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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Nov 01. 2021

다시보는 사도행전 6

고넬료에게 복음전파 


다음은, 박영선 목사님의 <다시보는 사도행전> 챕터 15~16장을 읽고 요약한 글입니다.


Part 15. 사랑받는 자녀로 삼으신다

사도행전 10:34-48

사도행전 10장은 그 유명한,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순간을 잘 설명하는 장이다. 고넬료는 이방인이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된 사건으로 인해 11장에 가면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논란이 일어난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방전도가 당시에는 매우 이례적이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와 어떤 차이가 없는 사람이다. 유다가 스승을 팔아먹었다면 베드로는 세번이나 부인한 사람인데 돌이킴을 받고 배신이 회복되고 역전이 된다, 그래서 대사도가 된다. 바울도 그랬다. 스데반이 죽고 그를 죽인 사울이 하나님의 중요한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이 두사건은 이 복음이 우리에게서 출발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자격때문에 주어진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나태내고 있다. (이방 전도도 마찬가지다. 이방인들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뜻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자기 신생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무엇으로 됩니까?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 스스로가 확인되고 만족하십니까? 어떤 성공이나 능력도 있을것 이고, 어떤 쓸모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보면 이런것들이 다 사라진다. 내게 만일 나라는 존재에 대해 확인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죽은 다음에 손주가 나의 무덤에 올때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저 사랑해주셔서 고마워요"그러면 나는 만족하겠다. 젊은 분들은 못알아듣는다. 아직 무언가를해서 확인할 것들이 많다. 사람은 관계성을 통해 확인되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무리 잘난사람도 누군가 거기에 항복하고 누군가가그것으로 감사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실 허무한 것이다. 


여러분이 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위협과 시험에 겁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특공대같이 들어왔다가 일 하나 해결하고 나가시는 분이 아니다. 여러분이 기도해야 찾아오는 구조대가 아니다. 모든것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주인이신데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주신 능력과 성실하심과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아버지지다. 넉넉한 마음과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성경적으로 붙드셔서 사랑을 받는 자의 그 영광을 누리시기 바란다. 

바렌트 파브리티우스(Barent Fabritius, 1624-1673)  "Peter in the House of Cornelius"


Part 16. 하나님은 넉넉하시다

사도행전 11:1-18


고넬료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하나님 백성 범위가 유대인에게 제한되지 않고 이방인까지, 말하자면 모든 인류에게 허락되었다는 증거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나중에 세운 교회들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이 유대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이다. 유대인들같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받아야만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자격조건 시비가 초대교회사에서 교회들마다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유대인들이 초대교회 이방인들이 그들과 동일하게 하나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오해하고 거부했듯이 기독교 시대에 와서는 지금까지 기독교 내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거부가 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라는 거부가 있고, 마치 유대인은 버러진 자식인 것같이 구별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제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중요한 질문앞에 설때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뜻밖에도 교회는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교회가 교회로서 가지는 정체성이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이 필요한 자라는 자기 실체에 대한 이해와 고백입니다. 세상에서 평등을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국가나 민족이나 인종이나 피부색깔 가지고 차별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공동체로 모여야 합니다. 각 개인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교회를 존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이유로는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으로 이 정체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저들은 도무지 공통점이 없는데 왜 같이 앉아 있느냐 할때 그 답은 <예수를 믿는다>이다. 저사람은 우파이고 저 사람은 좌파인데 어떻게 같이 있냐, 혹시 양 정당의 막후가 아니냐, 이런 모든 음모론과 오해 속에서도 같이 나와서 앉아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으로 교회가 성립되었다. 

교회는 늘 열려있어야 한다. 의심하는 자도 오고, 반대하는 자도 오고, 물어보려고도 오고, 호기심으로도 오고,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닫고 싶어한다. 어떤 자격 어떤 특징 같으로 닫고 싶어 한다. 교회는 어느 한 사람의 의견까지 다 열어놓는 곳이어야 한다. 주께서 열면 닫을자가 없고 주께서 닫으면 열자가 없는 곳이 교회다. (교회 공동체는 말씀으로 서 있다)


설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교회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는 자들에게 닥치는 가장 큰 시험이 이것이다. 내가 잘하면 하나님이 편을 들고 내가 잘모하면 하나님이 외면한다는 생각. 그렇지 않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했을 뿐 아니라 여러분과 예수님을 묶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책망하고 스스로 할말이 없는 실패와 게으름과 비겁함 속에 있을때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로 한 결단을 결단코 중단하지 않는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뜻이며 말씀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무엇을 겁내는 겁니까? 자꾸만 하나님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심판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잘하면 복받고 못하면 벌주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한번 두번 세번까지는 봐주시지만 네번째는 안 봐준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넉넉하다. 돌아오는 시간을, 기회를 허락하신다. 넘어지면 일으키시고 무릎 닦아주시고 눈물 닦아 주시고 '내손 잡아라'그러시지 '거봐' 그러지 않는다. 


우리가 다같이 주일에 모여서 '저사람도 왔네. 저사람도 왔어 그렇지 우리가 다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지 하나님 오늘도 우리를 받아주셨네. 응원하고 힘주시네' 이야기하면된다. 포기하지 말고 세상과 맞서라. 



주일에배 <저런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를 듣고 요약한 글이다.

누가복음 15장 25-32 by 전기철 목사님


종교개혁 기념일 매년 10월 31일

1517년 10.31일 마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 연옥에 대한 교황권 주장, 공로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하여 오직 성경의 권위와 은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부패한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교회제도를 개혁하고자했던 서방교회 개혁운동. 이날을 기념해서 매해 10월말은 종교개혁기념일 주간으로 정했다고 함.


서로가 죄인이라고 여기는 곳은 서로를 용납할 수 있다. 서로 의인이라 주장하는 것보다 편하다. 누가복음 15장 7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먼저 된사람, 먼저 구원받은 사람의 기쁨이 뭐냐면,

하나님 앞에서 새로나와 감격하는 이들을 보는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예배는 무언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아니면 살수없다는 우리 고백을,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영상예배도 괜찮지만 다 같이 모여 우리가 가진 달란트를 나누고, 함께 드리는 공동체 회복 그 은혜를 체험할 수 없다. "여러분 온라인 예배 드리면 눈에 가시 같은 사람 안봐도 되는 은혜가 있어요 근데 그게 은혜가 아니라는거에요. 하나님 안에서 모난 것을 제하시고 하나님 자녀답게 만드시는 은혜가 그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눈에는 꼴보기 싫지만 하나님이 마지막까지 구하고자 하는 자녀라고 생각하자. 


 Q: (돌아온 탕자, 누가복음 15장 첫째와 둘째) 여러분은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중 누구 손을 들어주고 싶으세요? 하나님은 누굴 더 사랑하실까요? 누가 구원받았을까요? 



우리가 개혁한 개신교회도 하나님이 버릴 수 있다는 말씀을 두려움으로 들어야 한다. 










모두 하나님 자녀로 하나님 구원 안에 있었다고 믿어요. 큰아들아 죽었다고 믿었던 아이가 돌아왔는데 우리가 기뻐해야 하지 않겠니? 천국에 가면 세가지 때문에 놀란다고해요. 1. 왜 저사람이 여기있지? 2. 왜 그사람이 없지? 3. 왜 내가 여기에 있지? 그것때문에 놀란다고 하잖아요. 저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라는 질문을 던지지 마시고요 저사람도 하나님이 천국에 데려가길 원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이 우릴 통해 주님의 일을 이루신다. 둘째아들또한 누군가를 용납하는 자리로 갈 또하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이들에게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이다. 성령의 은혜로 깨우쳐주시는 하나님 음성으로 듣기를 원한다. 사람이 있는 곳 다그래, 라고 말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게 종교개혁에 우리에게주는 교훈이라고 믿는다. 


첫째와 둘째 아들에게 필요한 건, 하나님이 바라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게 없으면 교회를 얼마나 다녔는지 중요한게 아니다. 거듭난다는게 뭔가요? 육신으로 보던걸 영으로 보는걸, 거듭남이라고 말해요. 우리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 시선으로 바라보는게 거듭남입니다. 저런 인간과 상종하나봐라, 마침표를찍었다가 오늘도 내가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지, 하는게 구원의 거듭남의 은혜다. 구원받았다는 기쁨이 아니라 내 시선이 하나님 시선으로 바뀌는 것이다. 내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 시선과 하나님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 은혜인 줄 알았으면 좋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DhilYzzWb1o 34: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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