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의 사회적 기록
작년에 <뉴스공장>을 듣다가 삼풍백화점 생존자가 책을 냈다는 걸 알게됐다.
그때 바로주문해서 읽어야했는데, 시기를 놓치고 어영부영 계절이 지났다.
그러다 한달전엔가 주말에 마당에서 넷째 조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걸 발견했다.
“석현아 그 책 재밌어?””
“응. 지금 세번째 읽어”
(세번이나 읽었다고?)
물론 나는 두번 읽지는 않았지만 3주전 토요일 아침에 이 책을 읽으면서 진짜 글자 그대로 ‘눈물이 앞을 가려서’ 여러번 눈물을 닦아내야했다.
‘산만언니(필명이다)’는 단지 ‘삼풍’이라는 비극적 참사에서만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단지, 라는 부사어 뒤에 쓰기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전대미문의 대참사였지만 그 참사 전에 그녀의 삶또한 역경,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모든 상황이 지나고 마침내 마주한 사건이 삼풍이었다. 정상적인 사람도 정상적으로 버틸 수 없었을 일들의 연속.
그리고 작가는 그날의 대참사와 인생의 역경을 기록했다. 왜? 세월호 생존자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해서.
그녀를 통해 배운 건,
어떠한 불행에 빠지더라도 서로를 상처입히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않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
비겁하게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내 허물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누군가의 뒷담화대신 나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너무 오래 자책하지 않도록 어제보다 오늘에 집중하며 살 수 있도록.
게다가 불행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서로 상처 입히기 쉽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온 집안사람들이 장례기간 내내 서로를 탓했고, 문상객 앞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입장을 변명했으며, 상대의 해묵은 오해들을 남들 앞에서 들추느라 정신없었다. 또 사람들은 전부 일이 이렇게 될때까지 자기 잘못은 전혀 없었다며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다들 왜그랬을까? 일단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 두면 자기 마음이 편해서다. 도저히 자신의 허물을 정면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으니까,
따로 원없이 미워할 대상을 필사적으로 찾는 것이다.
해서 그일을 두고 우리집에서는 엄마가 가장 오래 고통받았다.
[편애하는 밑줄]
그런 의미에서 불행에 대해 말하고 기록하는 일 역시 쉽지 않다. 가끔은 ‘나를 괴롭히며 쓰는 글이 타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까지 든다.
하지만 내게는 이 글을 통해 세상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모든 일들을 겪어왔지만, 그럼에도 내가 살아온 세상은 따뜻했다고. 눈물 나게 불행한 시절도 있었지만, 가슴 벅차게 감사한 순간들도 많았다고. 그러니 당신들도 살아 있으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살아만 있으라고. 그러다 보면 가끔 호사스러운 날들도 경험하게 될 거라고. 이 말을 하고 싶어 쓰는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
나중에 이모한테 들으니 엄마는 내가 고생하고 사는거 뻔히 아는데 괜히 나가 돌아다니다 다쳐 내돈을 쓰는게 너무 염치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그때 주변이ㅡ 도움으로 엄마의 발목 수술은 잘 끝났지만 병원비를 계산할때 엄마가 그 힘든 수술을 받으면서도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무통주사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사실이 너무 사무쳐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그제야 나는 가난의 본질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가난이라는 것은,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아프고 두렵고 무서운 것까지 참고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이다. 이것이 가난의 진짜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여유가 생기면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들, 그중에서도 한참 예민할 시기인 10대 아이들을 찾아 도움을 주고 싶다. 급식비 지원같은 것 말고, 최신 휴대전화나 값비싼 브랜드 운동화 같은 사치나 허영의 영역에 가까운 선물을 쥐어주고 싶다. 실제로 가난을 겪어보니, 끼니를 대충 때우는 것보다 더 참기 힘든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도 누구는 재채기 한 번으로 끝낼 일을 누구는 감기처럼 앓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열병으로 며칠간 앓아눕는다.
모두 개인의 면역력 차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너에게 새로 주어지는 일상을 지켜 내길 바라.
하지만 최근에 글쓰기를 시작한 후, 오랜만에 욕심이 생겼다. 평소에는 ‘글로 밥 벌어먹을 생각없으니 이만하면 되었다’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글을 더 잘쓰고 싶어 자꾸만 욕심이 난다. 내가 겪은 사고 이후의 고통을 생생하게 잘 적어 놓으면, 이를 모르고 살던 수많은 사람이 참사가 주는 비탄이 어떤 것인지 공감할 테고 그러면 건물이 되었든 배가 되었든 그일을 하는 엔지니어들은 설계도면을 한번이라도 더 볼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시공사도 안전 규정을 준수하고, 감리기관은 꼼꼼하게 관리감독할 것이며 해당 공무원은 인허가 기준을 확실히 세우고 국가기관은 재난 대처방안에 대해 더욱더 많은 연구를 해 대응방안을 낼테고 사법부는 선례로 남을 피의자들의 판견을 지금보다 더 신중한 자세로내릴테니까. 그러면 정말 앞으로 세상이 조금이라도 안전해질테니까,
글을 쓰는 동안 어느 날은 잘해보고 싶고 어느날은 도망치고 싶던 날들이 연속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은 일관되게 명확했다. 함부로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지 말라는 것과, 언제나 악한 것이힘세고 빛나 보이지만 결국 선이 이긴다는 것. 그리고 사랑은 보기보다 힘이 세다는 것. 이것은 내가 이세상에서 얻은 유일한 교훈이다.
불가에서는 마음과 몸을 절대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
마음을 고치기 어려우면 사람의습관, 즉 몸에 밴 태도와 행동부터 고친다. 이런 의미에서 출가자들이 항상 유념하는게 바로 하심이다. 하심이란 쉽게 말해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행동이다. 보통 절에 갓 들어온 행자승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수행법이다. 법당에서 만나는 상대에게 먼저 합장을 하고, 시선은 늘 낮은 데를 향하고, 되도록 말을 아끼고, 누구보다 먼저 궂은일을 찾아하는 수행이다. 그리고 하심을 단 기간에 익히는 데는 단연코 절 수행이 최고다.
‘앞으로 크든 작은 생의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무조건 밥부터 먹고 하자’
사람에 따라 여태 이어지는 애도가 싫을 수 있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그 싫다는 마음까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나까지 할 필요없다. 다만 적어도 상갓집 앞을 지나갈때는 옷깃을 여며주는 최소한의 예의만이라도 갖추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사회적 참사 희생자들은 국가의 통계자료에 적히는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존재로서 존엄한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