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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Jan 05. 2023

'하얼빈'을 읽고 결심한 것들





안중근에 대해서 얼마나 아세요?




팀장님, 되게 의외다요 (뭐가?)
정치 잘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역사도 잘 아는데
팀장님은 정치에 관심이 높은데
의외로 역사공부는 잘 안하시는 것 같아요.


녀석 참.........;;;;




내게 늘 도전을 주는 나의 팀원 S 덕분에 역사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겠노라 그녀가 육휴를 떠났을때 약속했건만, 그간 사실 단 한권의 역사책도 읽지못했다. 이번에 <영웅>을 보고 팀분들과 막걸리 한잔 하면서 S가 들려준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



“안중근이 이토의 동양평화를 옹호했던 적이 있었어요.
동학도를 진압하는 관군쪽에 서기도 했고“




안중근 의사에게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거라 짐작됐지만, 안중근의 입장을 변호해주고싶었다. 뭘 알아야 변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부랴 부랴 한참 뒤늦은 역사공부를 시작했는데ㅡ


공부를 하자마자 깊은 벽에 부딪혔다.

왜곡된 역사교과서로 아이들은 올바른 역사를 배울 수 없겠다 개탄했는데

그 아이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나조차도, 판단의 갈림길에서 망연자실할때가 너무 많이 찾아오는거다.

그때마다 황현필 한국사 유튜브를 찾아봤다.


나의 애정하는 팀원 S가 한말에, 내가 굳이 이유를 달자면 내 입장은 이렇다.


첫째. 안중근이 이토의 동양평화사상을 옹호했다가 그런 자신을 개탄하며 손가락을 자르는 맹세로 이토를 죽이이기로 결심한 것에 대해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이토는 러일전쟁을 벌이는 이유를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했고, 서양 강대국이 한국을 차지하면 동양평화가 깨지니까 일본이 맞서싸운다는 그럴듯한 주장을 했다. 당시 러이사를 두려워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본의 말을 사실로 믿고 일본을 응원하기도 했고. 안중근도 그가운데 하나였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전쟁이 끝나자 을사늑약을 강요하며 동양평화를 위해 한국을 보호한다더니 외교권을 빼앗고, 고종황제를 내쫓고, 급기야 한국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전국의 의병들이 일본군에 의해 비참하게 죽어갔다. 식민지 확장을 위한 도구로 <동양평화>를 주장한 이토의 진면모를 알게되자 안중근은 그를 처단할 결심을 세우고 마침내 하얼빈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청년 안중근에게 비난 받아야 할 부분이 있나? 일본을 너무 쉽게 믿었다는 것?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일이오



둘째, 안중근과 안태훈이 동학농민을 진압하는 관군의 입장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분의 차이라고 밖에 설명할 방도가 없다. 애시당초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였던 할아버지의 후예로 지역의 유지였던 안중근 일가가, 세도정치와 탐관오릴뿐만 아니라 관리들에 대한 불신으로 전국 농민이 들고 일어선 동학농민에 동학도로 참여할수가 없었던 것.


1894년 동학군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과 해주감사는 지원이 필요했다. 당시 안중근은 16살이었지만 지도력이 뛰어나 동학군을 무찌르기 위해 지원사격을 나갔고 박석골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게된다. 그때 안중근은 동학도를 백성을 약탈하는 무리로 보았다. 동학농민운동의 사령관역할을했던 백범김구(김창수)도 황해도 일대의 동학군 기강이 상당히 문란했다고 회고록에 남긴 기록이 있다.

당시 김창수가 이끄는 부대가 안중근 부대와 싸워서진다.
이미 김창수의 인품을 전해 들었던 안태훈이 김구를 살리기 위해 절에 피해 있던 김창수와 서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협정을 하고 나중에는 안태훈이 김창수를 집으로 오게 하는데 그때 안중근과 김창수가 처음 만나게 된다. 나중에 안중근의 조카이자 안정근의 딸인 안미생이 김구의 며느리가 되면서 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된다. 참으로 아름다운 결론이 아닐 수 없다!!



동학군이 마을을 <약탈하고> 지나가면 관군이 들어와서 동학군에게 식량을 내준 백성들을 잡아갔다.
동학군이 관아를 불지르고 아전을 죽이면 아전의 아내가 동학군의 은신처를 밀고했고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 동학군의 아들이 다시 그 밀고자를 죽였다. 3년쯤 전에 이 지역에서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포수와 청년들을 모아서 군사조직을 갖추고 마을을 위협하는 동학군을 쳐부수었는데 그때 열여섯살 난 안중근이 그 선봉의 역할을 했다고 빌렘은 뮈텔에게 말해주었다.

_김훈 소설, 하얼빈 중에서_


안태훈과 안중근은,

동학농민군과 대립했을때 동학군이 버리고 간 쌀 500석을 군량미로 사용했다. 조정은 안태훈에게 지속해서 쌀500석에 대한 원상회복을 원했고 안태훈은 추궁당하다 못해 천주교 교당으로 피신하게 된다. 그것을 계기로  천주교에 입교하고 1897년, 안중근도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얻게 된다.


안중근은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을 보며 한국독립을 위해 매진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1906년 국내에서 삼흥학교를 세우고(자신의 상점을 팔아서), 1907년에는 남포에 있던 돈의학교를 인수했다. 인재양성에 힘쓰는 한편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을 맡는 등 애국계몽운동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정미조약이 강제되고 한일신협약에 따라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되자 교육으로는 한국독립을 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직접 무력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러시아로 망명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연해주들 떠돌면 의병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1908년 의병부대를 조직, 참모장이 되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29세가 되던해 국내에서는 일본의 탄압이 거세지자 나라 밖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연해주로 건너가 전제덕이 이끄는 부대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된다. 의병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가 회령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하고, 만국공법의 포로조항을 존중하면서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포로들을 풀어주었다, 어진것으로 악한것을 대작코자했다.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 회복을 위해 힘쓸것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 기자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을 명중시킨 후 총을 내던지고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의거가 아닌, 대한민국 참모중장으로서 적국의 장수를 공개리에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1910년 2월 14일 억압된 재판장에서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이후 3월 26일 10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일본인에게 <테러리스트>로 남겨진 안중근의 명예 회복과 안중근의 유해를 찾는 일이다. 뤼순감옥 인근 죄수 묘 지에 묻혔다고 추정되는데 그는 죄수가 아니기에 그곳에서 꺼내와야 한다. 이미 천국에 있는 우리의 영웅에게 유해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남겨진 우리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일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의 유언도 광복된 조국에 자신의 유해를 가져가달라는 것이었는데....





제니퍼의 편애하는 밑줄







오백년왕조의 죄업이 탈진한 사람들의 어깨 위에 쌓여있었다.





- 유리한 증거가 있으며 말하라.


없다.


- 그대의 정치적 의견을 서면으로 제출하면 어떤가?

 

나는 말하기 좋아서 여러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거사는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다. 공개를 금지한 이상 진술할 필요는 없다.


- 앞으로도 진술하지 않겠는가?


방청객이 없으면 진술하지 않겠다.


- 그렇다면 앞으로 진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지금 진술하라.


나의 목적은 동양평화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토는 통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태황제를 폐위시키고 현황제를 자기 부하처럼 부렸다. 또 타국민을 죽이는 것을 영웅ㅇ으로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 한국 인민을 파리 죽이듯이 죽였다. 이토, 이자는 영웅이 아니다. 기회를 기다려 없애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하얼빈에서 기회를 얻었으므로 죽였다. 검찰관은 내가 이토를 오해해서 죽였다고 말하는데, 나는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해에서 죽인 것이 아니다. 검찰관이 내 다섯살 난 아들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니까 아버지라 말했다고 조서에 썼다. 그아이가 세살때 내가 집을 떠났으니 아이는 내 얼굴을 알 방도가 없다. 이로써 검찰 취조가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


-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더 말하라.


나는 증거물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다. 다만 나의 목적에 대해서 할말이 있다.


- 대개 진술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십분의 일도 말하지 못했다. 필요한 몇가지를 말하겠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쳬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렇게 깊이 나간다면 공개를 제지할 수 밖에 없다. 방청인들은 모두 퇴정....







안중근 열사를 위해 이정도는 알아야 할 배경지식


15세기 태종 세종 세조 성종

16세기 연산군 중종 명종 선조 그리고>> 임진왜란!!!

18세기 영조 정조

19세기 세도정치기 최악의 시기>>  순조 헌종 철종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다가 다시 민비가 권력을 잡으면서

무능한 조선이 된다. 사대주의. 성리학적 세계관때문에. 성리학은 중국중심 사고방식, 존화주의 /화이사관이다.



*1627년 정묘호란에도 친명배금


*1636년 병자호란때도 존명배청


*1842년 난징조약


*텐진조약: 1858년 청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과 맺은 조약 / 1971년 청이 일본과 맺은 조약/ 1885년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의 조약


*1860년 베이징조약


* 1867년 메이지 유신: 일본의 제122대 천황이 바로 메이지 (재위: 1867~1912) 1867년 왕정복고의 쿠데타를 계기로 약 250여 년간 유지된 막부가 무너지고, 일본은 일련의 정치 변혁을 전개하게 된다. 그것은 당시 천황 <메이지> 명으로 세상이 새로워졌다는 의미에서 이후 메이지 유신이라 불리게 된다.


*1879년 안태훈 진사와 배천 조씨 조마리아 장남으로 안중근이 태어난다.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 기운을 타고 태어났다는 뜻으로 응칠,이라 불렸다. 안태훈은 학문에 뛰어나고 신학문에 뜻이 있어 개화파 박영효가 선발한 외국 유학생 명단에 올랐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박영효는 일본으로 피신했고 안태훈은 체포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피신해 재산을 정리하고 1885년 황해도 신천군 청계산 속에서 살았다. 자연스레 안중근도 신문학을 공부하고, 그의 할아버지 안인수는 진해 현감을 지냈다. 고려후기 문신이자 유학자였던 안향의 후예로서 할아버지 안인수는 대지주, 해주 일대에서 부호로 일컬어질만큼 재산도 풍족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 받게 됨 (고종은 청을 내치려고 했으나 민비는 청과 친하게 지냄)


*1884년 갑신정변 (3일천하): 개화파 김옥균을 중심으로 일어난 정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면서 조선에 대한 간섭이 시작되자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자주근대화를 위해 발발. 개화파들은 1884년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서 일본의 힘을 빌려 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3일만에 청나라 군대가 궁궐로 쳐들어오면서 일본군들은 고종을 호위하다 도망치고, 개화파들이 처형당하면서 끝났다. 백성의 지지를 받지못했다고 한다.

- 개화의 아버지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 청의 내정간섭 수용하자는 온건개화파(민비가 예뻐함, 김홍집, 김윤식, 민영익)와 메이지유신 표방한 급진개화파(고종이 예뻐함. 김옥균-안동김씨, 차관도입 실패/박영효-철종사위/ 홍영식-영의정집안/ 서광범-판서집안/ 서재필-급제자)

-김옥균과 민비의 평가: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의 1번이 청에 잡혀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는 것. 개화파를 반대한 흥선대원군은 정적이지만 국부의 아버지가 다른 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서야 어찌 자주 독립국이라고 하겠냐는 김옥균과 개인이 권력잡자고 시아버지를 다른나라 군대가 끌고 가게하는 민비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쪽으로 정치적 평가를 내려야될까?

- 금수저들이지만 2번.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관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 3번,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

-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입헌군주제/ 전제군주제 <입헌군주제를 주장>

-의정부, 6조 외 불필요한 기관 없앤다!

-세브란스 병원 (광혜원....)

**평가: 민중에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일본군대의 힘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고, 일본에 의해 돈을 빌려오려고 했다. 박수 칠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다라는 평가.


*1885년 1월 텐진에서 양국이 외교교섭을 시작했다. 이토는 일본을 대표해서 이홍장과 담판을 벌였다. 결과 조선에 주둔하던 양국의 군대는 동시에 철수하고 장래 조선에 중대사건이 있어서 두나라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군대를 조선에 파견할 경우에는 서로 문서로 상대방에게 알려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텐진조약이 체결되었다. 공동파병과 공동철병.

10년뒤,


*1894년 갑오개혁. 청일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한 강화협상. 이 결과 중국은 조선의 종주권을 포기하고 랴오뚱 반도와 타이완 및 펑후 섬등을 할양하며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하는 내용을 담은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일본에 연이은 배상금 지불하며 농민들 삶이 피폐해져서 들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민씨 집권하에 세도정권이 너무 심했다. 임오군란때 한번, 갑신정변때 두번 청나라가 민비를 살린다)

- 청일전쟁. 민비와 고종이 자신 권력 지키려고 한반도 땅에서 전쟁하라고 땅을전쟁터로 내준 왕과 왕비.


* 을미개혁 1895년

우리 중전을 일본이 죽임. 을미사변때 국모가 처참하게 시행.



*1905년 이토는 특파대사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9월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일전쟁에서의 승리가 확정된 지 약 두달여만의 일.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이토를 한국에 파견했다. 고종에게 <특파대사의 지휘에 따르라>는 일본 국왕의 친서를 전하면서 외교권 이양들의 내용을 담은 협약안을 고종에게 들이밀었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다섯대신 (을사오적) 서명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이 협약을 제2차 한일협약 혹은 을사조약(을사늑약)이라고 부른다. 이후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외국에 있던 대한제국 공사관은 모두 폐쇄된다. 황성신문 사장 겸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신문에 게재하여 국민여론에 호소했다.


*1906년 이토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스스로 초대 통감이 되고, 외교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접수공작을 본격화했다.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더욱 가속회되었다. (이상설, 프랑스 신부 발렘)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협박하여 퇴위를 강요하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한일신협약에 근거해서 부처의 차관에 일본인을 임명하도록 하여 이른바 '차관정치'를 통해 한국 국정을 한손에 장악했다. 이후 군대해산과 경찰권 위임등을 통해 대한제국을 그야말로 껍데기로 만들었다. 이렇게 대한제국에 대한 침탈은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에 의해 이토는 저격당해 사망했다. 이후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고, 당시 안중근은 한국의 용병 참모중장이라고 자처하면서 범죄자가 아니라 전쟁포로로 취급해줄것을 요구했지만 러시아 당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안중근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당시 일본이 다스리던 뤼순으로 끌려가 감옥에서 순국했다.


* 이 시기 유럽에서 독일이 신흥강국으로 대두함에 따라 이 시기에 맞서기 위해 전통적인 라이벌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았다. 러시아와 우호적이었던 프랑스의 중개로 여태까지 편하지 않던 영국과 러시아 관계도 개선되어 1907년 영러협정이 체결되었고 그 결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삼국협상 체제를 만들었다.

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동맹을 맺었는데 영국과 러시아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일본과 러시아 관계도 서서히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결과 두나라 사이 외교협상이 시작됐고 이토가 하얼빈에 간 것도 이러한 외교협상때문이다. 이는 안중근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전쟁포로로 대접받지 못한다해도 러시아법정에서 재판받을것을 기대했는데, 미국법정에서 재판받을 전명운과 장인환의 사례처럼 극형은 피할수있을거라 생각했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고나계까 개선되고 있었기에 러시아는 안중근의 신병을 곧바로 일본에 넘겨주고만것이다.


하얼빈에서 뤼순까지 끌려간 안중근 ㅠㅠ












*1910년 친일파들은 이토의 죽음에 대해 도일사죄단을 조직하고 야단법석을떨면서 사과성명을 발표하는 소동을 벌이는데 그 가운데 일진회는 합방 청원운동을전개했다. 일진회 앞잡이 노릇을 토대로 1910년 일제의 한국병합이 이루어지고야 말았다. 대한매일신보 양기탁은 이토가 죽고 축배를 들면서 만세를 불렀는데 일제당국에 그런 사람들의 리스트가 보고되었다. 안창호를 비롯한 신민회 회원들을 이사건의 배후로 몰아 대거 검거했지만 뚜렷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풀려나고, 이후 국외로 망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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