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있었던 일을 조용히 혼자 복기하고 싶은데 머리속에 생각이 너무 많다.
차분히 글로 정리해보자.
내 인생의 고난이라 말할 수 있는 순간들,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들은 대부분은 가족으로 부터왔다.
스물한살때, 아빠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아무런 전조증상이 없었고 다만 감기가 너무 오래간다고만 걱정했었는데 ‘폐암’이라고 했다.
6개월 선고를 받았지만, 자연치료 덕분인지 아버지의 의지덕분인지 반년을 더 살다가 (제대로 사셨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생의 마지막 시기에는 음식물을 넘기는것도 어려워하셨고, 낮과 밤이고 가리지 않는 고통때문에 괴로워했다. 당장 내일 돌아가신다고해도 이상하지 않을정도로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다행히 내게는 엄마와 언니들 넷이 있었기에,당시에는 할머니도 살아계셨기에 돌아가면서 아빠를 돌보느라 그렇게 힘든줄은 몰랐다.
그땐 밤낮으로 아빠 수발을 드는게 힘들기도 했는데 지난 모든 일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된다.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일이 우리 가족에게도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몇번 큰일을 겪으면서 반복해서 든 생각은 큰사건앞에서 나는 조금 더 의연하게 객관적일 수 있다는 것.
비극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 클리세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이상하게도 막상 크나큰 소용돌이속에 휘말려있을땐 유체이탈같은 느낌이 드는거다.
2019년 겨울, 자칫 큰 사고로 번졌을 교통사고 순간에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내 앞에 일어난 일들이 마치 비현실적인 일처럼 다가오면서 그 사건과 나를 구분하여 그 사건의 테두리 밖에서 그 사건을 바라보게 되는 기분.
병원앞에서 주저앉고 아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교통사고 현장에서 119를 부르며 사고 현장을 설명하는 내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모든 순간들에 내가 주변인이라서 그랬을까?
스물아홉살때,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수면테라피 관련 취재를 하러 강북 어딘가에 있었는데 넷째언니가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일하는 중이라서 계속 거절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짜증을 내며 전화를 받았다.
왜 이제서야 전화를 받냐는 원망이 담긴, 그러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언니가 말했다. “엄마가 구급차에 실려갔어.”
구급차엔 환자만 싣고 가는건가? 왜 보호자없이 엄마만? 무슨일인데?
취재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울면서 택시를 타고 구리 병원으로 가는 장면도, 드라마 같았다.
도착해보니 엄마는 의식은 멀쩡했고, 혀가 꼬여있고,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게 마치 만취한 사람같아보여서 일단 안심했다.
생각보다 심각하지는 않았던 것.
“왜 왔어. 일하다가. 엄마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술마셨어? 왜그래?
“아니 갑자기 다리가 풀리고 몸이 맘대로 안움직이고 앉아있질 못하겠네”
구리 병원에서 CT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의사들 덕분에 엄마는 24시간 이내 받아야 했을 응급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병원에 일찍 옮겨졌음에도 불구하고 뇌세포가 꽤 많이 손상됐다.
도대체가 무슨 일인지 원인을 모른다는 병원에서, 의식은 멀쩡한 엄마랑 나는 그렇게 나름 신기한 경험을 하며 슬프지 않게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집에선 반의사로 통하는 우리 큰언니에 의해 아산병원으로 옮겨졌고 뇌경색 판정을 받았다.
그냥 딱봐도 뇌경색인데 왜 하루를 그병원에서 지체했냐고 아산병원 의사가 물었다.
달리 할말이 없었다.
큰언니는 ‘뇌우회로 수술에 저명한 의사’를 찾았고, 그렇게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엄마는 바로 수술을 받았다.
큰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엄마는 예후가 좋았고, 다행히 1년정도 더 재활병원에서 머물다 엄마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편측마비라는 후유증과 함께. (당시 엄마와 있었던 재활병원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냈던 내게 심심한 위로..뿐만이 아니라 설렘도 주고, 초콜릿도주고, 사랑도 주고, 가슴절절한 시집한권을 만들어줬던 그에게 감사하다. 어디서든, 잘 지내기를…)
큰 수술 이후 엄마는 많은 것이 변했다.
하나님을 만났고, 예배를 나가면서 거친 언어가 180도로 순화됐다.
전에없이 ‘고맙다’ ‘미안하다’ 같은 감정표현도 종종했다.
지금은 다른 엄마 또래 노인 분들에 비해 혈관관리도 더 잘하고 있고 꾸준히 복용하고 있는 약 덕분에 치매도 더디오는 것 같아 안심이다 (치매예방약을 10년전부터 처방받아 드셨다).
우리는 이 모든게 뇌경색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불행이라는 형태로 시작됐지만 축복이되기도 하는 인생의사건 사고들.
서른다섯에 넷째언니가 쓰러졌다.
(우리집 사람들은 왜 그렇게 갑자기들 쓰러지는건지!)
언니를 쓰러뜨린 것은 실체없는 불안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까지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할지, 아침에 눈뜰때부터 이유없이 모든 것이 불안하다던 언니는
현관문 밖을 나가다가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겨졌다.
회사의 배려로 2주간 휴가를 냈다. 어차피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아빠, 엄마에 이어 언니까지. 우리집에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동네사람들 말처럼 우리집에 망조가 들었나.
절망의 끝에서 낙담하며 울면서 언니의 병원에서 지낼 2주동안의 짐을 싸는 동안, 둘째언니 전화가 걸려왔다.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일 수 있으니 낙담하지말고 기도하자”
그 한마디였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이 불행을 떨쳐보낼 빛이 보였다.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예약하고 선생님이 언니에게 하는 말 하나하나를 메모했다.
약의 예후가 좋지않다는 부분이 머리속에 박혔다. 극단적인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
그런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한시도 언니 곁을 떠나지 않아야 했다.
남편도, 자식도 다 귀찮다고 병원에 오지 말라는 언니 곁에서 꼬박 2주를 지냈다.
내가 우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파야 하는데,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다고 눈이 흐릿해진 언니는 힘없이 말했다.
거의 매일 둘째언니가 우리를 위해 점심을 싸왔고, 병원바닥에 셋이 앉아 기도를 하고 찬양을했다.
여전히 모든것이 불안하다는 넷째언니는 감사하게도 찬양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매일 찬양을 들었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언니는 종종 신경안정제를 복용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녀로,
자기 삶을 잘 관리하며 살고 있다. 불안한 일이 생기면 응급약을 먹기도 하지만, 불안하지 않도록 평상시 마음을 잘 돌보면서.
내 나이 서른여덟. 셋째언니가 무너졌다. 2018년이었다.
그에 앞서 2011년 셋째언니 가족이 있는 일본에서 원자력 발전사고가 났다.
집도 직장도 다 그곳에 있었는데 언니는 빠르게 결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형부혼자 고집을 피우고 일본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젖먹이 아기를 우리에게 맡기고 언니는 일본에 가서 형부를 데리고 나왔다. 한국에서 1년 정도 준비를 하고, 그들은 다시 호주로 떠났다.
그렇게 6년, 무너진 삶의 터전을 호주에서 다시 애써서 정착했는데 영주권 문제로 또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이 생겼다.
언제나 자기 몫을 다 해내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 생활비까지 보태주고 내 용돈까지 줄 정도로 알뜰하고 똑부러지는 셋째언니를 두고 엄마는똥도 버릴게 없는 아이,라는 표현을 자주썼다. 삶에 우울이라고는 없는 언니가, 사막에서도 모래를 팔아서 먹고살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생활력 강한 셋째언니가
밥도 안먹고, 한숨만 쉬며, 멀리 타국에서 누워만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걱정이 됐다.
6년간 이뤄놓은 호주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집도 절도 없는 한국으로 와야하는 마흔중반의 삶이 막막했을 거다.
어느덧 아이도 둘이나 됐는데. 아이같은 남편과 진짜아이 둘을 데리고 한국에서 살길이 오죽 폭폭했을까.
우리 네자매는 언니를 위해 엄마집 리모델링을 감행했다. 셋째언니 네가족과 엄마가 불편하지 않게 공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몸과마음 모두 지쳐서 돌아올 셋째언니의 마음이 언니가 나고 자란 시골집에서 안정적으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이 제일컸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십시일반 우리가 모은 돈과 엄마의 지원으로 리모델링은 마무리가되었고 언니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아이들 학교갈 시간에는 편의점 파트타임 알바도 하면서 빠르게 한국생활에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언니는 결국 1년뒤 엄마집에서 쫒겨났다. 독립적인 우리엄마가 혼자살겠다고 천명한 것. 결국 언니들과 나는 주로 주말에 엄마집에 모여 시간을 보낸다)
당시에 셋째언니 가정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 노래를 참 많이 들었다. 자우림의 고잉홈이란 곡이다.
언젠가 자우림 동생이 회생이 불가할 정도로 사기를 당하고 시름에 빠져있을때 자우림이 만든 곡이라고 했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는 햇살에 마음을 맡기고
나는 너의 일을 떠올리며 수많은 생각에 슬퍼진다.
우리는 단지 내일의 일도 지금은 알 수가 없으니까
그저 너의 등을 감싸안으며 다 잘될꺼라고 말할수 밖에
더해줄수있는 일이 있을것만 같아 초조해져
무거운 너의 어깨와 기나긴 하루하루가 안타까워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너에게 생기면 좋겠어
너에겐 자격이 있으니까
이제 짐을 벗고 행복해지길 나는 간절하게 소원해본다.
더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것 같아서, 계속 기도했고 마음을 기울였다.
내 마음과 나머지 가족들의 마음이 당시 셋째언니에게 힘이 되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서른여덟, 조카가 강박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엄마, 아빠, 언니들의 사건이 하나 둘 다 지나갔고 이제는 어떤일이 닥쳐도 놀랍지 않겠다 인생에 일어나는 사건에 자만했을때쯤 불어닥친 비보에 가슴이 무너졌지만
언니가 의연해서, 괜찮았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됐다. 강박이라는 병이 우리 조카의 인생에 그렇게 나쁘지만은 아닐거라는 걸.
강박이 생긴 원인에 대해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이 병을 잘 파악해서 함께 잘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준비하는게 더나은 선택이라는 걸 앞서겪은 사건 사고들을 통해 배운건지는 몰라도 우리는 잘 이겨냈다. 이겨내고 있다.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받고 놀이 치료도 받으면서.
무엇보다 우리 가족의 힘은, 가족모두가 큰일앞에 똘똘뭉친다는 것.
가족 모두의 따뜻한 관심속에서 우리 조카의 강박은 우리 식구가 되었다.
서른 아홉, 교통사고를 당했다.
언니가 꿈에도 그리던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 날이었다.
자주 싸우는 언니 부부도 그날따라 호흡도 잘 맞고 날도 맑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이가 없는 둘째언니 부부의 일에 늘 대동하기에 그날도 나는 그 차에 같이 있었다.
차선만 바꾸면 되는데 그 과정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뒷차와 부딪혀 우리차가 반대방향에서 달려오는 차를 정면으로 부딪히고
그 옆차선에서 달리던 오토바이 아저씨와도 충돌하게 되었는데 자칫하면 큰사고가 될뻔했는데 천만다행이도 반대방향에서 오던 운전자가 방어운전을 너무도 잘해주었다. 언니와 형부와 나는 놀라고 경황이 없었지만 별다른 외상은 없어보였다. (물론 그 사고 이후 언니 부부는 두달내내 도수치료를 비롯해서 각종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후유증이 있었다. 나는 멀쩡했다)
문제는, 오토바이 아저씨였다.
구급차 이송당시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아 하루종일 침울하게 아저씨 경과를 기다렸다.
언니랑 형부는 경찰서에 있었다.
고의가 아니어도, 살인자가 될 수도 있는게 교통사고라는 걸 실감했다.
그럼 우리 형부는 어찌되는거지? 우리 언니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아저씨가 무사하길 바랬다.
다행히 아저씨는 무사했고 그 덕분에 우리 가족도 무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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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일어난 사건들을 정리하게 된 계기는, 어제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한통 때문이었다.
내가 의지하고 믿고 사랑하는 그 아이가 몇분을 거의 말도못하고 꺼이꺼이 울어서, 왜그러느냐고 이유를 묻지도 못하고
그렇게 영문도 모른채 나역시 눈물이 났던 어제오후 세시.
오랜 정적 끝에 그 아이가 말했다.
“아무 이상 없으셔서 별일 없겠지 했는데…아빠가 암 말기래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아무런 위로를 할 수가 없었다.
내 일은, 나의 가족의 일은 어떻게든 헤쳐나가겠는데 다른 사람의 아픈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위로를 건네는게 맞을까.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 것이 답답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픔에,
내가 할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역할이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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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나는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