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강신주 그리고 나태주
금요일 퇴근길, 서점에 들렀다가 책 5권을 샀다. 그중 2권이 강신주의 책.
강신주는 일찍이 김수영을 독파하고, 그에 관한 책을 낸뒤 그와 작별했다. 나는 강신주를 다 독파하지는 못했지만 잠시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었다.
철학이라는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해준 강신주라는 뗏목을 다 이용했다고, 착각 혹은 자만했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삶의 고난과 너무도 똑같이 반복되는 삶의 매너리즘 속에서 내가 가야할 방향조차 갈팡질팡하고 있을때 다시 그가 떠올랐다.
저 유명한 발레리의 유명한 시 구절을 인용한 그의 신간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와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두권을 들고 발걸음 가벼웁게 양평에 왔는데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를 다 읽고 난 토요일 오전 11시 16분. 마음이 참 착잡하다.
어젯밤 엄마집에 들른 큰언니는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의 서문을 읽다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강신주, 왜 그렇게 살이 빠진거래. 사랑이 잘 안된건가?”
..글쎄?
어젯밤엔 답 할 수 없었지만, 언니의 질문에 그의 책을 다 읽고난 후 답을 하자면 젊었을때처럼 몸을 혹사시킨 결과 책을 쓰는 동안 20킬로 가량 살이 빠졌다고 했다. 몸이 강신주에게 너무 힘들다, 는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하지만 노인과 몸이 약한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었고 결국 그건 철학자로서 엄청난 축복이었다고, 그는 책에 기록해놓았다.
언니는 이어서 말했다.
“이런 책을 읽게되면, 지금 하고 있는 유사나사업도 그냥 다 그만두고싶어”
왜 아니겠는가.
나야말로 인간의 자유를 억제하며 회사인간을 양성하고, 동료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받으려고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밤새 일하고도 모자라 그 짐을 퇴근 후 집까지 가져와야하는 그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진다.
나뭇잎하나 푸르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래봤자 결국 나뭇잎 하나도 푸르게 하지 못하는 주제에, 누군가를 가르치겠다고, 니 방식이 틀렸고 내 방식이 맞네, 아니네, 내 진심은 이것이었고 그것은 너의 오해였네 아니네 구구절절 설명해야 이해되는 상황 속에서 나는 다시 또 내 자신의 바닥과 마주하고 말았다.
사실 내 아량은 간장종지만하면서, 서너명은 족히 먹고도 남을 밥을 담아낼 대접처럼 굴었구나.
그래서 상대방을 분열증에 빠지게 하는 사람이었구나.
예를 들어서 남편이 애초부터 마초인걸 알고 사는 거하고, 말로는 페미니스트인데 알고보니 아닌거하고는 다르잖아요, 그런 관계가 왜 나쁘냐하면 상대방이 분열증에 빠져요(웃음)
페미니스트이면서 동시에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과 함께 사는데 어떻게 분열증이 없겠어요.
P 223-224
뼛속부터 마초였는데 페미니스트인척 한건 아니었을 거다.
다만 내가 지향하는 삶은 페미니스인데 내안의 마초근성이 상대를 만나 발현되었을 뿐.
(나는 마초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도 아니지만 강신주가 예로 든 문장을 가지고 오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상대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배려많은 사람으로 살고자했으나,
사실은 내가 만든 틀안에서’만’ 상대와 관계를 맺으려했던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었을 수 있다.
그의 책을 다 읽고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애당초 철학자의 역할이란, 인문학자의 영향이란 이데올로기적인 것들이 아니고 그사람이 자율적으로 되도록, 스스로 서도록, 주인이 되도록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불교에서는 제자가 깨달음을 얻으면 이제 제자와 스승 두사람이 삶의 주인이 된다고 한다.
큰 스님-그러니까 먼저 깨달은 사람이 뒤에 깨달은 사람에게 말하잖아요.
이제 더이상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으니 하산을 하거나 아니면 한산에 호랑이가 두마리 살수가 없으니 다른산에가서 호랑이가 돼라는 말도 해요,
산 하나에 혹은 지역 하나에 사찰이 하나가 있는거죠. 호랑이의 목적은 또다른 호랑이를 키우는거에요.
내말을 잘 듣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 아니르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사람을 키우는거죠.
내말을 듣지 않는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하지만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스스로 숙고하고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거예요.
P 347-348
어쩌면 나는 가르친다는 것을 잘못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이 책을 통해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서 가져야할 태도, 가 무언인지를 배웠다.
내 영향력 안에 두고 그사람의 자유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서도록 주인이 되도록 자극을 주는 것.
이미 지난 일에 대해 후회하기보다 앞으로의 내 삶에 방향에 흔들리지 않도록 나는 계속해서 읽고,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분다. 글을 써야겠다.
바람이 분다. 책을 읽어야겠다.
[편애하는 서문]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신뢰하되, 진리를 찾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의심하라, 고 앙드레 지드는 말했습니다.
[큰조카 윤콩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장]
대학의 진짜 힘은 전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양과정에 있어요.
마음만 먹으면 공대생이지만 문학과목을 들을 수 있는거죠. 세익스피어를 좋아할 수도 있는거고.
피해의식은 자기성찰없음이나 상대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동전의 양면같은 역할을 한다.
사람의 문맥을 읽는다는 것
언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언어를 넘어가는 콘택스트를 건드려줘야 그걸 잡아낼 수 있고 그 콘택스트가 그 사람의 내면일수도, 심리 일 수도 있어요. (중략) 말이나 텍스트에 사로잡히면 안돼요. 우리가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텍스트와 콘택스트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능력을 기르는거에요. 문자로 쓰인 것만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중략) 어쨌든 오해와 갈등은 콘텍스트를 읽지 않으려고 할 때 생겨요.
진보의 전제는 타인에 대한 애정이다
‘강남좌파’ ‘청와대좌파’ 혹은 ‘여의도 좌파’의 본질은 좌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남’이나 ‘여의도’에 있어요. 그들은 명령하는 소수 지배계급, 무위도식해도 부를 불릴 수 있는 지주자 자본계급의 자리를 욕망하고 있으니까요. 결국 그들이 표방한 좌파나 진보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죠. 경제적인 측면에서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모든 권력을 피지배지나 노동계급에게 되돌려줄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어쩌면 ‘강남좌파’라는 표현보다 ‘진보팔이’라는 말이 더 맞을 듯해요.
이성복 시인은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네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사랑에는 이미 방법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사랑한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 사랑이에요. 혁명을 왜 하냐면, 법을 바꾸는 거예요. 제사상에 음식을 올리는 방법을 바꿔버리는거예요. 그 음식을 아버지가 좋아하지 않으셨으니까 아버지가 생전에 짜장면을 좋아했다면 제사상에 음식을 올리는 방법을 바꿔버리는 거예요. 그음식을 아버지가 좋아하지 않으셨으니까. 그런게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방법을 가진 사랑과 방법을 만들어내는 사랑이 있어요. 진보는 후자여야하고요. 새로운 방법을 창조해낼만큼 사랑을 해야돼요. ‘대책이없네, 생각해볼게’ 이렇게 해서는 사랑하기 힘든거죠. 모든 사람들이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나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그 사람을 외로움에 방치하지는 않는가.
(그래서 내가 아직…도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자기사랑을 했을 뿐, 상대방을 위해 방법을 바꾸거나 만들어내는 창조적인사랑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구경꾼에서 주체로
해운법 시행규칙 변경에 합의했던 국회의원들 명단을 뽑았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그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양 세월호 추모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막아야죠. 너무나 뻔한건데 일본에서는 왜 20년된 배는 더이상 운행을 못하게 했을까, 이걸 봐야되잖아요. 20년이 넘은 낡은 배는 위험하니까요. 그런데 우리 해운법은 30년까지 운행해도 좋다는 2009년 개정된 시행규칙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어요. 세월호 참사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아직도, 아니 지금도 제2의 세월호 제3의 세월호가 위태롭게 우리 바다를 지나다니고 있는 거예요. (세월호 아이들 죽음의 원인은) 신자유주의적 입법에 따른 규제 완화정책이라고 사망원인이 적혀 있어야만해요.
글, 책 담론들
데리다는 플라톤에게서 파르마콘이라는 개념을 찾아내요,. 약이면서 독이라는뜻이예요. 책은 전형적인 파르마콘이죠. 우리의 자유와 사랑을 강화하기도 하고 아니면 고사시키기도 하니까요. 책과 교재를 구분해야해요. 책이 우리에게 자극과 활력을 준다면 교재는 무감각과 무기력을 안기죠. 달리 말해 우리를 깨어 있도록 하는 것이 책이라면 우리에게 하품을 유발하는 것이 교재죠. 제게 최고의 책은 항상 철학책이었어요. 일상에 매몰된 저를 가장 높은 고도에서, 그래서 가장 아찔한 긴장감에서 내려다보고 낯설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까요.
철학자로서 제 바람은 단순해요, ‘여성은 열등하지않다’는 주장이 ‘여성은 우월하다’는 주장으로 비화되지 않는 거예요.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페미니즘 내부에 스며든 벤담적 자아를 도려내야하죠.
넓은 잎을 가진 철학나무처럼
소통은 두입장 중 한가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 입장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에요.
매주 토요일 아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와서 이야기하는 <황금연못>이라는 프로가 있다고 한다.
엄마가 토요일 아침이면 꼭 챙겨보는 프로인데, 따뜻한 안방에서 이 책을 마저 다 읽고 싶어서 (오전에 너무 추워서 마당에서 책을 읽을수가 없었다. 엄마집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곳이 돌침대뿐인데, 돌침대는 안방에만 있다) 엄마에게 토요일 오전만이라도 티비를 보지 말자고 제안했다.
내말은 모든 잘 들어주는 엄마는 티비를 꺼주었다. 그런 엄마에게 미안해서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들이밀었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시 한편만 골라달라고.
골목길 2
해가 많이 짧아졌소
문득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가 나를 놀라게 하오
혼자 나는 비둘기 한마리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하오
바라보니 빈 하늘
_나태주_
나: 엄마, 왜 이 시가 좋아?
엄마: 그 비둘기 한마리가, 꼭 나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