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읽는 헤드헌터 May 01. 2023

역사의 쓸모


최태성 쌤을 중고등학교때 알았더라면 나도 이렇게 역사에 무지하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책을 읽었다.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 이동방향을 그려놓은 역사책의 화살표가 그냥 단순한 화살표가 아님을, 그 시대 독립운동 단체들이 많아서 외우기 힘들어도 그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인지를 알려주는 사명감을 가진 역사선생님이 대체 몇명이나 될까. 이 책을 추천해준 나의 팀원이자, 독서모임 <한뼘>의 동지인 캐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반나절만에 책을 다 읽었다.


대단히 멋진 10명의 위인들과, 반면교사 삼을만한 2인의 인물을 정리해봤다.

정리하면서 5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 나뭇잎 하나도 푸르게 하지 못하는 갈등과 고민들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되겠다는 것.

둘째. 나도 손해보지 않고 상대방도 이롭게, 윈윈하는 협상을 해야겠다는 것.

지난날, 나의 협상은 대부분 내가 손해보는 쪽이었다. 그게 마음이 더 편했으니까. 서희와 원종을 통해 상대방은 물론 나에게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셋째, 소중한 것을 놓치지않기위해 관성대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기위해 노력해야겠다는 것

넷째, 예송문제처럼 지나고나면 쓸데없고 별것 아닌일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도록 사안의 경중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기를 것

다섯째, 삶을 던져 이루고 싶은 것, 한번뿐인 인생에서 꼭 이루고 싶은 무언가를 찾아낼 것.



역사의 쓸모는 알았으니, 이제 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제니퍼의 쓸모> 찾아나서기!!! 이책을 읽고난 후 든 결론이다.




1. 신라 문무왕때 '쇠뇌'라는 무기를 만든 장인 <구진천>.

그 성능이 엄청나서 중국에서도 구진천을 데려가려고 난리였는데, 결국 구진천은 당나라로 끌려가서 큰 화살을 멀리 쏠 수 있는 쇠뇌를 만들어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1000보보다 멀리 쏠수있는 쇠뇌를 만들어낼수 있으면서도 30보도 못가서 뚝 떨어지는 쇠뇌를 만들어냈다. '신라의 나무가 아닌 당나라 나무로 만들어서 그렇다'는 이유를 대면서. 결국 당나라는 신라에서 나무까지 들여오지만 끝내 구진천은 쇠뇌를 만들지 않았다.


2. 다재다능한 정조라인의 대표학자 <다산 정약용>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알고 괴로워한 왕이 있으니 그는 바로 정조, 다. 정조가 세력을 키우기 위해 세운것이 왕실도서관인 규장각. 정조 라인에서 대표적 인물이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의 <다산 정약용>이다. 다재다능한 정약용에게는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가 천주교인이라는 것.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인데 정약용의 집안은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정조 승하 이후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당하고 정약용또한 유배를 가고 가문은 폐족이 된다. 자그마치 18년이란 세월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그런 상황속에서 정약용은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밝혔다. 만일 자신이 지금의 생각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의 재판 기록만 보고 자신을 죄인 정약용이라고 기억할 것이라는 것. 출세의 길이 막히고 폐족이 되고 죄인이 되었다고 자포자기하지 않은 정약용은 형조에 기록된 몇 줄짜리 글로 평가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글을 남겨 후세의 평가를 받으려 했다. 정약용은 알고 있었던 거다. 지금은 죄인이지만 역사는 자신을 그렇게 기억하지 않으리라는것을. 교과서에 정약용은 죄인으로 기록되어 있나? 아니다.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기록되어 있다. 정약용이 200년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역사를 알았기에 고난을 버티며 투쟁해나갈수 있었던 거라 생각된다.


3. 신라시대 혁신가 <선덕여왕>

신라의 <선덕여왕>은 비주류인 김춘추와 김유신을 등용한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타고난 신분의 한계를 극보가기 어려운 폐쇄적인 골품제 나라에서 놀라운 사건이었다. 선덕여왕의 이런 행동은 혁신적이었다. 또한, 고구려와 당나라 싸움일 지켜보다 당나라 패배 원인이 <보급로>때문임을 알게 된 선덕여왕은 당나라에게 협상을 제안한다. 쓰디쓴 패배의 원인인 보급로 문제를 신라가 해결해주겠다며 나당연합을 제안한 것. 김춘추는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나당연합군을 막지 못한 백제는 멸망하고, 고구려또한 무너진다. 그렇게 신라는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된다.


4. 고려전기 협상가 <서희>가 있었다면

5. 고려후기에는 <원종>이 있었다!

고려의 <서희> "만약 우리가 시도도 하지 않고 적이 원하는대로 땅을 떼어준다면 만세의 수치로 남을 것이다" 서희는 후세가 어떻게 평가할지 생각해보았고, 역사가 뭔지 알았다. 당장의 목숨도 중요하고 전쟁을 피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지레 겁을 먹고 이렇게 앉아서 결정해버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던거다. 지금 결정이 분명 역사로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라고 믿었던 서희의 역사의식, 이게 정말 중요하다.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이런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서희는 협상력이 뛰어났다. 고려와 거란의 문제에 여진족을 끌어들여 완전히 새로운 프레임을 만든 것. 협상이란 윈윈할 수 있는 조건을 찾는일이다. 다짜고짜 들이밀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떼를 써도 안되고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겁을 먹고 손놓고 있어서도 안된다. 섬세한 감각을 발휘해서 상대의 패를 읽으며 상대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상대의 진짜 속내는 무엇인지를 알아차려 양쪽 모두 납득할 수 있을만한 제안을 해야한다.


고려전기에 서희가 있었다면 고려 후기에는 <원종>이 있다. 당시 몽골인의 말발굽이 지나가면 거기는 그냥 몽골 영토가 되던 시절, 태자는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겠다면서 몇가지를 요구했는데 쿠빌라이는 그것을 들어주었다. 당시 몽골의 황제 몽케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사망하여 서로 몽케의 뒤를 잇겠다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유력한 황제 ㅎ보가 아리크부카와 쿠빌라이였는데 쿠빌라이는 이후 중국에 원나라를 세우게 된다. 고려의 태자는 똑똑하고 안목이 높았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막내딸을 원종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면서 고려는 몽골의 사위나라, 부마국이 된다. 고려가 원나라로 인해 힘든 시기를 보낸 것은 사실이며 원종이후 고려 왕들은 조와 종이라는 묘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등 충자가 붙은 시호를 원나라로부터 받아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원나라의 직할통치는 피했다. 훗날 원나라가 독립성을 침해하고 속국으로 삼으려 할때마다 고려는 매번 세조구제 카드를 꺼내 '쿠빌라이가 이렇게 약속했어'하고 주장했다. 그냥 황제도 아니고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의 유지였기 원나라 황제들도 어쩔수 없었던 것. 항복을 앞둔 원종은 자포자기 했다면 고려는 몽골제국에 편입되어 끄트머리 변방 땅으로 남았을텐데 그는 될대로 되라지 포기하지 않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지켜야하는것, 얻어야 할 것을 빠르게 계산했다. 그가 기지를 발휘한 덕에 고려는 계속 자치국가로 남을 수 있었고 이는 분명 원종의 외교적 성과다.


협상가는 훌륭한 말솜씨보다 정확한 눈(정세를 파악할줄 아는 통찰력과 상대의 의중을 감지하는 관찰력을 말한다)이 중요하다. 협상이란 상대방도 만족시키고 나도 만족하는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이기에 내것만 생각해서도 상대이 것만 생각해서도 안된다, 어떤 협상 테이블이든 그 앞에 나서기 전에 서희와 원종의 외교술을 떠올려봤으면 좋겠다. 배짱을 가지고 섬세하게 상대를 관찰하면서 본인의 패를 놓지 않는다면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 되리라고 역사는 말해준다.


6. 체면이 밥먹여주냐며 국익챙긴 <장수왕>

이득을 취하고 손실은 피한, 체면대신 실속을 챙긴 <장수왕>. 위진남북조 시대, 고구려 옆에는 북위와 북연, 아래는 송이 있었다. 고구련느 조공을 이용해 모든 나라와 친선관계를 도모했다. 북위가 북연을 공격하여 북연이 망하기 일본직전, 북연의 왕 풍홍이 고구려에 망명을 요청한다.

북위는 고구려 군대가 풍홍을 데리고 간뒤에야 풍홍을 보내지 않으면 전쟁을 하겠다고 선포한다. 그때 장수왕은 납작 엎드려 북위를 살살 달랜다. "풍홍이 다시 세력을 얻는 일은 절대없다. 내가 막을테니 나를 믿어달라"고. 장수왕은 풍홍을 받아들임으로써 많은 자원을 얻었고 북위에 몸을 숙임으로써 전쟁도 피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거의 모든 문제는 체면과 실속 사이의 갈등으로 정리된다. 체면을 지키자니 왠지 손해를 보는것 같고 실속을 챙기자니 자존심을 구기는것 같다. 그럴때 장수왕을 떠올려야겠다. 겉으로 보이는것보다 더 중요한게 있다.


7. 시대적 절망감에 '역모'라 불리우더라도 파격적인 대안을 제시한 사람 <정도전>

명나라의 시대가 올거라 믿었던 친명세력 <정도전>. 그러나 공민왕은 피살되고 친원파인 고려 권문세족의 힘은 날로 세졌다. 어린나이에 우왕을 즉위시키고 정권을 잡은 이인임도 그중 한명. 이인임은 친명파 신진사대부인 정도전에게 고려에 온 북원 사신을 접대하라고 지시하지마 단칼에 거부한다. 결국 명령불복종의 죄로 정도전은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되고 유랑하는 동안 정도전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다. 어머니에게 노비의 피가 섞여있었던 것이 정도전의 약점. 정몽주도 같이 유배를 갔지만 정몽주만 복직한다.정도전에게는 천민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 불합리한 세상을 바꿔보고자 고려가 아닌 다른 왕조를 세우자고 혁명을 꿈꾸던 정도전은 고려의 영웅으로 불리던 이성계를 찾아간다.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지만 이성계또한 고려인이 후손이지만 변방에서 태어났기에 고려 조정의 관리들에게는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둘은 뜻을 합하는데 성공하면 혁명이지만 실패하면 반역, 역모가 되는 일. 주목할 것은 그는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왕과 귀족만이 사람취급받던 시대에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다. 왕 한 사람이 나라를 좌우하는 전제왕권을 경계하고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를 지향했다. 그 시대에 보기 드문 대단히 급진적이고 선진적인 사람이었다. 조선의 실질적인 설계자이기도했고.


8. 일생을 통해 백성이 잘 살수 있는 방법을 주장한 <김육>

대동법의 아버지 <김육>. 호서 대동법이 시행되고 난후 그는 "나는 학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저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줄어서 너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백성이 배고픈데 무슨 학문이 필요하냐면서 성리학이며 양명학이 다 무슨소용이냐, 백성이 잘 살아야지, 라고 주장했다. 호서대동법 시행후 대동법을 전라도까지 확산시키기 위해 상소를 올려서 대동법이 왜 시행되어야 하는지, 전라도가 왜 중요한지, 주장했다. 양반들 입장에서는 경악스러웠다. 그 아마어마한 토지에 세금을 물린다니? 70세에 사직상소를 올린 김육은 79세에 다시 유언상소를 올린다. 인생은 단한번 주어지는 것이다. 김육은 한번의 인생을 어떻게 살것인가, 라는 질문에 자신의 일생으로 답했다. 삶을 던진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준 인물이다. "나에게는 삶을 던져 이루고 싶은게 있을까?" 삶이 다 뭐 그렇지, 라는말대신에 삶은 이런거지, 라는 말로 바꿀 수 있게 삶을 살 수 있을까?


9. 한중일 삼국에서 이름을 떨쳤지만 결국 고국으로 돌아온 <장보고>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은 <장보고>. 당대제국으로 불리는 당나라는 중원은 물론 서역까지 영토를 넓혀 실크로드를 통해 여러나라와 교류했다. 그런데 사방으로 땅을 넓히다 보니 중앙의 힘이 곳곳에 미치지 못해 여기저기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당나라는 병역제도를 모병제로 바꾸고 이민족 용병을 고용해 반란을 진압하려했고, 당나라로 건너간 장보고는 이 용병모집광고를 보고 외인부대에 들어간다. 군생활이 맞는지 거기서 장보고는 승승장구한다. 아메리칸 드림에 버금가는 당나라 드림을 이룬셈. 군인으로서 능력도 입증하고 장사를 통해 재력까지 얻은 장보고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장보고 눈에 들어온것은 해적에게 노예로 팔리는 신라사람들이었다.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서라벌로 가서 신라의 왕 흥덕왕을 만난다.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내게 권한을 준다면 해적을 소탕해보겠다"고 한다. 흥덕왕은 당연히 허락하고, 장보고는 완도 앞바다에 청해진을 건설하고 이후 해적들이 잠잠해진다.

 장보고는 신라의 조정에서 보낸 염장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왕비로 앉히고자 하는 계획을 신라의 왕위 다툼을 하던 김우징과 세웠는데 김우징이 왕위에 올랐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아들세대에서도 역시나 장보고와의 약속은 무시되었다. 이로인해 신라의 조정과 장보고 사이에 다툼이 있었을거고, 장보고의 위협이 두려웠던 신라조정이 사람을 보내 장보고를 헤치운 것이다.

자신의 굴레를 탈피하기 원했던 자보고는 완전히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시도를 했기 때문에 한중일 삼국에서 이름을 남겼다.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보 다 부족한 단점을 메꾸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장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하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었기에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10. 기념비적인 청렴함으로 인해 공덕비까지 세워지게 된 순천의 사또 <최석>

고려시대 순천의 사또 <최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팔마비. 전별금이 말이던 시절, 자동차한대값이던 말을 8마리나 사또가 퇴임할때 마련해줘야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최석은 임기를 마치자 개경으로 떠난뒤, 본인이 전별금으로 받은 말 8마리에+ 그중 새끼를 낳았다면서 그말까지 포함해서 모두 아홉마리를 순천으로 돌려보낸다. 순천사람들은 이런 관리도 있다면서 기념비적인 일을 기념하려고 공덕비를 세워준다.



11. 오직 나의 안녕과 지금 이순간만 생각한 역사의식 1도 없는 <사사오입 개헌한 사람들>

<사사오입 개헌을 계획한 이들>은 '나는 학자로서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다' 라거나 '당적에 따라 당의 결정을 따랐을 뿐이다'라고 말할수있지만 이런 말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거다. 오로지 나와, 현재만을 생각한 것. 크고 작은 곳에서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들은 역사의식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개 소시민이지만 나의 선택이 타인 1, 타인 2에게 옇양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12. 관성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안일하게 대응하다 강력하고도 소중한 자신의 나라를 빼앗긴 <아타우알파>

태양의 나라 잉카의 <아타우알파>. 적에 대해 너무 몰랐을 뿐더라 알아볼 생각도 안했다. 그저 나에게는 수만의 군대가 있다. 나는 태양의 신이다. 우리는 주변 부족과 싸워 항상 이겼다. 우리는 최강이다, 라는 생각에 파묻혀있었다. 아타우알파는 관성에 따라 늘 하던대로 사고하고 늘 하던대로 행동했다. 그 안일함에 오랜 시간 쌓아온 문명이 (스페인에 의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역사의 쓸모, 중에서




다음은 책을 읽으면서 기억해두고 싶은 단락을 정리해둔 기록이다.




제니퍼가 편애하는 문장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큰획을 그었던 박정희 대통령또한 유신 헌법으로 영구 집권까지 노리지 않았더라면 그 공과에 대한 논란이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뉘진 않았을 겁니다.

역사속에서 위인으로 평가받는 사람들은 정상에서 배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러나야 할때 물러날줄 알고 잘 내려온 사람들이지요.

저는 품위있는 선택에 역사적 사고가 큰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만을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더 높이 올라가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서까지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근시안적인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

특히 지식인이나 오피니언 리더에게 역사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본인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각이나 말, 의견이 누군가의 나쁜 선택에 힘을 실어줄 수 있기 때문이죠.


제가 학교에 있을때 느낀 것중 하나가 본인이 속한 집단 안으로 시야를 좁히면 쉽게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에 학교라는 공간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주목받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중고등학교가 대학입시 위주로 운영되기때문에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은 스스로 못났다며 자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에게는 학교가 세상의 전부니까 거기서 빛을 보지 못하면 영영 패배자가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것이죠. 하지만 어디 인생이 그렇습니까? 사회에서는 학교와 다른 기준이 적용되죠. 혼자 똑똑한 사람보다는 소통을 잘하고 협력을 잘하는 사람이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고 성과를 내지요.

직장인도 조직에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면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삶의 전부라고 섣불리 결론 내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니까 말이죠.


(잉카의 아타우알파와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언급한 후)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시시때때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무론이고, 순항하고 있을때도 그렇습니다. 지금 정말 괜찮은가? 그냥 되는대로 흘러가고 있는건 아닐까? 무언가 잘못된건 없을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게 맞을까? 자꾸 물어봐야 해요. 스스로에게 질문하는것을 멈추면 그저 관성에 따라 선택하고 관성에 따라 살게 됩니다.


붕당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갈등의 씨앗은 이조전랑 자리였어요. 이조전랑은 낮은 직급이지만 삼사의 관원을 임명하는 자리였기에 중요했습니다. 누구를 이조전랑으로 미느냐에 따라 사림파는 서인/동인으로 나뉘었습니다. 이후 동인은 남인/북인으로 나뉩니다. 현종의 할아버지인 인조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이되었기에 인조대에 와서 광해군을 지지하던 북인들은 세력을 잃어버립니다. 서인과 남인이 남았는데 이들이 예송을 일으킨 두세력입니다. 예송은 예절에 관한 논란이란 뜼으로 궁중의례를 어떻게 지키느냐에 대한 싸움이었습니다. 서인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니까 당시 예법에 따라 1년동안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효종은 원래 인조의 장남이 아니었고 따라서 세자도 아니었습니다. 인조의 장남은 소현세자였습니다. 동생인 효종은 봉림대군이라고 불렸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소현세자는 청에서 접한 선진문물을 조선에 들어오려던 개혁적인 인물이었는데 그때문에 인조에게 미움을 받아요.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무릎을 꿇었던 왕입니다.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서인들이 효종이 둘째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반면 남인들은, 둘째아들이긴 하지만 효종은 왕이니까 장남에 준해서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거에요. 어떻게 왕한테 사대부 예법을 적용하느냐는거죠. 왕은 왕인데 말입니다. 현종은 상중이어기에 논쟁이 부담스러워서 그냥 예법에 따르자면서 서인의 주장대로 1년만 상복을 입기로 합니다, 이게 1차 예송인 기해예송입니다. 그런데 15년뒤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사망합니다. 자의대비는 며느리보다 어렸으니까 살아있습니다. 며느리가 죽었는데 시어머니 자의대비는 얼마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로 또다시 서인/남인이 대립합니다. 서인은 또 1차 예법에 따르자고 했겠죠. 경국대전에 따르면 맏며느리는 1년, 다른 며느리는 9개월이니까 자의대비는 9개월동안 상복을 입어야한다고 말입니다. 반면에 남인은 그래도 왕인데 장남대우를 하는것이 맞으니 맏며느리에 준하는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때 현종이 열을 받습니다.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 시작된거죠. 서인들이 자꾸 사대부 예법을 들고나오면서 아버지를 적장자가 아닌 사람으로 취급하니까 기분이 나쁠수밖에 없죠. 태어난 순서가 아니라 정통성에 관한 문제인겁니다. 아버지의 정통성이 위협당하면 본인의 정통성 역시 흔들리게 되니 예민한 문제일수밖에 없죠. 현종은 결국 1차때와 달리 이번에는 남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효종이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를 계속해서 들먹이는게 싫기도했거니와 나는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위를 가진 우암 송시열과 그가 이끄는 서인을 압박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2차 예송직후 현종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뒤이어 14살 어린나이로 숙종이 왕위에 올랐지요.

즉위한 숙종은 송시열의 제자에게 아버지의 행장(죽은 사람의 일대기 적는글)을 짓는 일을 맡깁니다. 예송에 대해 기록해야하는데 송시열의 제자는 자신의 스승에 대해 쓰는것이 걸려서 적당히 쓰려는데 숙종이 하나하나짚었습니다. "송실열이 잘못 인용한 예법"이라며 예송에 대한 기록을 쓰게 하자 제자는 송시열과 사제지간인데 이것은 제자된 도리로 못할짓이라고 상소를 올리니 숙종이 불같이 화를내며 도성에 쫓아내버립니다 "스승과 제자사이의 도리만 있고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없단 말인가!"함녀서 말이죠.조선역사상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은 군주가 바로 숙종이거든요. 장희빈을 사랑한 로맨틱한 왕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건 드라마가 만들어낸 이미지입니다. 숙종의 미움을 받은 송시열은 결국 유배되고 사약을 받아 죽습니다. 상복을 몇년입느냐는 문제가 참 오랜 시간동안 조선의 조정을 시끄럽게 한 셈입니다.

임진왜란가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거치면서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고 백성을 챙겨야할 양반이 가장먼저 도망치면서 창피한일이 발생했습니다. 백성들에게 면이 안섰던 양반들은, 자신들 스스로 성리학 질서를 깨버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무너진 예법을 예송으로 다시 자리매김하자면서 예송문제를 확산시킨겁니다. 예송에는 이런 목적과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350년이 흐른 지금, 예송을 바라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러 논쟁거리가  있습니다. 입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른사람 사이에 살벌한 말들이 오가지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게 그만큼의 에너지를 쏟을 정도로 우선순위에 있는 일인지말일죠. 과연 100년뒤 우리 후손이 이 대립을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할 것인지, 혹시 우리가 예송을 싸늘하게 바라보듯 우리의 쟁점도 쓴웃음 짓게 만드는 문제가 아닌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처에 갈등요인이 널려있는 현대사화를 사는 우리에게는 당면한 문제에 나의 온도를 몇도로 맞출것인지 조절할줄 아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서인과 남인의 이념 싸움처럼 허무한 싸움에 나의 열정을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나의 뜨거움이 많은 사람에게 자유와 행복을 선사하는 의미 있는 것이라면, 역사의 수레바퀴가 향하는 곳으로 힘을 더하는 일이라면 더욱 온도를 높여뛰어야 하죠. 필요에 따라 더 차가워질수도 반대로 더 뜨거워질수도 있도록 의지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 저는 이런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것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와 행복을 끌어당기는) 말의 알고리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