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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Jul 03. 2020

하나님과 팬데믹







Pandemic 유행병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 코로나 시기에 성경적이고 지혜로운 말이 무엇일까를 찾아내기 위한 시도. 

성급히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보다 충분히 애통하고 자제할 것. 애통하며 기도하면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다.


전염병이 생겼을때,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이교세계에서는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거나, 기도를 못했다고 여겼고

고대철학자들은 3가지 대안을 내놓았다. 세상만사가 다 정해져있고 바꿀 수 없으니 맞춰 사는 법 배우라는 스토아학파. 모든일이 어차피 무작위로 일어나니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라는 에피쿠로스학파. 현세는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땅에서는 지금 나쁜 일이 생기지만 우리는 결국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된다는 플라톤 학파. 


대부분의 서양인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에피쿠로스 학파와 같은 쾌락주의자. 세상에 온갖 일이 벌어지지만 남들과 격리된채 넷플릭스 즐긴다. 


어떤 미국인들은 코로나가 중국 탓이라 생각하고, 어떤 중국인들은 모든 게 미국 탓이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종말의 징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이 사태를 바라보는 출발점은 구약성경이다. 주후 21세기 세상에 구약성경은 어떻게 사용될까?



2장. 구약성경 읽기


무시무시한 상황과 엄청난 불의, 끔찍한 전염병이 닥칠 때, 혹은 죄가 없는데도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고, 뚜렷한 원인도 없는 희귀병으로 고통받을때 우리는 애통하고 불평하고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 


3장. 예수님과 복음서


예수님의 표적은 하나같이 새로운 창조였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병자를 고치고, 굶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고, 눈먼자를 보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렸다. 하나님이 하고 계신 새로운 일을 선포하는 앞을 내다보는 표적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 던지는 질문과 비슷한 요한복음 9장.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누구의 죄 때문에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이사람의 죄?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도, 부모도 죄를 짓지 않았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보이시려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가상의 원인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지 내다보신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신다. 과거의 죄에 대해 곰곰히 생각할때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주기도문, 드리는 법을 배우는 것. 


4장 신약성경읽기


사도행전 앞부분은 초기 교회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다. 사도행전 11장에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500킬로미터쯤 떨어진 시리아 안디옥에 있는 교회가 등장한다. 안디옥은 통상로에 있는 번화하 국제도시여서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거나 드나들었다. 다양한 국적을 지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교회는 점점 성장하고 있다. 바나바는 사울을 찾아 데려와서 가르치고 전파하는 사역을 돕게 한다. 이 무렵에 순회 예언자 몇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내려왔는데 그들 중에 아가보라느 사람이 성령이 계시한 내용을 전했다. 온세계에 큰 기근이 들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러자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주님이 곧 다시 오신다는 표적이 틀림없어, 라거나

-우리가 죄를 지었으니 회개해야 한다는 뜻이야

-모든 사람이 죄인이니 회개해야 한다고 온 세상에 전할 좋은 기회라고 말하지 않는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는다.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해서 이런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는지 알아내려고 시리아나 더 나아가 로마 제국 당국을 둘러보지 않는다. 이런 단순한 질문을 던질 뿐이다. 이런 일이 생기면 누가 가장 위험에 처하는가? 그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누구를 보내야 할까?

안디옥 교회도 기도하면서 하나님하 하고 계신 일 -기근이 발생한 이유가 아니라,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과 그들을 통해 하실 일을 깨달았다고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을 믿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세상과 세상의 재앙을 보면서 하나님이 왜 직접 개입하셔서 정리하지 않으시는지 의아해할때가 많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이런일이 벌어지도록 그냥 두시는가? 그 답은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 가난하고, 온유하고, 슬퍼하고,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정의에 주린 사람을 보내신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기도하는 겸소하고 신실한 사람은 왜, 라는 질문이 아니라, 무엇이라는 질문의 답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통해 만사에 협력하신다.


바울은, 더는 우리에게 경고하는 예언자가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몸소 경고하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 시대 이후로는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기근이나 전염병 같은 사건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5장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악의 문제'는 십자가 아래가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 정치인들의 악의문제가 늘 상황을 위험하게 해결하는 방식이듯이 말이다. 부시와 블레어는 높은 곳에서 폭탄을 떨어뜨려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폭탄은 훨씬 더 극단적 형태의 급진적 이슬람주의를 일으킨 또다른 동인이 되었음이 드러났다. 


우리는 어떻게 코로나시대를 극복할 것인가? 이 혼란가운데 교회의 소명은 무엇인가?

스타크는 2-3세기에 전염병이 유행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대처한 (그들을 간호한 것) 방식이 신앙 전파에 이바지한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설득력있게 주장한다. 병원과 호스피스를 설립한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처럼 열심히 할일을 했다. 갇힌 자를 찾아가고, 다친 사람을 돌보고, 이방인을 환영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그리고 아픈 사람을 간호했다. 


1520년대에 비텐베르크를 비롯한 다양한 곳에서 전염병을 만난 루터는 교회와 시민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설교자와 목회자들이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자기 목숨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지도자들과 가장들 역시 남겨진 사람들을 제대로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때만 자신도 전염병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5백년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유용한 조언이다.

루터는 전염병이 덮쳤을 때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행동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지키고 돕는 것이고 확실히 믿었다. 예수님이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은, 하나님 나라 표적을 드러내는 자가 되라는 부르심이다. 우리가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등 말만하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의 고통 한가운데서 애통하며 기도할 때 새로운 소명, 곧 치유와 지혜를 가져다 주는 소명, 권력자들에게해야 할 일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소명이 나타날 것이다. 


동네에 있는 번잡한 주류판매점에서 쇼핑은 할 수 있어도 길건너 오래된 채플에는 갈 수 없다. 예배가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e 예배의 위험은 혼자 생각하는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이 이위험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 인터넷으로 교회에 가봤다는 반응은 흥미로운 발전이다.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주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늘 살폈다. 어떤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은 증상으로 격리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거리두가가 달나라 여행만큼이나 어려운 번잡한 난민수용소나 제3세계 도심에 사는 세상, 이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을 명단 맨 위에 올리는 메시아의 의도를 보여주는 시편 72편 바로 뒤에 부자와 권력자가 늘 그렇듯 자기 식대로 사는 것을 불평하는 73편이 이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도전적인 순간에 바로 긍정의 요셉처럼 일할 수 있는 사람, 상황을 분석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비전을 그려줄 사람이다. 



요약하자면 이책의 결론은,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어주라는 것. 
코로나라는 재앙이 미국과 중국과 정부의 탓만은 아니라는 것. 하늘의 재앙이나 종말, 심판론도 아니다.
천재지변앞에 왜?라는 물음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에 집중하라는 메세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코로나라서가 아니라 코로나시기에도 우리가 각자 처한 곳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에 기꺼이 도움을 주고, 아프고 병든자, 애통해하는 자 곁에서 애통해하며 기도하라는 것.
해결책은 없다. 다만,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통해 만사에 협력하시는 분임을 깨닫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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