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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May 15. 2022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인간관계가 버겁다고 느낄때쯤 웬 드라마의 나레이션 하나가 나에게 부끄러움을 주었다.

"상대방이 이랬다저랬다 하는거에 나도 덩달아 이랬다저랬다하지않고 그냥 쭉 좋아해보려고요"

나는  그게 안될까, 사랑한다면서 아낀다면서  한결같이 상대방을 애지중지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기대만큼 채워주지 못하면 그것에 실망하고,  마음을 접고.

기브앤테이크 같은거 말고 기브앤기브는 대체 왜 안되는 걸까. 나라는 인간은  나이를 먹도록 왜 이렇게 치사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조그마한 일에’만’분개하고 (저 혼자) 기대하고 기대충족되지 않으면 (혼자) 실망하고 삐지고. 그런 날들의 반복들.


데일카네기를 꺼내서, 인간관계론을 다시 펼쳐봤지만 그곳엔 내가 찾는 해답이 없었다.

사실 해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의 콘택스트 없이 테크니컬적인 스킬만 열된 책을 읽다가 도로 책장을 덮어버렸다.


그러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이어서, <한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읽으면서 다시금 잊고 있었던 소중한 가치가 하나 둘 툭툭 내 맘을 두드렸다.


그만둘 수 있어야 진짜 자유라는 .

제행무상을 알지 못하면 결코 오늘 이순간을 소중히 여길  없다는 . 자중자애와 애지중지. 사랑은 아낀다는 의미라는 . 모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수는 없을지라도  한사람( 대상은 반려견이어도 반려식물이라도 상관없다)에게는 아낌없는 사랑을 줘야 한다는 . 내눈속에 그사람의 눈부처를 담고 그사람의 눈속에  눈부처를 담아낼  있는 행복의 순간을 다시 마주치고 싶다는것. 힘든 관계는 과감히 끊어낼  있어야 한다는 , 진정한 예스는 여러번의 '!'끝에 진정성있게 다가온다는 .

기대하는 것은 그 사람과의 기억때문이라는 것. 결국 기대보다 먼저는 기억이어야 한다는 것 등등.


두권의 책을 통해 너무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하지만 삶의 문제는 아는 것을 실천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혹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금 깨달았던 것들에 대해 '이번생애는 틀렸다', '망했다' 할것이 아니라 한번 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것에 그치지않고 잘.  


어떻게 잘,이나면,


열반,을 논하겠다는 게 아니라 주어진 오늘을 힘껏 행복하게 살아보겠다는 의미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여겨, 가능하면 함께하는 가족, 친구, 지인, 동료 등 나를 둘러싼 이들에게 무해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결심이다.

강신주라는 철학자의 존재가, 참으로 감사하다.




















1강 고 <아픈만큼 사랑이다>


어머니가 한 공기의 밥으로 아이가 행복해하니 두공기를 먹으면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공기를 먹으면 그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가정해보자. 극단적으로 말해 한공기를 먹고 행복하다면 한 가마니의 밥을 먹이면 배고픔의 고통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두공기, 세공기를 억지로 먹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아이는 과도한 배부름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 어머니는 몰랐던 것이다. 아이가 배고플때에는 한공기의 밥이면 족하다는 사실을, 한공기가 넘어가면 배고픔의 고통이 아니라 배부름의 고통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그래서 아이를 사랑한다면 어머니는 아이가 배고파 할때마다 한공기의 밥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먹여 배고픔의 고통을 완화하는 것은 사랑이자 동시에 선한일이다. 그렇지만 배고픈 사람에게는 한공기의 밥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2강, 무상 <무상을 보는 순간, 사랑에 사무친다>


벚꽃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부모님의 얼굴을 포함한 모든 것이 그렇다. 도처에 모든 것이 무상을 분출하고 있지 않은가? 산책 도중 양지바른 곳에 몸을 누이는 반려견, 푸른하늘에 허허롭게 흘러가는 뭉게구름, 흰머리가 살짝 늘어난 남편, 등등. 그러니 고개 돌리지 않고 무상을 응시하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오늘 하루를 잡아야 한다. 허무함과 덧없음이 아니라 충만함과 찬란함으로 오늘 하루를 영위하려면 말이다.

무상을 느끼지 않고 우리 마음에서 어떻게 사랑이 싹틀 수 있을까. 이것이 싯다르타의 마지막 가르침 제행무상이 가진 힘이다.

*제행무상. 형성된 모든 것들은 소멸한다.


매너리즘에서 탈출하는 첫걸음은 세상의 무상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런데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변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매일 최소한 세가지씩 변한 것을 찾아내자. 기온이나 바람이어도 좋고 흘러가는 뭉게구름이어도 좋고 녹음이 짙어진 가로수여도 좋다. 직장후배의 멍한 표정이어도 좋다. 어제와 달라진 것을 억지로라도 찾아보려고 노력하자.

변하는 것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면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오늘 하루에 집중하게 만들고 동시에 무상에 대한 감각을 민감하게 다듬어줄 것이다.



3강, 무아 <영원에도 순간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비로소 보이는 세상>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했느냐의 최종 시금석은 사랑이나 자비다.


제 2의 싯다르타이자 동시에 대승불교 여덟종파의 시조라고 칭송받는 나가르주나의 나가는 용이라는 뜻이고 아르주나는 나무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에 동아시아에서는 용수, 라고 불린다. 불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이론가다.


4강 정 <맑고 잔잔한 물이어야 쉽게 파문이 생긴다는 이치>


<대반열반경>은 고통을 낳는 원인으로 ‘번뇌’와 ‘망집’을 지목했다. 베르그송을 통해 우리는 ‘번뇌’와 ‘망집’의 정체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핵심은 "기억과 기대의 능력이 있는 존재에게만 무엇이 없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베르그송의 영민한 진단에 있다. 자기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있을때 스마트폰에 대한 번뇌나 망집은 생각할 수 조차 없다. 문제는 스마트폰이 사라졌을때 벌어진다. 카페에 스마트폰을 두고왔다는것을 '기억'하지만 카페에서 스마튼폰을 발견하리라는 '기대'가 좌절되는 경우가 벌어질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이 무언가를 기억하고 그것을 기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대상이나 사건이 부재할때 이기억과 기대의 능력이 필요이상으로 강하게 작동하면 번뇌와 망집이 마음속 깊은곳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나와 우리 삶을 사로잡는 것이다 (중략) 결국 기대보다 기억이 먼저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기억과는 달리 무언가가 없어지고 사라졌을때 기대는 좌절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동아시아 불교 역사에서 싯다르타의 말씀을 따르려는 교종과 달리, 선종은 스스로 부처가 되려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던 종파였다. 선종 전통에서 가장 유명한 경전인 <육조단경>은 선종의 여섯번째 스승인 육조 혜능이 어떻게 여섯번째 스승이 되었는지 알려주는 일화와 그의 설법을 다룬 책이다. 이책은 싯다르타의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이라고 불린다. 얼마나 큰 파격이며 얼마나 큰 도전인가.

*육조단경: 오조 홍인이 여섯번째 스승, 즉 육조를 뽑으려고 하면서 시작된다.


5강 인연 <만들어진 인연에서 만드는 인연으로>


처음에는 이별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수평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앞으로 앞으로" 걸어나가면,

"앞으로 앞으로" 배를 수평선쪽으로 밀어붙이면

"온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다. (중략) 수평선을 넘어 도달한 곳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때에는 좋은 인연과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인연과 단절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쁜 인연을 마주쳤다해도 무슨문제인가? 다시 수평선 너머로 배를 몰면 되지 않는가?


6강 주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아니 그만둘 수 있어야 자유다>


<현애살수>,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떼야 한다는 뜻이다. 매달린 절벽은 사실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놓으면 죽을 것 같다고 믿는 집착의 대상일 뿐이다. 사람마다 그 대상은 다르다. 우정일수도 있고, 아이일수도있고, 타인의 인정일수도 있다.


자유란 별것 아니다. 몸이 있으면 마음도 같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 몸도 같이 있는 것이다. 지금 머문 곳을 몸이 싫어하면 떠날 뿐이고 지금 머문곳을 마음이 좋아하면 더 머물뿐이다.


멈출 수 있어야, 혹은 그만둘 수 있어야 자유다. 멈출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고,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노! 라고 할수 있어야 하고 멈출 수 있어야 하고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7강 애 <이렇게 피곤한데 이다지도 충만하다니>


자중자애, 스스로를 무겁게 여기고 아낀다는 뜻이다. 애지중지의 대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중자애하는 법이다.


아끼는 사람이 무언가 해주기를 원하는 순간 아낌의 관계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너저분한 거래 관계가 들어선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이만큼 해야 하는거 아니야" 이제 상대방이 내가 애지중지 하는 모 든 행동을 일종의 부채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아낌의 관계는 막장을 향해 치닫고 만다. 이런 비극을 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끼는 사람을 반려견이나 반려묘처럼 보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려견이 무언가 보답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잘먹고 잘자고 잘싸면서 내곁에 오래 있어주기만을 기원할 뿐이다.


8강 생 <아끼고 돌볼 것이 눈에 밟힌다면>


제행무상, 형성된 모든 것들은 소멸하는 법이다.


아무리 옳은 이야기일지라도 자기 입에서 그 말이 발화되어도 좋은지 숙고해야한다. 이것이 인문학의 마지막 지혜다. 누구의 입에서 진리가 발화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면 아낌의 관계를 성찰하면된다. 아낌의 관계만큼 진리의 발화로 인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탄에 이르는 관계도 없으니 말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내가 줗았었다는 것을 공표한다는 것,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좀 알기나 하니'등등 선물을 말하는 것은 곧 선물을 침묵속의 소비와는 대립되는...교환경제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언가를 아끼는 일은 힘든 일이다. 조장해도 아끼는 대상은 불행에 빠지고, 조장하지 않고 완전히 방임해도 아끼는 대상은 불행에 빠지니 말이다. 그래서 맹자는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라고 말한 것이다. 아끼는 대상을 방치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해서 잘되라고 아끼는 대상에 직접 개입하지도 말라! 는 아낌의 좌우명이다. 그렇지만 맹자의 이야기는 생각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다. 조장하지 않으려 하면 아끼는 대상을 잊어버리기 쉽고, 아끼는 대상을 잊지 않으려 하면 조장하기 쉽기 때문이다.


애지중지해주기를 바라지 않고 상대방을 애지중지하지만 다행히도 상대방으로부터 애지중지를 받는 경우도 있다. 바로 이런 행복한 상황에서 두 눈부처가 탄생한다. 당신이 나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응시하고 나도 당신을 애정어린 눈으로 응시한다. 당연히 나는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내모습을 확인한다. 나의 눈부처다. 동시에 당신도 내 눈동자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당신의 눈부처다. 당신을 아끼기에 내가 수고로운것, 나를 아끼기에 당신이 수고로운 것은 바로 이순간에 봄눈 녹듯 녹아버리고 만다, 수고로움이 근사한 뿌듯함과 뻐근한 행복감으로 바뀌니까.






에필로그

독자들이 최소한 하나의 타자에게만큼은 부처였으면 좋겠고, 그저 최소한 하나의 타자에게만큼은 철학자였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애인, 친구, 남편, 아내, 아버지, 어머니 여도 좋다. 고양이, 강아지, 벚꽃, 화초여도 좋다. 그것이 무엇이든 '기브 앤 테이크'에서 테이크를 절단하고 '기브 앤드 기브'를 할 수 있는 삶을 독자들이 살아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 눈감을때 보는 것이 자신의 눈부처일 수 있는 기적을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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