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읽는 헤드헌터 Jun 02. 2020

휴, 하마터면 그만둘뻔했다!

제니퍼의 북리뷰




한창 스타트업 붐이 일던 시절이었다. 지인 소개로 ‘I’라는 신생 회사에서 홍보를 맡게 됐다. 월급이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의 돈을, 한 달에 10만원 정도 교통비로 받았다.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잡힐 수도 있을 것 같은 월급 외 스톡옵션을 기대하며 새벽까지 열심히 일했다. (다행히) 그 꿈은 생각보다 빠르게 물거품이 됐다. 6개월 동안 번 돈은 고작 60만원 남짓. 남은 건 마이너스 통장과 백수가 된 동지뿐이었다. 그때 그 동지가, 몇 년 전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그라피> 마케팅 일이다. 며칠 전 그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편집장이 북 리뷰 이야기하길래 당신을 추천했어. 써놓은 거 몇 개만 보내줘. 


잡지사 기자를 그만둔 지 올해로 15년째. 북 리뷰를, 그것도 몇 개씩이나(!) 써놓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건 어두운 터널을 함께 지나온 동지의 부탁.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주말까지 원고 보내줄게.”


  ‘금사빠’인 내가 유일하게, 오랫동안 순정을 바쳐온 분야가 있다면 그건 바로 독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을 단지 지적 허영을 채우거나, 인스타그램 업로드용으로 생각하는 부류도 있지만 내게 있어 책을 읽는 행위는 ‘게으른 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인생에 개입하기 위한 가장 최소한의 노력’이다. 기쁨, 위로, 마음의 평안을 주는 내 인생의 둘도 없는 조력자. 올해 마흔이 된 내가 제일 먼저 결심한 것은, ‘퇴사’. 그런 내게 위안을 주면서도 박장대소하게 만든 책을 소개한다. 일명, 한 남자의 인생을 건 본격 야매 득도 에세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휴, 하마터면 그만둘뻔 했다


4수 끝에 홍대 미대에 합격한 저자는 홍대만 들어가면 인생의 성공가도를 달릴 줄 알았다. 살다 보면 어디 인생이 뜻대로만 되던가. 낮에는 회사 다니고 밤에는 그림 그려가며 열심히 투잡 생활도 해봤으나 열정만 소비될 뿐, 좀처럼 인생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대부분 비슷한 인생 항로를 걷는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노력하고, 취직해서 ‘빡세게’ 일하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집 장만을 위해 또다시 애쓰는 것. 

그런데 이게 정말 내가 바라던 삶이 맞나? 더 이상 남이 정해준 인생 매뉴얼대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저자는 돌연 회사를 그만둔다. 1년 만이라도 원하는 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드디어 그는 그토록 원하던 ‘백수’가 되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그가 진짜로 바라는 길을 찾았을까? 이 책은 그 과정을 기록한 중간 결과물로, 명쾌한 결론에 다다를 수는 없지만 별다른 노력 없이 저자가 겪은 유쾌한 경험을 엿볼 수 있다. 자칫 책 제목만으로 책의 내용이 가벼울 거라는 편견을 가질 수 있지만, 한 남자가 나이 마흔에 인생을 걸고 내린 결정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 사뭇 진지하다. 하지만 결코 무겁지는 않다. 책의 중간중간 저자가 직접 그린 위트 넘치는 삽화 덕분이다. 답답한 현실을 대차게 걷어차며 분위기를 업시켜주는 사이다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한다. 


편애하는 밑줄


“나는 월급과 이별했다. 가끔 그녀(월급)와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곤 하는데, 그럴 때면 그녀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도 있다. 그녀가 주던 안정감. 하지만 그녀는 나를 너무 구속했다. 이미 헤어진 여자를 떠올리면 뭐 하랴. 지금 나에겐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 그녀의 이름은 ‘자유’다. 가끔은 날 불안하게 만들지만 구속하지 않아서 좋다. 연애를 하려면 데이트 비용이 든다. 전 여자 친구와의 연애에선 자유를 비용으로 냈고, 현 여자 친구와의 연애에선 돈을 비용으로 낸다. 어떤 연애가 더 낫다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어렵다. 각각 장단점이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는 현재 애인에게 잘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더욱더 내가 가진 자유를 사랑해야겠다.” 


저자가 말한 대로 어떤 연애가 더 낫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어떤 연애 스타일을 지향하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입으로는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안정감과 구속’을 원하는 스타일이다. 1. 적당한 구속이 있는 일터에서 2. 본업에 충실하되 3. 때때로 외도(글 쓰는 것)를 해야지만 무료한 일상을 견뎌낼 수 있는 타입.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 너무 세세하게 아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나를 포함한 직장인 대부분은 매일 아침 퇴사를 꿈꾸지만, 저자처럼 진짜로 그만두기는 쉽지 않다. 자유를 원하지만 불안한 (경제) 상황이 두렵기 때문이다. 다만, 책을 읽으며 조금 위안이 되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에 대해. 게다가,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했는데도 굶어 죽지 않고 그가 여전히 삶을 ‘잘’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쨌든 다행이다. 한창 퇴사를 고민하던 시점에 이 책을 만나게 돼서. 휴, 하마터면 그만둘 뻔했다.



매거진 그라피, 제니퍼의 북리뷰 연재중

매거진의 이전글 고슴도치의 소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