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9일 이후 벌어진 사태의 정리가 필요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기록을 남겨야 했습니다. 저와 제 가족이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책을 발간하는 것은 부담이지만, 검찰.언론.야당의 주장만이 압도적으로 전파되어 있기에 더 늦기 전에 최소한의 해명은 해야했습니다. 논문과 책을 쓰는 것이 직업이지만 이번 집필은 힘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순간과 단계마다 돌아보는 것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피에 펜을 찍어 써내려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꾹 참고 써야했습니다.
_2021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 서거일에 쓴 조국의 서문 중에서_
"내가 자진 사퇴하거나 장관 지명이 철회되었다면 보수야당과 언론은 검찰개혁에 동참했을까? 검찰은 검찰개혁법안 통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을까?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검찰은 압수수색 이후 내가 사모펀드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수사를 접지 않고 나와 내 가족 전체에 대한 전방위적 저인망 수사로 나아갔다. '멸문지화'의 문을 연 것이다."
2019년 이후 대응하고 수습할 일이 너무 많아 아버지 성묘를 가지 못했다. 사태가 일단락되면 조용히 성묘를 할 것이다. 아버지 무덤앞에 서면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올지 모르겠다.
박지훈 <더 브리핑 기자>는 이런 글을 썼다. "웅동학원 재판에서 피고인은 단 1명, 조 전 정관의 동생 조모씨 뿐이었다. 즉 검찰과 언론이 그토록 주연배우로 세우고 싶어했던 조국은 공소장에는 아예 이름조차 한번 거론되지 않는다. 당연히 판결문에도 나오지 않는다. 공소장도 판결문도 '피의자의 형'이란 명목으로도 억지로 끼워넣지 못했다. 다시 말해 '조국'과 '웅동학원'을 연관시키며 떠들었던 그 모든 언론 보도들이 '모조리 가짜뉴스'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중략) 선친께서 살아계셨다면 화가 나서 복장이 터진다고 하셨을 것이다. 돌아가셨기에 이런 꼴을 겪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웅동학원 비리라는 이름으로 선친을 비난하고 모욕을 준 사람들은 죽을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류경렬 변호사가 최강욱 열린우리당 대표 1심 판결이후 페이스북에 쓴 글을 보자. "만약 최강욱 의원뿐만이 아니라 비슷한 확인서를 작성해준 수많은 다수의 사람들을 똑같이 기소하고 처벌한다면 조금은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오직 조국 교수 아들에게 확인서를 작성해준 최강욱 의원만을 기소.처벌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특정인을 콕 찍어 죽이겠다는 의도 외에는 기소 및 판결의 이유를 남득할 수 없다." 조정식 전 <신동아>기자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자기 딸의 입시 준비 과정을 잘 아는 교수 친구는 만약 검찰이 입시생들이 제출한 자소서를 수사하면 학부모와 교사가 줄줄이 공범으로 걸려들 것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중략)
내가 아는 바로는 고교생 인턴. 체험활동 확인서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내 가족 사례가 처음이다. (중략)
딸의 고교 생활기록부는 불법 유출되었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수사는 정치적 중립성을 지킨적이 없다. 검찰총장을 비롯한 내부 비리는 제외되거나 최소화되었다. 윤석열 검찰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항상 고 노무현 대통령의 한탄을 잊지 않으려했다. "검찰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면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주어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자 정치적 중립은 무론이요 정치적 독립마저 스스로 팽개쳐버렸다. 검경수사권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럽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고 한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퇴임한 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서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운명이다, 중에서)
검찰의 회유와 종용에 따라 한명숙 총리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검찰에서 진술한 후 법정에서 번복했던 한만호씨는 자신의 검찰의 안내대로 따르는 강아지였다고 토로하며 '단추하나 가지고도 양복을 만들고 바바리도 만들고 코트도 만들었다'며 검찰의 조사방식에 대해 말했다.
MB의 범죄혐의는 2008년 특검에 의해서도 무혐의처리되었다. 당선 직후인 2008년 1월 특검팀이 꾸려졌다. 판사출신 정호영 특별검사 지휘로 조재빈, 윤석열, 유상범, 신봉수 등 10명의 '에이스 검사'들이 파견되어 일했다. 그러나 특검팀은 MB대통령 취임직전인 2008년 2월 21일 'MB는 다스의 실소유주가 아니다'라고 발표하며 무혐의 처리했다. (중략) 상설 조직과 자체 수사 인력을 갖춘 공수처가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MB는 대선 전, 적어도 취임 전 기소되었을 것이다. 12년이 지난 2020년 10월 29일 대법원은 이명박 씨가 (주)다스의 실소유주임을 인정하고 징역 17년, 벌금 130억원, 추징금 57억 8천여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그러나 검찰은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
1. 검찰은 2015년 5월 동료 여검사를 성폭행한 진동균 검사에 대해 수사는커녕 감찰도 하지않고 사직처리했다.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의 용기있는 문제제기 뒤에야 비로소 '검찰 성주행 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회복을 위한 진상조사단'이 만들어져 조사가 진행되었다. 2.2016년 고교동창에게 금품과 향응을 받아 큰 물의를 일으킨 김형준 부장검사(박희태 전 국회의장 사위) 사건도 유명하다. 고교동창 스폰서는 술집 여주인에게 김 부장검사 접대용으로 속칭 2차를 나갈 접대여성 사진을 보내라고 요청했다. 접대여성 계좌로 110만원을 송금한 것이 확인되었다. 김형준 부장감사와 접대여성이 같이 호텔방에 들어간 것도 확인되었다. 술집 여주인도 접대여성이 2차를 나갔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검찰은 호텔방에 들어간 두 사람이 성관계를 부정했고 확인할 방법이 없다며 성매매에 대해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했다. 3. 검찰은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에게 서울 청담동 룸살롱 접대를 받은 검사 3인의 뇌물죄를 무혐의로 처리했다. 참으로 희한한 계산법으로 검사 일인당 접대비를 1회 100만원 미만으로 만든 후 한명의 검사와 술자리를 주선한 특수부 검사 출신 이 모 변호사만 김영란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다른 검사 두명은 어떻게 불기소되었을까. 밤 11시 이후 추가된 밴드비용과 접대여성 비용 55만원어치 향응은 먼저 자리를 뜬 검사 2인에게는 뺐다. 그후 총 접대비를 5인으로 나눠 검사 1인당 접대비를 96만 2,000원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황당한 계산법으로 밤 11시 이후에도 룸살롱에 있었던 한명의 검사만 김영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4. 서울시 공무원 유유성씨 간첩조작사건이 있다. 5. 채널A이동재 기자와 한동훈 검사장의 검언유착 의혹사건도 있다.
검사 출신으로 검사의 민낯을 폭로한 비판서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를 출간한 이연주 변호사는 개탄했다. "검사들은 과거 언론 탄압하고 민간인 사찰하고 거짓자백을 강요했던 잘못은 한번도 되돌아보지 않으면서, 검찰이 휘두른 칼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느끼지 않으면서, 검찰조직 문제에만 기개있게 덤비고 정의를 내세운다.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겁한 사람들이다, 정권은 유한하고 검찰은 영원하다"
"수사가 아니라 사냥이 시작되었다. 수십개의 칼날이 쑤시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가족의 살과 뼈가 베이고 끊기고 피가 튀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보아야 하는 절통이었다"
나에 대한 기소가 이루어진 후 2019년 12월 31일 <시사인> 고제규 편집장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수사가 기러질수록 검찰의 목적은 눈에 보였다. 조국 구속, 결과는? 돌팔이 수준의 수사라는걸 누구보다 검사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100여명이 126일을 수하하고 수사타깃이었던 조국 전 장관을 구속조차 못시켰다. 검찰로서도 수치라고 평가할 것이다"
별건수사에 시달리는 피의자는 극도의 정신적 고통 속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2015년 4워 해외자원개발 비리로 수사받던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은 검찰이 아내와 아들을 털자 자살했다.
2021년 3월 홍익대 미대 김승연 명예교수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국민의 힘 부산시장 후보 박형준씨 부인이 홍익대 미대 입시 실기시험 후 딸과 함께 찾아와 잘 봐달라고 부탁했고 그 청탁 후 대학교무와 직원이 채점장에서 어느것이 박후도 딸의 실기작품인지 알려주었으며 "30점 이상 주기 어려운 실력이었지만 옆에 있던 교수의 지시로 80여점을 줬다"라고 증언했다. 이 사건이 향후 어떻게 처리되는지 주목하고자 한다.
"뒤로 되돌릴 수 없는 개혁, 결국은 제도화, 제도화, 제도화라고 봅니다. 죽을힘을 다해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내디딜 겁니다. 언제 어디까지일지 모르지만 갈 수 있는데까지 가볼 생각입니다"
당시 고교생 인턴 체험활동은 학교의 주선이나 부모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그런 기회 자체가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특혜로 인식될 수 있었다. 따라서 부모찬스라는 비판을 겸허히 감수한다.
인사청문회에서 가장 모욕감을 느낀 순간은 자유한국당 김진태의원의 언동이었다. (중략) 그는 내딸의 출생신고를 누가했는지를 따지면서 가족관계 등록부를 요구했다. 당시 준비가 여의치 않아 가족관계 증명서를 제출했더니 그는 그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참으로 불쾌했다.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국민의 대표기관으로 장관 후보자에게 거센 추궁을 하는 것은 권리이겠지만 이런 식의 질문과 행위를 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인사 청문회가 끝난 후 <오마이 뉴스> 김행수 기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서 조국이라는 사람의 능력이나 정책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딸 아내 어머니 동생 이혼한 동생의 처 5촌 조카 돌아가신 아버지 등 그의 가존을 둘러싼 의혹만 거론하다가 끝나버렸다. 이런 신상털기를 청문회라고 하는것 자체가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2019년 12월 31 고제규 편집장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윤석열 검찰은 첫수사부터 정도를 한참 벗어났다. 인사청문회 전 강제수사 돌입이라는 전대미문의 무리수를 뒀다(이럴때 전대미문이라는 단어를 쓴다). 국회의 시간과 대통령의 시간을 빼앗고 총장 1호 수사로 인지수사도 아닌 고소고발사건에 특수부를 대거 투입해 대대적인 강제수사에 돌입했다.'
추석연휴기간인 9월 14일 나는 부산 추모공원으로 가서 고 김홍영 검사의 묘소를 참배했다. 김 검사는 2016년 5월 19일 서울남부지검 형사부 2년차 검사로 근무하던 중 직속상관이었던 김대현 부장검사의 괴롭힘에 힘들어하다가 33세 나이에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중략)2020년 10월 26일에는 김 검사를 괴롭혔던 김대현 부장검사가 회식자리 폭행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이제 김홍영 검사도 안식을 찾았으리라.
내가 장관에서 물러난 후 건국대 이종필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5주라는 짧은 법무부장관 임기동안 장관으로서 할수있는, 하지만 지난 70년 동안 하지못했던 주요 조치들을 단행했다." 검찰출신 이건태 변호사는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인터뷰에서 특수부 축소와 심야조사 폐지 등을 예로 들며 "재임기간 36일간 10년동안 안됐던 일을 다 해놓은 것"이라고 평했다.
"나는 죽지 않았다. 죽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의 흠결을 알면서도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생환, 그것이면 족했다."
9월 28일 7차 검찰개혁 촛물문화제가 열렸고 100만명 이상의 시민이 모였다. (중략) 이 대규모 집회의 기폭제는 9월 23일 집 압수수색이었던 것 같다. 11시간에 걸친 압수수색, 딸의 중학교 2학년 시절 일기장 압수, 기자들의 희희낙락한 표정 등이 보도되면서 시민들이 분노한 것이다. 검찰은 무엇을 기대하면서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을 가져간 것일까. 아빠인 나도 보지 않은 딸의 일기장이었다. 딸은 그안에 적힌 내밀한 심경과 고민이 언론에 공개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7차 촛불집회 이틀뒤인 9월 30일 한양대 박찬운 교수는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중략) 조국이 아닌 누구에게라도 가해질 수 있는 것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선택적 정의다" 시간이 지난후 <조국의 권리: 그가 되찾은 권리만큼 우리 국민은 안전해진다>는 제목의 글을 보았다. "언론권력, 검찰권력, 정치권력, 자본 기득권 권력까지 총체적으로 결합해 조국 사냥의 거대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검찰은 무리한 수사 무리한 기소, 무리한 구속을 해서는 안되었다. 언론은 허위 과장보도, 받아쓰기, 속보와 단독경쟁, 과잉보도를 하지 말았어야한다. 이 모든 불법과 부정이 조국 일가를 대상으로 자행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을 작동시킨 각 권력의 동기와 동력이 살아있는 한 누구에게나 다시 복제되어 재현될 수 있다는 현실을 명백히 경고한다"
많은 화백들이 온오프라인에서 윤석열 총장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고군, 박건웅, 오금택, 이정헌, 전종원, 최민, 최재용 화백 등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그림 한장에 담긴 큰 힘을 알게 되었다. 검찰 권력의 극악무도함과 검찰개혁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시민의 모습을 명짛아게 형상화한 고군 화백의 그림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박건웅 화백이 그린 '선택적 수사' 선택적 보도 선택적 분노에 대한 통렬하고 날카로운 풍자 그림을 보면서 심화가 풀렸다. 이정헌 화백이 그린 따뜻한 위로와 굳센 연대의 그림을 보면서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전종원 화백의 코믹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그림을 보면서 절로 미소르 ㄹ지었다. 검찰개혁 국면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에 대한 최재용 화백의 절묘한 캐리커져를 보면서 폭소를 퍼뜨렸다.
"권력기관 개혁을 피고인으로서 지켜보아야 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날벼락처럼 들이닥친 비운이지만 지치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송구하고 감사합니다"
현재 나와 내 가족에 대한 재판은 진행 중이다. 정경심 교수는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 2심이 진행 중이다. 나도 피곤이라는 굴레를 쓰고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장관직을 끝까지 고사하고 학교로 돌아갔어야 했다는 후회를 여러번 한다. 그러나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대법원 판결까지 얼마가 걸릴지 모르지만 사실과 법리에 기초해 검찰의 공소사실에 대해 철저히 다툴 것이다. 나의 정무적 도의적 불찰과 실수는 사과할 것이다.
"윤석열에게는 촛불혁명보다 검찰 조직의 보호가 더 중요했다. 민주보다 검치가 우위였다. 그는 영웅에서 반영웅으로 공무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2019년 하반기 이후 전개된 검찰수사를 '검찰 쿠데타'라고 최초 규정한 사람은 경희대 김민웅 교수라고 기억한다. 김 교수는 나에 대한 전면적 압수수색이 이루어진 이틀후인 8월 29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번 검찰의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에 대한 전격 수사행위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는 충격을 주지 않는 강누데 감추어진 장막 안에서 결정적으로 권력의 판도를 바꾸는 이른바 조용한 쿠데타 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ㅓㅈㅁ이다. 사회전체에 즉각적인 타격을 주는 군사 쿠데타와는 다른 유형의 정변이다. 일종의 궁중 쿠데타인 셈이다. 실제로 진행되는 사태는 검찰개혁 반발세력의 반격성 선제공격, 으로 그 본질이 압축되는 것은 아닌가 한다. 지금 상황은 조국이라는 정치장교를 거부(Veto)한 붛나 검찰의 전략이 주도하는 국면이다.
이책을 두고 살생부냐는 궤변을 펼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다만 치유록이라 부르고 싶다. 전 국민 앞에 처자식은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낱낱이 까발려지고 조리돌림당해본적 없는 이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스런 나날들 그리고 기억들. 글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치욕의 시간이었으리라.
서문의 상당부분을 지지자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지면을 할애했다며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던 권** 기자에게, 묻고싶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혹시 그게 뭔지 아느냐고. 모두가 나를 비난하고 등을 돌리는 순간에도 내 곁에서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주고 지켜봐주는 사람들이다. 공감되지 않는다면 그저 조용히 읽던 책장을 덮으면 된다.
..... 물론, 수많은 지지자가 있더라도 쉽지않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고 노무현 대통령 경우도 있다. 광기어린 검찰이 그 사냥감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몰아세울 때. 사냥감은 죽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다.
민간인 사찰. 증거 조작. 거짓 자백. 동료 성추행. 선택적 수사를 일삼는 후안무치한 집단. 자신들의 과오는 되돌아보지 않으면서, 자기네가 휘두른 칼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느끼지 않으며, 오직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한 족속들. 야비한 수법으로 조국일가를 맹공격했던 광기의 집단, 검찰. 그리고 심판받고 벌 받아야 마땅한 언론. 이후 조국사건이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따라 조국 이후의 미래가 달렸다, 고 생각한다. 조국은 장관직을 내려놓으며 불쏘시개로 쓰임이 다했다고 말했지만 아직 그의 역할이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P.S 당시 서초동 촛불집회에 못나갔던 미안하고 죄스런 맘을 담아 이 책이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힐 수 있도록 후원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