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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Oct 31. 2021

인간실격

오랫동안 도전하려고 애썼던 책,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간혹, 살면서 어쩌다 가끔 인간실격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지는 사람을 만날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 책을 떠올리곤 했다. 제목만 알고 내용은 전혀 몰랐지만 다자이 오사무가 말하는 인간실격이라는 책에는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걸까, 도대체 어땠길래 ‘인간+실격’ 판정을 받은 건지, 내가 만난 그 사람들과 비교해보고 싶어졌던 거다.


궁금했다. 인간 실격이라는 인간의 실체가.


그러나 정작 그런 호기심과는 달리 좀처럼 문장들이 읽히지가 않았다. 문장의 문제라기보다는,


서머셋 몸의 <인간의 굴레>처럼 이런저런 인간군상이 등장하기보다 주인공 요조, 가 술. 담배. 창녀. 마약에 빠져 결국에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서 실격처리 한다는 줄거리가 애초에 나와는 너무나 동. 떨. 어. 진것 같아 읽고자하는 의욕이 생기지 않았던 걸수도 있다. 다만, (모든 책들이 그러하듯이) 지금 안 읽히는 것뿐 언젠가는 읽게 될 순간이 (꽂히게 되는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때가 왔다. 바로 오늘.


요조는 어린시절 하녀에게 겁탈당했지만 누구에게라도 호소하지 않고 참았다. 부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에게 호소같은걸 해봤자 편파적일뿐 모두 헛일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부터 요조의 불행과 불안이 시작된다. 부모나 주변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어린아이라니. 친구가 내 지우개를 훔쳐갔어요, 친구가 먼저 저를 때렸어요...류의 작은 소란이 아니라 아이가 어른에게 겁탈을 당했는데,


그걸 말할 수 없는 집안 분위기와 성향이라니.

장차 이 아이는 어떤 모습으로 자라게 될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책에 몰입을 시작했다.


어린시절 일화가 하나 떠오른다. 동네 어귀에 자리한 구멍가게에서 생긴 일인데 (슈퍼, 보다는 구멍가게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인데 그곳은 몇년마다 임차인이 로테이션 되어야 하는 마을 공동체 공간이다) 뭔가를 사고 50원인지, 500원인지 거스름돈을 안 받았는데 가게 아들이 거스름돈을 줬다고 나에게 면박을 준 거다. 그집에 아들이 셋이었는데, 막내는 나와 동갑이었고 심지어 학교에서도 같은 반이었다.

나는 이런 수모는 물론이고 그 어떤 작은 일도 혼자서 끙끙 앓는 스타일의 아이가 아니라 울며 집으로 가서 내가 겪은 불합리한 일을 낱낱이 고했다.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여우언니는 (셋째 언니 별명이다) 그 가게로 달려가 내게 잔돈을 줬다고 우긴 내 친구의 형을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서 식혜를 먹으며 티비를 보고 있던 그남자는 갑작스런 봉변에 당황했지만 다행히 언니에게 2차 폭행을 가하지는 않고 거스름돈을 돌려주며 사건(;;)은 일단락 됐다. 언니는 가게를 나가면서 말했다.

“내 동생은 거스름돈을 받아놓고 안 받았다고 할 애가 아니야” 우리 언니들은 늘 이런식으로 나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 해주곤 했다.

(당시엔 나만 억울하다 생각했는데 이제막 새로운 동네에 이사와서 적응하느라 애썼을 그들 가족과 언니에게 맞은 내친구 형에게 미안하단 생각이 든다…그래도 저는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


다시 인간실격으로 돌아가자면.


고등학교에 진학한 요조는, 6살 선배 호리키를 통해, 공산주의 단체-비밀독서 클럽-에 가입한다.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정치적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음지에서의+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에 끌렸다. 고등학생이 된 호리키는 혼자서는 인간을 마주하기 어려운 인간공포증을 겪지만 본모습을 감춘 채, 호리키라는 존재에 의존하며 그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까페 여급 쓰네코와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게 되고 그날 그 사건으로 여자는 죽고 요조는 살아남게 된다.  일로 인해 경찰서에서 요조는 자살방조죄로 취조를 받게 된다.


이상하리만치 공포스러운 인간들 중에서도 창녀에게만은 편안한 마음이 들었던 요조는, 술과 담배 창녀에 빠져 지내게 되는데 그러다 담배가게에서 일하던 일곱살 요시코를 만나게 된다. 순수하게 자신을 신뢰하고 믿어주는  '처녀'와는 결혼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요조는 그녀와 결혼했지만.....요조가 보는 앞에서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겁탈 당하는 일이 생긴다. 친구 호리키가 먼저  상황을 발견했지만 그는 그것을 묵인한  요조에게 전했고, 요조 또한 호리키와 함께 문틈 사이로 벌어지는  끔찍한 장면을 그저 지켜볼 , 나서서 아내를 구하지 못한다. 이후 그는 술에 의존하며 알콜중독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고, 순진무구한 아내를 의심하는 자신때문에 괴로워하다 수면제 디알을 먹고 또다시 자살기도를 한다.


괴로움에 시달리던 요조는 아내 요시코와 헤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지만 예의 그 성격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다,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한 미망인 약방부인과 관계를 맺으며 모르핀에 중독되어 간다. 결국 요조는 가족들과 아내 요시코, 친구 호리키에 의해 정신병동에 갇힌다.


큰형에 의해 고향근처 시골에서 요양을 하게 되는데, 자신을 돌봐주던 예순살 가까운 식모에게 겁탈 비슷한 것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결국에는 자살에 성공하여 서른아홉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편애하는 밑줄

나한테는 재난 덩어리가 열개 있는데 그중 한개라도 이웃 사람이 짊어지게 되면 그것만으로 그 사람에게는 충분히 치명타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일도 있습니다. 즉 알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의 괴로움의 성질과 정도라는 것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용적인 괴로움, 그저 밥만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괴로움 그러나 그 괴로움이야말로 제일 지독한 고통이며 제가 지니고 있는 열개의 재난 따위는 상대도 안될만큼 처참한 아비지옥일지도 모릅니다. p17
저는 소위 장난꾸러기로 보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존경받는 걸 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렇지만 제 본성은 장난꾸러기 같은 것하고는 도대체가 정반대의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미 저는 하녀와 머슴한테서 서글픈 일을 배웠고 순결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참았습니다. 그것으로 또 한가지 인간의 특질을 알게 됐다는 생각까지 들었고, 힘없이 웃었습니다. 만일 제가 진실을 말하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었다면 당당하게 그들의 범죄를 아버지 어머니한테 일러바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 어머니조차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호소한다. 저는 그런 수단에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호소해도, 어머니한테 호소해도, 순경한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저버리는게 고작 아닐까. 틀림없이 편파적일 게 뻔해. 필경 인간에게 호소하는 것은 헛일이다. 나는 역시 아무것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참고, 그리고 익살꾼 노릇을 계속해나갈 수 밖에 없다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p25
(하숙하는 집의) 쎄스는 친구들을 제방으로 데리고 와서는 제가 여느때처럼 모두를 웃긴 뒤에 친구가 돌아가고 나면 언제나 그친구 험담을 하곤 했습니다. 걔는 불량소녀니까 조심해, 하고 꼭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부러 끌고 오지 않으면 될텐데. p38
(여섯살 나이가 많은, 서양화를 공부하는 미술학도 호리키에 대해) 처음에는 이 남자를 호인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렇게 인간공포증이 심한 저도 완전히 방심하고는 좋은 도쿄 안내자가 생겼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혼자서 전차를 타면 차장이 무섭고, 가부키 극장에 가고 싶어도 붉은 카펫이 깔려있는 현관 계단 양쪽에 죽 늘어서 있는 안내양들이 무섭고, 레스토랑에서는 등 뒤에 조용히 접시가 비기를 기다리는 웨이터가 무섭고, 특히나 돈을 치를때 아아, 그 어색한 손놀림. 저는 뭔가를 사고 나서 돈을 건넬때면 인색해서가 아니라 너무 긴장하고 너무 부끄럽고 너무 불안하고 너무 두려워서 어찔어찔 현기증이 나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반쯤 미친 것처럼 되어 값을 깎기는커녕 거스름돈 받는 것을 잊어버릴뿐더러 산 물건을 갖고 오는 것을 잊은 적도 종종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도저히 혼자서는 도쿄 거리를 다닐 수가 없었고 그래서 어쩔수 없이 온종일 집안에서 뒹굴거리며 보내던 그런 속사정도 있었던 것입니다. (중략)
호리키와 교제하면서 또 좋았던 점은 호리키가 상대방의 생각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소위 정열이 분출하는대로 온종일 시시한 얘기를 계속 지껄여대서 둘이서 걷다가지쳐도 어색한 침묵에 빠지게 될 염려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과 접할때면 끔찍한 침묵이 그자리에 나타날 것을 경계하느라 원래는 입이 무거운 제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익살을 떨었던 것입니다만 지금은 호리키 이 바보가 무의식적으로 그 익살꾼 역할을 자진해서 대신해주었기 때문에 저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저 흘려들으면서 가끔 설마, 라는 둥 맞장궃치면서 웃기만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단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소유물 모두를 팔아치워서라도 후회하지 않을것 같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저한테 창녀라는 것은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서 그 품안에서는 완전히 안심하고 풀 잘 수 있었습니다. p46
호리키는 또 그 최신 유행을 좇는 허세에서 어느날 저를 공산주의 독서회라든가 하는 그런 비밀 연구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호리키 같은 인물에게는 공산주의비밀 모임(R.S)도 예의 '도쿄안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중략) 그 모임에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출석해서 모두에게 익살을 서비스했습니다.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맘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마르크스로 맺어진 친근감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두려웠고,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오히려 저에게는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저라는 남자에게 예의 지하운동 그룹의 분위기는 묘하게 마음이 놓이고 편안했습니다. (중략) 고등학교에 들어간지 이년째되는 11월 연상의 유부녀와 정사 비슷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제 운명은 일변했습니다. (중략) 그렇지만 저의 직접적인 고통은 그런 것보다도 돈이 없다는 것과 예의 그 운동과 관련된 심ㅂ름이 도저히 놀이 기분으로는 할수없을만큼 격심해지고 바빠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중앙지구라고 했는지 무슨 지구라고 했는지 어쨌든 혼고, 고이시가오, 간다 주변에 있는 학교전체의 마르크스 학생 행동대 대장이라는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중략)
원래 비합법이라는 것에 대한 흥미에서 그 그룹의 심부름을 해온것인데다 그야말로 농담이 진담된격으로 너무 바빠지게 되니 저는 속으로 이것 번지수가 잘못되니거 아닙니까. 당신들 직계한테 시키는게 낫지 않겠어요. 라고 묻고 싶은 짜증스러운 감정을 품지 않을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당시 저한테 특별한 호의를 뵈던 여자가 셋 있었습니다. (중략)
(까페 여급 쓰네코) 새벽녘에 여자 입에서 '죽음'이라는 담어가 처음 나왔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또 저도 세상에 대한 공포, 번거로움, 돈, 예의 운동, 여자, 학업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더이상 견뎌내며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의 제안에 쉽게 동의했습니다. 그날밤 저희는 가마쿠라의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이 허리띠를 가게 친구한테 빌린거니까 하면서 허리띠를 풀어서는 개어서 바위 위에 올려놓았고 저도 망토를 벗어서 같은 곳에 놓아두고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제 왼쪽 폐에 탈이 있는 것이 병원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그 사실은 저한테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이윽고 저는 자살방조죄라는 죄명으로 병원에서 경찰로 끌려갔지만 경찰에서는 저를 병자로 취급해주어서 특별히 보호실에 수감되었던 것입니다. p69
넙치의 말투에는,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말투에는 이처럼 까다롭고 어딘지 애매모호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미묘한 복잡함이 있어서 거의 무익하게 생각되는 이런 엄중한 경계와 무수한 성가신 술책에 저는 언제나 당혹하고 에이 귀찮아, 아무래도 상관없어, 라는 기분이 되어 농담을 돌리거나 무언으로 수긍하고, 말하자면 패배자의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도 넙치가 저한테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말해주었더라면 끝날 일이었던 것을 나중에 알고서 넙치의 불필요한 경계심, 아니 이 세상 사람들의 불가사의한 허영과 체면차리기에 말할 수 없어 암울해졌습니다. 넙치는 그때 그냥 이렇게 말하면 됐던 것입니다. "공립이건 사립이건 어쨌든 4월부터 아무 학교에라도 들어가세요. 당신 생활비는 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고향에서 좀 더 넉넉하게 보내주기로 되어 있습니다"훨씬 뒤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사실은 그랬던 것입니다. 그랬다면 저도 그 말을 따랐을 겁니다. 그런데 넙치가 괜히 신중한 척 둘러말했기 때문에 묘하게 일이 틀어져서 제가 살아나갈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던 것입니다. p78


"아빠, 기도하면 하느님이 뭐든지 들어주신다는게 정말이야?"
저야말로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아 저에게 냉철한 의지를 주소서.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해주소서. 사람이 사람을 밀쳐내도 죄가 되지 않는건가요. 저에게 화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응 그래 시게코한테는 뭐든지 주시겠지만 아빠는 안될지도 몰라"

저는 하나님조차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안돼?"
"부모님 말씀을 안들었거든"
"그래? 아빠는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모두들 말하던데"

그건 속고 있기 때문이야. 이 아파트 사람들 전부가 나한테 호의를 갖고 있다는건 나도 알고 있어,그러나 내가 얼마나 모두를 무서워하는지. 무서워하면 할수록 남들은 나를 좋아해주고, 남들이 나를 좋아해주면좋아해줄수록 나는 두려워지고 모두한테서 멀어져야만하는, 이 불행한 제 기벽을 시게코한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었습니다" p90
호리키는 뭐니뭐니해도 (시즈코가 부탁해서 마지못해 맡은게 틀림없습니다만) 제 가출에 대한뒤처리를 해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치 자기가 제 갱생의 대은인 아니면 중매쟁이나 되는 것처럼 굴었고 거들먹거리면서 저한테 설교 비슷한 얘기를 하기도 하고 한밤중에 취해 가지고 와서는 자고 가기도하고 또 오 엔(언제나 오엔이었습니다)을 빌려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나저나 네 난봉도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이상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테니까"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아니야?" 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그건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네가 용서하지 않는 거겠지'
'그런짓을 하면 세상이 가만두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자네겠지'
'이제 곧 세상에서 매장당할꺼야'
'세상이 아니라 자네가 나를 매장하는 거겠지'
'너는 너 자신의 끔찍함, 기괴함,악랄함, 능청맞음,요괴성을 알아라!'

갖가지 말이 가슴속에서 교차했습니다만, 저는 다만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댞으면서 "진땀 나네. 진땀" 하고 웃을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이후로 저는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하는 생각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이 개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예전보다는 다소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p93
호리키와 나. 서로 경멸하면서 교제하고 서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거런것이 이 세상의 '교우'라는 것이라면 저와 호리키의 관계도 교우였음은 틀림없습니다 p106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이건 어렵다"
"법이지" 호리키가 태연히 그렇게 대답하기에 저는 호리키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죄라는 건 자네! 그런게 아니야" 죄의 반의어가 법이라니!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로 안이하게 생각하며 시치미를 떼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형사가 없는 곳에 죄가 끔틀거린다지.
"죄의 반의어는 선이지. 선량한 시민. 즉 나같은 것이지"
"농담은 그만두자고. 그러나 선은 악의 반의어지 죄의 반의어는 아니야"
"악과 죄는 다른가?"
"다르다고 생각해. 선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아,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낸 도덕이라는 것을 말로 표현한거지. 자네는 죄라는 것에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군"

"그야 그렇지 너 같은 죄인이 아니니까. 나는 난봉은 즐겨도 여자를 죽게 하거나 여자한테서 돈을 우려내거나 하지는 않거든"

죽인게 아니야. 우려낸 게 아니야. 라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희미한, 그러나 필사적인 항변의 소리가 끓어올라 왔습니다. 그러나 아니 내가 나쁜거야, 라고 금방 다시 고쳐서 생각해버리는 이 버릇. p112
과연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

저는 유부녀가 겁탈당한 얘기를 이책저책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요시코만큼 비참하게 능욕당한 여자는 하나도 업사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왜소한 상인과 요시코 사이에 조금이라도 사랑 비슷한 감정이 있었다면 저도 오히려 구원받을 수 있었을는지도 모릅니다만 단지 어느 여름날의 하룻밤, 요시코가 신뢰해서. 그리고 그뿐. 그렇지만 그 때문에 내 정수리는 정통으로 얻어맞아 빠개졌고 목소리는 쉬어버렸고 머리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새치가 나기 시작했고 요시코는 평생 절절매며 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얘기는 아내의 '행위'에 남편이 용서할 것인지 말것인지 거기에 중점이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저하네는 그다지 괴로운일도 큰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중략) 저희 경우에는 남편에게는 아무런 권리도없었고 생각하면 모든 게 제 잘못인 것처럼 생각되었고 남편은 화를 내기는 커녕 싫은 소리 한마디 못했고 또 아내는 그녀가 지녔던 귀한 장점 때문에 능욕당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 장점이라는 것은 남편이 예전부터 동경하던 순결무구한 신뢰심이라는 한없이 애잔한 것이었습니다.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

유일하게 믿었던 장점에조차 의혹을 품게 된 저는 더이상 뭐가 뭔지 알수 없게 되었고 그저 알코올에 손을 뻗칠 뿐이었습니다. 언제나 저한테서 시선을 돌리고 절절매고 있는 요시코를 보면, 이 녀석은 전혀 경계라는 것을 모르는 여자니가 그 장사꾼하고 한번만 그랬던 게 아니지 않을까? 또 호리키는? 아니 혹 내가 모르는 사람하고도? 하며 의심이 의심을 나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작정하고 추궁할 용기는 없어서 예의 불안과 공포에 몸부림치며 소주를 마시고 취해서는 기껏 비굴한 유도 신문 같은것을 쭈뼛쭈뼛 시도해 보고 어리석게도 속으로는 일희일비하면서 겉으로는 공연히 익살을 떨고, 그러고 나서는 요시코에게 저주스러운 지옥의 애무를 가하고 곯아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p118



민음사전집 103번째 책, 인간실격.

이 책 표지에는 에곤쉴레가 담겨있다.  28세에 스페인 독감으로 요절했던 화가. 뼈만 앙상한 사람들과 기괴한 자화상 등 전위적인 그의 그림들과 그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꽤, 흥미로웠고 관심이 생겼는데 그가 한때 소아성애자로 법정에 서게된 사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여동생에게는 근친애적인 성향을 보였다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왜곡된 건지도 궁금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성아소애자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그림을 좋아해도 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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