 대한민국 모든 냉장고에 있는 음식만으로도 단언컨대 아프리카 나라 열개를 살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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