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메인 앵커를 그만두고, 그의 거취가 궁금했는데 자신이 오랬동안 진행자로 있던 <시선집중>에 출연해 앞으로는 순회특파원으로 현장에 복귀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 책의 출간소식과 함께.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 고향이라 칭하는 MBC에서 30년을 보내고 당시 비판의 대상이 됐던 종편채널, 그것도 삼성과 친인척관계로 얽혀있는 JTBC 앵커겸 보도부문 사장으로 스카웃되었던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궁금증이 많이 빛바랐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그의 측근이나 추측성 기사가 아니라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당시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이나 계기에 대해서. 책에는 그내용이 다루어진다. 이명박근헤가 후보자 시절 손석희의 인터뷰 방식을 불편해했던 두 사람이 나란히 대통령이 되면서 "이명박근혜가 당선되면 손석희는 끝이다"는 예기들이 주변에서 들렸고 그때 그는 "그게 내 팔자다"라고 대꾸했다고 하는데 결국 그 팔자대로 끝을 맞게 되었다. 결국 그는 백분토론에서는 정리됐고, 시선집중에서는 그 대신 그의 오른팔이랄수도있는 시사평론가 김종배를 자르는 것을 시작으로 배우 김여진 출연에 대한 제지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간섭이 시작되었다. 황당하게도 이 무렵 MBC가 아예 소셜테이너 출연금지법이란 참신한(?) 것까지 만들어냈다. '버티기엔 이미 내상이 깊었고 치유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다'고, 그는 기록했다. 그리고 그즈음 (물론 이전에 한번 더 그런 제안이 있었다) 다시 JTBC 로부터 제안을 받게된다. 이후는 우리 모두가 아는 그대로 그는 JTBC보도국 사장으로 전격 취임한다.
책에는 그가 해온 굵직한 보도들 사이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것들에 적극적인 해명과 아쉬움이 남는 보도에 대한 장면들이 언급된다. 숨가쁘게 벌어진 일들과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잊고 있었던 희대의 사건들을 다시 한번 그의 차분한 글로 읽으며 정리해나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팩트 위주로 품위를 갖춰 기승전결 정리된 그때 그 사건들을 읽어내려갈 수 있는 기쁨을 여러분도 직접 느껴보시길 바란다. 개인적으로는 다소 아쉬운 부분도 있다. 하기사, 사실 따지고 보면 그가 선택한 <장면들>에 (내가 궁금한) 그의 개인사가 들어갈 이유도 없지만 말이다. 최순실 태블릿 PC발견, 국정농단, 세월호, 미투 어마어마한 폭풍같은 뉴스 속에서 (내가 궁금한) 세가지 일들은 별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가 김웅기자라는 사람과의 개인사로 인해 폭행사건으로 벌금형 300만원 받은 것
여자동승자가 있었냐 아니냐로 시끄러웠던 추돌사건
n번방 조주빈에게 돈 천만원을 입금한 사건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 세가지 사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타사에서 jtbc+손석희를 음해하려고 한 시도였는지 정말 개인적으로 밝혀지면 안될 뭔가 있었던건지 오리무중인채로 묻혀지겠지.
대한민국 역사에는 결코 두번 있어서는 안될 세월호, 대통령 탄핵...그 소용돌이 속에서 <아젠타 키핑>을 위해 그가 했던 노력과 그 과정이, 손석희라는 인물을 통해 재조명된다. 이 책은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에필로그
조국의 시간, 대통령의 글쓰기, 장면들, 이런 책은 한두시간이면 후루룩 읽히는걸보면 아직도 정치에 관심이 큰 것 같다. 이게 다 강준만 교수의 <인물과 사상>덕분이지만. 고등학교때부터 그 책을 통해 한국정치를 접했다. 자연스레 노무현과 김대중도 알게 되었다. 이후의 이명박근혜는 나꼼수와 다스뵈이다를 통해배웠다.
이제는 레거시미디어 시대는가고 그 시대의 대표주자 손석희도 떠났고 픔위가 있으면서 신뢰할만한 뉴스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편향적인 1인 미디어가 차지해버렸는데. 강준만과 김어준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해 한국정치를 바라봤지만, 이제 더이상 그들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어디에서 팩트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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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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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바람이 있다면 20대 대통령 선거일이 안왔으면 좋겠다는 것. 2022년 대선에 대한 기대가 1도없다.
편애하는 밑줄
내가 내세운 보도의 네가지 원칙. 즉 사실, 공정. 균형, 품위 중의 마지막 것 품위에 맞는가를 떠올려보니 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일국의 대통령이 드라마 주인공 이름(길라임)을 가명으로 써서 불요불급해보이는 이유로 초고가의 병원을 출입했다면 그건 격에 안맞는 일이긴 했으나 너무 가십성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떨어뜨린 자신의 품위와 그것을 다루는 미디어의 품위는 별개일까를 생각해보았다. 그보다 전에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이 청와대에 반기를 들다가 혼외자 사건이 터졌을때도 우리는 그내용을 거의 다루지 않았었다. 그보다는 채 총창에 대한 정보가 어떻게 새어 나왔는지, 즉 권력의 일탈에 더 집중해서 보도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길라임은? 그것이 국정농단 사건의 본질과 연결이 되는가? (결국 고민끝에 보도했다. 앞세우긴 그렇고 뉴스 거의 맨뒤쪽에...)
이가혁 기자 일행은 정유라 일행의 은신처를 확인하고 접촉을 시도했지만 문을 걸어잠그고 창문까지 이불로 가린 채 일절 반응하지 않아 덴마크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들은 정유라 일행을 연행했다. 2017년 1월 2일 <뉴스룸>에서는 정유라의 발견과 체포까지 이르는 과정이 대대적으로 다뤄졌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부터 우리 보도는 잠시 동안의 논란속으로 들어갔다. '기자가 참여자냐 관찰자냐'하는 오래된 논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즉 정유라의 소재를 현지 경찰에 신고하고 연행과정을 보도한 것이 언론 윤리에 어긋난다는 문제제기였다. '미디어오늘' 박상현 이사는 "기자는 사건을 보도만 할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명백하게 어긴것"이며 "그가 시민으로서 신고하기로 했다면 보도를 포기했어야 했다. 만약 보도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끝까지 관찰자로 남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일보' 김지방 기자는 "JTBC보도가 한국기자협회의 윤리강령 5번 항목 즉 '우리는 취재활동 중에 취득한 정보를 보도의 목적에만 사용한다'에 위배되지만 "기자가 취재해야할 세계는 버라이어티하다. 몇줄로 축약된 윤리강령이란건 앙상하기 마련"이라며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참여자 VS 관찰자' 논쟁에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케빈카터 퓰리쳐 수상작 <굶주린 어린아이와 이를 바라보는 독수리>사진과 2013년에 있었던 성재기 씨 마포대교 투신자살 사건을 소환하기도 했다. (남성연대 창립자 성재기씨가 남서인권운동을 벌이다가 퍼포먼스라며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렸다가 사흘뒤 시신으로 발견됐다. 현장에는 KBS기자가 있었다. 그는 성재기 씨가 뛰어내리기 전과직후에 경찰과 구조대에 신고했다고 밝혔으나 자살을 방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기자는 결국 "윤리강령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모든현장과 모든 기자의 판단에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며 "기자 개개인의 양심과 자유, 그리고 급변하고 있는 뉴스 시장에서 시시각각 이뤄지는 시민의 판단에 맡겨두는게 효율적이고 현명해보인다"고 맺었다.
이 사건 소추사유와 관련한 피청구인의 일련의 언행을 보면 법 위배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할 헌법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결국 피 청구인의 위헌 위법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피 청구인의 법 위배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마지막 주문은 너무나 강렬했다.
문재인 대통령 시절 고구마 인터뷰. 어떤 형태로 대통령이 물려나든 그 이후 60일 이내에 다음 대선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있는데 문 전 대표는 그 끝에 "필요하다면 국민들의 공론에 맡긴다"를 붙인 것이었다. 법으로 정해진 것이라면 그 법을 바꾸기 전에는 무조건 실시를 해야하는게 맞는데 그가 왜 그런 후렴을 붙이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좀 미안한 일이지만 표현만 바꾼 같은 내용의 질문이 무려 10번이나 이어졌다. "아까 궁금해하셨는데 그런 경우 이후 대책은 지금으로서는 헌법절차를 지키는 것 이상으로 저희가 말할 있는 것이 없는 것"이라고 마무리했다. 이 인터뷰는 고구마인터뷰라는 별칭이 붙었다. 물론 나역시 너무 집요했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안희정과의 선의 인터뷰. 안희정 지사는 무조건 의심부터 할 것이 아니라 선의를 전제로 하고 접근하되 그것은 통섭, 즉 어느 한쪽으로만이 아니라 다양한 면을 아우르는 방법으로 접근해야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의 주장이 모두 틀렸다고는 할수 없으나 내가 천착했던 것은 현실의 세계에서 정치인들이 정치행위에 대한 분석을 그렇게 순수(?) 하게만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인터뷰라기보다는 논쟁에 가까웠던 이 대화는 전날 있었던 안지사의 강연내용에 대한 비판을 증폭시켰다. 인터뷰가 단순히 어젠다를 세우거나 이어가는 것 이상의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 사례이기도 했다. 이용한 교수는 "출연자가 언급한 정치적 입장이나 견해에 나타난 논리를 어떻게 쟁점화시키는지의 과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서지현 검사가 인터에 응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일이 커질것'이란 느낌이 머릿속을 채웠다. 소위 '검사동일체'문화속에서 살아온 현직 검사가 같은 검사 출신 선배를, 성추행으로 고발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생방송 메인뉴스에서 앵커와 인터뷰로 말이다. 혹여나 서 검사가 방송을 앞두고 마음이 변할까 걱정됐으나 나는 일부러 재차 확인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방송시간까지는 생각을 바꾸든 결심을 더 강하게 하든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의 시간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충격적이었다. 안희정이라니...그는 이른ㄹ바 대선주자급 정치인 아닌가. 그 엄청난 파장이 눈에 보였다. 주차장 한구석 보도턱에 주저 앉아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걸 어떻게 다뤄야 하나. 이미 한달 넘게 쏟아져 나오는 미투 보도를 이어오던 차였다. <뉴스룸>은 미투 보도의 본산처럼 여겨졌다. 많은 리스크가 따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아픈 얘기들을 생방송으로 상황을 통제하면서 듣고 전한다는 것이 지극한 감정노도잉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격려와 응원보다는 질타와 비난이 더 표면위로 올라왔다. 비난자들은 나를 '메갈손'이라 부르고 뉴스룸을 미투룸이라 부르며 조롱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미투보도 자체에 대한 회의론도 내외부에서 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사장이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느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서지현 검사를 만났을때부터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정권에 대한 비판이나 대형참사에 대한 어젠다 지키기는 차라디 단순한 것일 수 있었다 거기엔 용기만 있으면 되었다. 미투는 복잡했다. 젠더 문제였기 때문이다. 용기만 가지고 안되는 부분이 있었다.
남북문제라는 어젠다를 평양 형지방송과 지국설치라는 커다란 이벤트로 이어간다는 것은 분명도전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결국은 실패하더라도 민족문제가 중심인 어젠다는 그것을 낙관적으로 유지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아마도 나는(비록 치기가 섞인 대답이었다 해도) MBC 평양지국장이 장래소망이라고 썼을때부터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한 방송사의 공명심의 문제일수도 있었지만 이제 겨우 다시 시작된 해빙기의 아침에 그래도 언론이 약간의 온기를 더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것이 어쩌면 매우 드물게 '긍정적 사안을 대상으로 한 어젠다 키핑'의 사례가 될수도 있다고 보았다. 비록 다시 빙하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해빙의 기억은 중요한 것이니까.
나의 JTBC 행은 온통 논란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토록 힐난하고 비웃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돌아서주었고 심지어는 열혈 시청자가 되어주었으며 필요하다면 출연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그때의 비난과 질타 우려의 목소리도 나는 잊었으며 여기에 옮길 필요도 없게 되었다. 다만 내게 작은 위로가 되었던 한사람의 목소리가 있었으니 그것만 잠시 옮긴다. '그렇다. 나는 어느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어떤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 대해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먼곳에서 들려온 북소리라는 표현을 쓴다. 그것은 여행을 떠날 이유로는 이상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오래 몸담아왔던 곳을 떠나는 사람들. 그들은 그런 결정이나 선택의 계기를 무엇에서 찾았을까? 그들도 먼 북소리를 듣고 이제 떠나야 할때가 되었음을 알았을까? (중략) 샤르트르는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존재인 우리에게 어느길이든 선택할 자유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사람은 그가 가고 싶은 길이면 어떤 길이든 선택해서 갈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선택에 대해 그는 책임을 져야한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2013.05.10 중에서. 이렇게 말한후 그는 일디보의 my way 를 선곡했다. (2013년 5월 10일은 손석희가 시선집중을 떠나는 마지막 날 방송일자인걸 보면 배철수는 그의 방식대로 손석희를 응원했던 것 같다)
"선배가 생각하는 보도의 원칙이랄까 그게 뭔가요"부장들과의 첫 상견례자리였다. "당연히 가장 우선시되는건 팩트지요 그다음엔 이해관계속에서의 공정, 이데올로기에 있어서는 균형......"여기까지는 어찌보면 그냥 자동으로 나올수있는 대답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뒤 나는 당시에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던 한가지를 추가했다. "그리고 품위입니다. 무엇을 보도할 것인가와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에서 품위가 빠지면 안됩니다"
JTBC 의 정체성은 다시 말하지만 '합리적 진보'다. 중앙일보의 그것은 열린보수다. 그 두가지의 정체성이 공유하는 것은 이성과 합리일 것이다.
조국 정국에서 우리가 놓쳐선 안될 본질은 '검찰개혁'이었다. 그러나 개혁의 객체가 되어야 할 검찰은 조국 정국에서 주체로 나섰고 개혁의 주체여야 할 법무부 장관은 수사의 객체가 되어 있었다. 동시에 사건이 진행될수록 검찰개혁의 본질보다도 조국 당시 장관 부부의 문제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검찰개혁정국이 곧바로 조국정국이었다. 검찰개혁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여지없이 친조국이거나 반조국으로 수렴되는것을 피할수없는 지경이 되었다. 언론뿐 아니라 진보진영 내부도 바로 그 지점에서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지금은 모두 잊었을지 모르지만 조국정국의 시작은 검찰이 아니라 당연히 야당이었다. 청와대가 조국 전 민정수석을 법무부장관으로 내정한 2019년 8월 9일에 당시 야당이던 자유한국당은 임명을 감행할 경우 야당과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으름장부터 놓았다. 이후 보름이 넘도록 여야공방이 치열하게 계속됐다. 딸의 입시문제나 사모펀드에 대한 의혹등이 모두 그기간동안 나온것들이었다.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9월7일에 검찰이 조후보자의 부인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를 사문서 위조혐의로 재판에 넘긴일일것이다. 당사자에 대한 조사없이 진술과 증거만으로 충분하다며 소한 것이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와대가 매우 격양됐다는 얘기가 흘러나왔고 그로부터 이틀 뒤에 문재인 대통령은 결국 조국 후보자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 모든 과정이 한국사회를 커다른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동안에 언론이 얼마만큼 검찰개혁이라는 본질을 드러내고 그당위성과 역사성까지 짚어냈는지를 돌아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사회가 왜 검찰개혁을 이뤄내야 하는지에 대한, 무엇보다도 그 개혁의 수준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언론의 장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못했다. 그것은 조국과 윤석열이라는 상징화된 개인들 간의 쟁투에 가려졌다. 내가 책임지고 있었던 JTBC뉴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략) 돌이켜보면 조국 정국이 계속되는 동안 언론은 검찰개혁과 관련된 이슈를 다루기를 오히려 회피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이는 정책에 편승하기를 꺼려하는 언론의 속성을 감안하더라도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조국 당시 장관이 자칭 불쏘시개가 되기를 자청했다는 검찰개혁이 무엇인지 그것은 달성 가능하고 충분한 것인지를 따져봐야했지만 그것도 묻혀버렸다. 결국 조국 정국이란 것이 검찰이 자신들을 향한 칼날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들이 쏟아져나왔다. (중략) 지금에 와서 냉정하게 돌아보면 그때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었따. 이례적으로 민정수석에서 곧바로 법무부 장관으로 직행한 경우의 당위성을 더 따져봤어야했다. 검찰개혁이 완수를 명분으로 한 그 임명이 결국 무리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짚어냈어야 했따. 동시에 검찰의 전광석화와 같았던 수사가 결국 검찰 기득권의 보호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더 강하게 전해야했다. 검찰개혁이 피할 수 없는 과제라면 왜 그런것인지 지난날 검차의 부조리와 권력지향의 행태들을 좀더 일일이 짚어냈어야만했다. 그랬다면 이 사건을 지나오면서 느꼈던 자괴감들은 조금 덜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조국 정국이 지속되면서 뉴스룸도 고전했다. 어느 평자는 뉴스룸이 자신의 시청자들 편을 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그럴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꼭 옳은 판단은 아닐수도있었다. 매스미디어가 여론을 지배하던 시대는 갔고, 지금은 디지털시대이고, 이용자들이 뉴스를 선택하기도 하고 '믿고 거르기도'하는 시대이니 거기에 적응하라는 충고도 들었다. 그럴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다 똑같은 말들이다. 그걸 좀더 목에 힘주고 얘기하자면 자기확증편향, 포스트트루스, 진실의 개인화 등등이 될 것이다. 오만가지 분석도 나왔다. 심지어 한편에서는 내가 검찰에 약점이 잡혀 검찰 편을 든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웃기는얘기다. 언론은 담장위를 걷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진실과 거짓, 공정과 불공정, 견제와 옹호. 품위와 저열 사이의 담장. 한발만 잘못 디디면 자기부정의 길로 갈수도있다는 경고는 언제나 유효하다. 다만, 그 담장위를 무사히 지나갔다해도 그 걸음걸이가 당당한 것이었는지 아슬아슬한 것이었는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터이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뉴스를 떠나있는 지금의 나는 염치없이 평안하다.
앵커브리핑. 팩트체크. 비하인드 뉴스. 문화초대석. 이들 코너들을 돌면 새로운 저널리즘이 보였다. 그리고 이미 시작했던 그날의 엔딩곡까지. 아쉽게도 지금은 사라졌거나 축소된 코너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뉴스룸>의 성격을 규정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노회찬.
한 사람에 대해, 그것도 그의 사후에…
세 번의 앵커브리핑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은
이보다 며칠 전에 그의 죽음에 대한 누군가의 발언이 논란이 되었을 때 했어야 했으나
당시는 선거전이 한창이었고, 저의 앵커브리핑이 선거전에 연루되는 것을 피해야 했으므로
선거가 끝난 오늘에야 내놓게 되었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제가 학교에서 몇 푼 거리 안 되는 지식을 팔고 있던 시절에
저는 그를 두 어 번 저의 수업 시간에 초대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처음에는 저도 요령을 부리느라
그를 불러 저의 하루 치 수업 준비에 들어가는 노동을 줄여보겠다는 심산도 없지 않았지요.
저의 얕은 생각을 몰랐을 리 없었겠지만, 그는 그 바쁜 와중에도 아주 흔쾌히 응해주었습니다.
다음 해, 또 그다음 해까지 그는 저의 강의실을 찾아주었지요.
그때마다 제가 그를 학생들에게 소개할 때 했던 말이 있습니다.
노 의원은 앞과 뒤가 같은 사람이고,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이다…
그것은 진심이었습니다.
제가 그를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정치인 노회찬은 노동운동가 노회찬과 같은 사람이었고,
또한 정치인 노회찬은 휴머니스트로서의, 자연인 노회찬과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등진 직후에 전해드렸던 앵커브리핑에서 저는 그와의 몇 가지 인연을 말씀드렸습니다.
가령 그의 첫 텔레비전 토론과 마지막 인터뷰의 진행자가 저였다는 것 등등…
그러나 그것은 어찌 보면 인연이라기보다는 그저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을 터이고…
그런 몇 가지의 일화들을 엮어내는 것만으로
그가 가졌던 현실정치의 고민마저 다 알아채고 있었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놀라운 죽음 직후에
제가 알고 있던 노회찬이란 사람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를 한동안 고심했고,
그 답을 희미하게 찾아내 가다가…결국은 또 다른 세파에 떠밀려 그만 잊어버리고 있던 차에…
논란이 된 그 발언은 나왔습니다.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의 정신을 이어받아서야…"
거리낌없이 던져놓은 그 말은 파문에 파문을 낳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순간에 그 덕분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노회찬에 대한 규정,
혹은 재인식을 생각해냈던 것입니다.
즉, 노회찬은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돈 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는 것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비리를 지닌 사람들의 행태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세상을 등진 그의 행위를 미화할 수는 없지만
그가 가졌던 부끄러움은 존중해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그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버린 그 차디찬 일갈을 듣고 난 뒤
마침내 도달하게 된 저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의 동갑내기 노회찬에게 이제야 비로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 나는 정작 그가 세상을 떠난 날에는 앵커브리핑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종일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나는 앵커브리핑 대신 백형병으로 세상을 떠났던 삼성반도체 공장노동자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를 인터뷰했다. 고 노회찬이 누구보다도 관심을 기울였던 사건이므로...그리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비통한 자들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의 글을 인용한 제목이었다. '마음이 부서진 자들에 듸해 민주주의는 진보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