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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Jul 26. 2021

누가복음

섬김을 받으려는 것과 섬기는 것



누가복음은 데오빌라각하에게 쓰여졌다.
로마 현직이든 전직이든 최상층 관료라고 생각되어진다.


누가복음 4장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전에 마귀에게 시험 받는 장면이 나온다. 누가 복음 시작할때 드러난 것처럼 이기록은 전부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낸 것이다.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수 없으나 유대인이 아닌 로마제국의 고위관리이거나 고위관리직을 지낸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로마제국은 거대한 제국이었다. 지금 누가는 예수님의 생애를 그에게 기록하여 보냄으로써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보이고 있다. 보이는게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기독교는 성립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통치자가 하나님이란 것을 알며, 하나님이 예수안에서 그가 어떤 분인지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항복시켜 고백케 하는 시간, 그것이 기독교의 오늘이다.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보는지가 세계관에 있어 중요한 질문이란 건 3장에서 살펴봤다. 자연주의란 물질이 전부다, 세상엔 보이는 물질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믿는 것이다. 물질계는 영적이요 초월적인 영역은 없다는 뜻이다. 물질계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 유지되며 폐쇄되었고, 인간도 복잡한 기계이며 죽으면 소멸한다고 믿는다. 역사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연속이며 의미나 목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연주의 세계관이며 자연주의 사상이다. 이는 모든 자연인에게 막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자녀들을 가르칠때 <너 그렇게 살아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의 배경에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노력해야 하고 애써야 하는 인과법칙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인과법칙에 묶여있고 인간된 가치와 의미를 창출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인과 법칙을 깰 능력이 없다. 그래서 결국 자연주의는 늘 허무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자연주의가 허무주의로 가는 걸 반박하는 사람이 실존주의자다. 실존은 관념과 사유와 대비되는 실제적 현실이라는 차원이며, 실존주의는 다만 인과법칙에 묶여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격성을 발휘하는 존재, 결단과 선택+감정적 반응을 할 수 있는 존재를 증명하는 차원에서 실존주의라고 한다. 생각하는 존재요, 결정하는 존재라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사상이 실존주의다. 대표적인 사상가는 사르트르다. 인간은 법칙보다 큰 인격적 존재라고 주장한다. 기계의 부속이 아니라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 크게 부각되었다. 인격에는 법칙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가 있다. 나쁜 예지만 거부권 중 가장 크게 나타나는게 자살이다. 사는 동안 법칙에 묶여있지 않겠다. 인과법칙이 날 끌고가는 것에 순순히 붙잡혀 가지 않고 내 인생 내가 결정하겠다는 것의 대표적인 것이 자살이다. 그런데 이 자유, 이 선택. 이 결정이 아무런 근거가 없다. 결정이니 선택이니 이런 단어 자체가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공부할것이냐 말것이냐를 선택/결정한다고 가정해보자. 결정을 내가 했다고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 헐리우드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 <내가 결정했으므로 난 후회안해> <내가 놀아서 못살게 됐지만 후회안해> 이런 건 어리석은 것이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실존주의가 부르짖는 반발은 인간은 기계에 속할수 없다는 자각은 깨우쳤지만 해결할 능력은 없다는걸 알 수 있다.자유란 아무때나 하고싶은게 아니고 어떤 권위위에 서야 한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라고 했다. 진리는 권력도 지식도 아니다. 예수는 내가 곧 길이고 진리, 라고 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게만 있는 진리 위에 서는 것이요 그때 비로소 자유가 있다. 정당한 선택이 가능해진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진리와 원리, 생명 위에 서 있는 것들이다.


* 누가복음 1장 46절 참고

마리아 찬송의 핵심은 모든 것의 통치자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법칙이 아니다. 비천한 자에게 비천한 결론을 주는게 아니라 비천한 자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은혜를 주는 통치자다. 세상이 가진 것으로 결과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교만한 자와 부자를 낮춘다. 그들이 가진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을 주시고,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받게 하시는 것에 대해 마리아가 찬송한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법칙 속에 갇혀계시지 않고 그 법칙을 만들었고 그 법칙을 생명과 영광으로 채우는 분이다. 기독교는 자연과 충돌하거나 인과율을 깨뜨리는게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란 인과율보다 크다. 인과율을 무시하지 않는다. 인과율보다 몇배의 사랑과 의지와 용서와 기다림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며 하지 않을걸 주신다. 자식 공부 못하는 것 때리고 눈물이 마르기 전에 데리고 나가서 맛있는것 사주는게 부모다.

* 에베소서 1장 3절 참고

구원은 믿음의 결과다. 하나님의 뜻의 결과다. 구원의 내용은 여러관점에 따라 풍성하다. 하나의 관점으로 담기에는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다. 하나님의 뜻과 성실하신 차원에서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뜻하고 목적하셨기에 그것을 이루신다. 자연주의의 인과법칙과 얼마나 다른가? 비인격적 법칙에 묶여있는 존재가 아니라 눈물이 있고 피가 있고 용서가 있는 인격앞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용서하고 이해하고 넘어가고 복주시는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것 아닌가? 오직 이기심과 규칙밖에 없던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이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용서와 자비, 사랑과 믿음을 약속했다. 인간사이에서도 우정과 신의는 인과법칙을 벗어나는거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고백은 그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항복시키기 위해 인격을 동원한다.


오늘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당하는 시험에서 보듯 마귀가 원하는 간단한 거래가 아니다. 사랑하는 그의 아들자를 보내어 우리를 사랑하심을 증명하고, 사랑하는 자안에서 그 사랑하심을 모두의 것이 되게 하게 하시어 그의 뜻을 이루신다. 인격자인 우리 인간의 전인격적 항복으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작심하셨다. 이것이 우리를 이자리에 있게 한다. 우리는 이런 신앙고백과 이런 약속과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자리에 있다. 세상앞에 설때마다 보이는것을 포함하여 성실한 법칙, 공정한 법칙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인격자라는 사실 앞에 우리를 이해하고 있기에 우리는 현실을 이기는 것이다. 현실을 다만 법칙으로만 살지말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조건없이 결과를 요청하고. 떼 쓸수 있다. 여러분의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하나님의 뜻과 결부시켜야 한다. 그러나 누구나 마음껏 기도할 수 있다. 아멘. 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다. 인간된 존재와 여러분들이 사는 가치를 기독교 신앙으로 확인하기 바란다. 인격자인 하나님 통치아래사는 자답게. 혹은 삶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인간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기독교 신자된 영광과 자랑만은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여러분들의 인생되길 바란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반문하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삶이 하나님이ㅡ 통치아래 있는 것을 기억하고 어떤 정황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기쁨, 하나님 섬기며 사는 일에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여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http://lamp.kr/lamp-sermon/?p=4612




누가복음 5장

박영선 목사님이 강해설교한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2011년 설교)

http://lamp.kr/lamp-sermon/?p=4618

고기를 잡는게 업인 사람들이 밤새 고기를 못잡고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 가르침을 줍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꼼짝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되고, 가르침을 들으면서 그들은 예수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게 되는데요. 그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예수가 말하고, 그들이 그물을 내리자, 그간 한마리도 안잡혔던 물고기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제 후로는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하자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나섰다는 내용입니다.


무엇이 감동을 주느냐? '찾아오심'이다. 우리가 알아볼 수 있게 당신을 시간과 공간속에 구체화하는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속에 있는 인생을 그 자리에까지 방문하셨다, 는 뜻이다.

테레사 수녀나 이태석 신부가 생애로 말해주듯이 가난을 구제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영혼을 대접하러 가는 것.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 사랑으로 이웃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웃이란 늘 만나는 사람을 말한다. 늘 만나는 사람들 앞에 <하나님이 나를 존중한다>는걸 <우리가 존귀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말로 하지말고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하나님은 찾아온다. 우리를 대접하고자 찾아오신다.


예수를 믿는 것이 자주 오해된다.

옳고 그른 것의 문제이고 선택의 문제이고 능력의 문제이고 진심의 문제이고, 자꾸 명분과 개념 이상 법 규칙으로 자주 오해된다. 현실을 면제 받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찾아온 나>가 중요하다. 주가 찾아온다는 것이 한 인생을 통해 구체화된다. 우리는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통제하려고 한다.

왜 예수를 그따구로 믿냐? 너 왜 봉사 안하냐? 너 왜 열심히 안사냐? 너 왜 인상쓰고 있냐.. 지금도! (농담) 이것은 나 좋자고 상대방에게 명분을 걸고 덤비는 거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찾아오시지. 너 왜 이따구로 하냐, 묻지 않는다. 예수믿는 사람은 다르다. 그들은 인간을 세상 조건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힘을 가지려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자가 아니다. 섬기러 온자다."

 

참다운 친구를 구별할 수 있을 때는?

어려울 때다. 내가 고통받을때 그가 나를 삿대질하고 가느냐 감싸안고 가느냐, 그때 갈라진다.


감싸 안으시고 편드세요.
니마음 이해해. 너 억울한 것 알아. 이렇게 설명할 필요없습니다.
우는 것. 분내는 것. 말도안되는 억지를 들어주세요. <저 매미동무는 목청도 좋다> 하면서.
예수믿고 산다는게 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무엇에 항복해서 여기에 와계신지 아십니까?
데오빌로 각하에게 '누가'가 묻습니다.
내가 믿는 신은 이런데 너가 믿는 신은 어떠냐? 하면서.
너희의 신도 우리의 신처럼 무력과 무지에도 감싸안느냐고 묻는겁니다.


신앙이 무엇이냐.
그가 혹 무지하고, 그가 혹 감당치 못하고, 그가 혹 성내고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것으로 우리가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신자된 것을 피력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며 대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불만은 어디 있을까요? 아직도 우리가 부족하다고 외치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셨는데 왜 우리는 넉넉하지 않을까요? 믿음의 눈을 열어주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고 인생을 사셨다는걸 기억하고 외로움과 불신앙을 털어내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의 인생 우리의 신앙 되게 하여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일 설교_강남새사람교회_전기철 목사님 말씀 중에서

제목: 왜 양심과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

로마서 2장 12-16절 

양심은 오염될 수 있다. 양심은 채찍과 당근으로 형성된 인간의 도덕의식.

율법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언약의 말씀. 원래 양심을 줬는데 왜 율법을 줬는가? 개인의 주관에 따라 욕심에 따라 양심이 변하는 것을 보고 율법을 주었다. 양심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는 규례와 법도 (율법)을 준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고난이 닥쳐올 것이다. 그런데 왜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하는가? 왜 유대인들에게 준 법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가? 그 율법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교만함과 정죄의 수단이 되었음. 하나님의 율법중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정해놓고 율법을 지키는지 어기는지 정죄. 좋은 부모가 되는 방법, 이 있다. 다 다르지 않겠는가. 요즘 왜 부동산 정책이 실패했을까? 1부터 백까지 법으로 규제할려니 안된다. 그 법 사이를 빠져나가는 기가막힌 부동산업자가 있다. 법으로 해결하겠다, 는건 가장 합리적인 말이나 가장 미련한 말이다. 법보다 인간의 관계안에서 해결하는게 가장 아름다운 거다. 안식일에 쉬라는데 병자를 고치지 않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보호하질 않나. 예수는 왜 그랬을까요? 율법에는 그 안에 도저히 볼 수 없는 법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형량을 높이고 사형제도를 공고히 한다고 범죄가 주나? 안준다. 중국은 마약하면 사형이다. 눈에 보이는건 줄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범죄는 여전히 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내가 율법을 폐하려고 왔다고 생각하지마라. 그것을 완성하러 왔다> 고 말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 마음을 깨닫는게 율법을 완성하는것이다. 부모님 자식관계가 법대로 살면 행복해질까? 법이 아닌 또다른 법의 정신이 있지 않으면 그 관계는 불행해진다.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이 양심으로나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구원한다고 선포한다. 그럼 복음이 뭐길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선택되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이방인이 구원받으려면 할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땅에 예수님으로 오신 하나님을 믿는다, 는 것이 복음이다. 스스로 인간이 되어서 사랑하는 자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은혜가 복음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분리시키면 안된다. 하나님이 이땅에 예수님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복음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확신이 있다. 여러분들이 잘한것 때문에 구원받은게 아니다. 망나니로 살다가 우리가 2년전보다 더 거룩하게 살았다고 구원받는게 아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내가 조금 더 주를 사랑하고 진실되고 사랑하고 살기로 작정한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믿는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안 믿으면 구원못받는 기준을 따지려는게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하려는 그 사랑을 깨닫는 것이 복음이다. 예수가 떠날 때 말하기를 <내가 다시 하나님 나라 준비해서 올께 너희는 이곳에서 사랑해라>.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 안하는게 아니라 못할 수 있다. 왜? 믿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거절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싶으신게 하나님이라고 믿고 싶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양심적이고 더 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게 아니라는걸 고백했으면 좋겠다. 잘못한 사람을 봤을 때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자이다. 우리 강남새사람교회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랑으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이 찬양 부르려고 합니다. 제목이 그 사랑입니다.


여러분 저는 예수님 믿는다는 게 내가 조금 착한일 했구나, 가 아니라 내가 오늘도 피폐하고 절망하고 또다시 죄가운데 걸어가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깨닫는게 복음이다. 하나님이 원하는건 믿음이다. 하나님 사랑을 믿는 거다. 애쓰지 마, 슬퍼하지마, 난 너 있는 그대로 사랑해, 라는 하나님 음성을 들을때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 같다. 이 찬양 들으며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그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cKzGt2bunLg

아버지 사랑 내가 노래해

아버지 은혜 내가 노래해

그사랑 변함없으신 거짓없으신 성실하신 그 사랑

상한 갈대 꺾지 않으시는 꺼져가는 등불 끄지 않는

그사랑 변함없으신 거짓없으신 성실하신 그 사랑

사랑 그 사랑 날위해 죽으신 날 위해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그사랑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하늘의 어떤 권세도 끊을 수 없는 영원한 그사랑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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