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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Nov 29. 2020

내 오랜 친구에게

2012년은 특별한 해다.

니가 12년간 연애를 끝내고 그녀석의 아내가 되었던 해.

딩크족으로 살겠다더니 바로 아이를 가져서 아기 엄마가 되었던 2014년.

2019년엔 그 애가 여섯살 생일을 맞았더랬다.

우리는 서른아홉살이 되었고.

2020년 너는 양가의 어머님 병환으로, 코로나로 인해 유치원에 가지 못하는 아이를 돌보는 일로,

모든 일상이 깨져버렸다.


오늘 문득, 간만에 너에게 내 진심을 고백하면서 노트북 앞에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너는 알 수 없으리라. 바쁘게 일하다가도, 엄마랑 마당에서 시간을 보내다가도, 윤콩이랑 엽떡을 먹다가도, 미리줄리랑 까페에서도 내 머릿속 한켠에 너에 대한 부채감으로 내가 꽤 슬펐다는 것을. 나는 왜 이것밖에 안되는 인간인가 한심해지면서, 미안하다는 생각만 하고, 인도네시아로 떠나기전 연재에게 그림책을 선물해야지, 생각만 하는 나. 그런 나를 따스하게 감싸주는 너. 니가 내 추억으로만 남지 않기 위해 올해도 내년에도 나는 우리의 오늘을 기록해나갈 거다. 절대로 너를 추억속에만 머물게 하고 싶지는 않기에.

#기록이체질 #기록집착자



1990년, 10살에 처음으로 만난 너는 온동네를 주름잡는 골목대장이었고

학교에서도 존재감을 나타내는 아이였다. 공부로도 노는 걸로도 짓궂기로도 전교 1등이었던.

나는 그저 착한아이였고 존재감이라곤 없었는데, 그런 네가 왜 코스모스 핀 길을 지나 우리집까지 나를 찾아와주었는지 잘 모르겠다.


1991년, 결국 우리는 베프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같다. 같은동네도 아니었고, 당시엔 공통점도 별로 없었는데. 니가 나를 알아봐주었다니. 뭐때문에?


1992년 우리는 자주 벌을 섰다. 종종 나쁜일에 가담했고 같은 애를 미워하고 같은 선생님을 짝사랑했다. 같은 수업을 듣고, 방과후엔 언제나 함께 운동장을 배회하며, 주말엔 오락실을 가고 떡볶이를 먹고 목욕탕엘 함께 갔다.


1993년에도 우리는 자주 혼이 났다. 여전히 같은 선생님을 짝사랑했다.


1994년, 같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국민학교 6년동안 딱 한번을 제외하고 내내 같은반이었는데 반이 달라졌다. 국민학교는 반이 달랑 두개였다. 50% 확률로 같은반이 될 수 있었지만 중학교부터는 5개 반이 생겨서 같은 반이 될 확률은 20%로 줄어들었다.


1995년, 반이 달라지면서 노는 친구들도 달라졌다. 작은 다툼으로 우리 사이에는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 잘못이었다. 내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서부터...였던걸로 기억한다.


1996년. 반이 또 달랐다. 너는 여전히 전교 1등을 했고, 체육대회나 환경미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고 선생님들에게 이쁨을 받으며 지냈다. 나에게는 뒤늦게 방황의 시기가 찾아왔다. 친구 관계도 흔들렸고, 공부는 손을 놓게 되었다.


1997년.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반이 되었지만 서먹서먹했다.


1998년. 다른 반이 되었다. 다시.


1999년. 같은 반이 되었다. 국민학교땐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곧잘 하던 내가 왜 공부를 놓게 되었는지 안타까워하며 니가 내게 공부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고3. 너무 늦은 시기였다)다시 가까워지면서, 내가 몰랐던 너의 친구들 존재를 알게되면서 서운함이 들었다.

세기말이라고 여기저기서 특집 드라마를 만들었다. 나는 여전히 공부하는게 싫었다. 야자를 하는 날보다 땡땡이 치는 날이 더 많았고 야자를 하는 날에도 음악을 들으며 공부는 커녕 가사를 적어내려갔다. 너는 지치지도 않고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며 공부에 매진했다.

큰언니가 결혼했다.


2000년. 너 혼자 대학생이 되었다. 너의 길고긴 연애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그 남자를 데리고 니가 내 알바하는 비디오대여점으로 찾아왔다. 같이 그 유명한 성내역 오튀를 즐겨먹던 시절이었다.


2001년. 나도 대학생이 되었다.

여름방학에 니 남친을 포함한 니네 학교친구들 남셋, 여셋이 니네집을 찾아왔는데 니가 나를 불러서 소개했다. 그중 한 사람과 눈이 맞았다. 그해는 문자 그대로 눈만 맞았고 몇해뒤 갑작스럽게 군대 가기 전에 짧게 만나다ㅡ 백일휴가 나온날 끝이났다.


2002년 학교는 달랐지만 엄석대와 셋이 자주 서로의 집을 오갔다.


2003년 5월, 아빠가 돌아가셨다.


2004년 조승우에 빠져 뮤지컬 세계를 항해하다 우연히 대몽님을 알게되어 만나러갔다. 애프터는 없었다. 싱가폴 대학으로 연수를 가는데, 온통 모르는 사람들과 가는 거라, 걱정하는 나를 위해 니가 공항까지 바래다줬다.


2005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잡지사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첫출근날 니가 김치볶음에 갓한 밥을 차려줬다. 너와 너의 언니와 셋이 대학로에서 <십년후>라는 연극을 봤다. 당시 스물다섯인 나는 너에게 물었다. 십년후 서른 다섯에 우린 어떤 모습이겠느냐고. 너는 말이 없었다.


2006년 나는 작은 잡지사에서 거의 매일 밤새며 일했고, 너는 '이력서를 내지도 않고' 취업에 대한 걱정을 하며 지냈다.

여전히 자주 만났고 주말엔 거의 붙어지냈다.


2007년, 영어의 한계가 느껴진다는 그럴듯한 뻥을 치며 매너리즘에 빠진 나는 도망치듯 영국으로 떠났다. 남겨진 너는 그간 생각이 없던 취업에 적극적으로 임했고, 내가 떠나있던 시기에 드디어 너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08년 어학연수 마치고 광화문 작은 회사에 다녔다. 퇴근 후나 주말엔 또 붙어지냈다.


2009년 갑빠를 모두 초대해서 대학로에서 <연애특강>을 봤다. 이런걸 보면 뭐하나...


2010년 독거노인으로 살면서 너를 괴롭게 할것 같았던 너의 언니가 결혼을 하는 역사적인 해였다.


2011년 스타트업에서 우연한 기회로 홍보팀장으로 일하게됐다. 유희열 <어둠속에 벨이 울릴때> 코너에서 어플소개도 하고, 헉소리 상담소에서 연하남 꼬시는 법을 라천민에게 설명해줬다, 그럴 계제가 못되는데 흑역사다.


그리고 2012년이 니가 결혼한 그 해다.


2013년 결혼 2년차, 아직은 큰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2014년 너의 딸랑구가 태어난 해


2015년 딱히 기억날게 없었다. <빈센트 반고흐>  공연을 보며 네 생각이 났고 아마도 공연 후 자주 후기를 들려줬던것 같다.


2016년 국카스텐에 빠져 혼자 스탠딩 콘서트에 갔다. 니가 싱글이라면 너를 꼬셔서 갔을텐데.


2017년 미저리랑 <루나틱>을 보고 너에게 루나틱에 대한 줄거리를 들려줬다, 죄책감이 사람을 미치게도 하니까 그런 마음 갖지말자고 당부했다.


2018년 <프랑켄슈타인>을 보면서 다시금 생각했다. 오늘의 이 공연이 완벽할수 있었던 것은 완벽한 공연파트너, 나의 소울메트인, 너 덕분이라는 것을. 한지상 앙리가 돌아오면 무조건 재관람 가자고 약속했다.


2019년 <호프>를 보며 둘다 폭풍오열했다.


2020년 양가 어머님들 병환으로 유독 정신없던 너의 한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죄책감이 들었던 나의 해.


2021년 너의 3가족이 안전히 인니로 떠났다. 남편이 인도네시아 주재원으로 파견이결정됐기 때문이다. 남편이 먼저 떠나고 한두달 정도 한국에서 짐정리를 했을때, 너의 딸이 아빠의 부재로 인한 불안함때문이었는지 갑자기 처음으로 식사를 거부하는 증상이 생겨 우리를 걱정케했다. 일주일 반정도 같이 너와 너의 딸과 지냈다. 결국 인니에 가서 아빠를 만난뒤 다시 예전처럼 밥을 잘 먹기 시작했다고 해서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

니가 만든 가족에 닥친 문제에 나도 처음으로 너무 긴장했고 예민해서 다른친구들을 만나지도 않고, 직장일도 거의 놓고 지냈던 시기기도 했다.


2022년 내가 한달 휴가를 얻어 너희 가족과 인도네시아에 가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오려고 했으나, 역시나 그럴 시간이 없었고 결국 니가 한국으로 와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딸과 함께 차도없이 여기저기 동분서주 다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처음으로 내 차로 셋이 양평을 갔던 해.

역시나 운전이 서툴러서 타이거가 펑크났는데 네가 인니로 떠난 후 타이어 비용을 보내줬었다. 안그래도 되는데.


2023년 네가 2주간의 짧은 일정으로 한국에 다녀갔다. 인니로 떠난 두번째 해.

함께지내지 못한 4월3일 너의 생일이 한달이나 지났지만 늦게나마 생일선물로 <레드북>공연을 예매해서 함께봤다.

국내창작뮤지컬이었고, 나도 처음보는 터라 공연이 재미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프켄도 호프도 성공적으로 함께했고 사실상 그어떤 공연도 즐길줄 아는 터라 그렇게 크게 걱정은 안했다.역시나 공연은 너무도 재밌게봤다. 우리 둘다 공연장이 떠나갈만큼 웃었으니.

내가 대학원에 진학한 첫해였고 경기는 나빴지만 일은 너무 몰렸던 해라, 충분히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너를 보낸 것에 대해 미안함 마음이 들었다.

그런 내마음도 모르고 엄마집에 들러 반찬등 먹을것을 이것저것 챙겨주고 떠난 너. 나도 너희 어머니네 들러 망고등 이것저것 챙겨드렸다.

어머니는 내가 전화하면 늘 “어이고 우리 막내딸 잘 지냈어?”하고 전화를 받아주신다.


2024년 2024년에는 내가 꼭 인니에 가서 널 만났다, 라는 기록을 남겨두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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