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 두번째 책
학부생 시절에는 공강/휴강에 열광했다. 빨간날이라 학교에 안가도 되는 주간에는 한달전부터 설레였다. 그런데, 대학원에 오니 휴강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지난학기에 나는 매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기분으로 화요일을 기다렸다. 허태균 교수의 <사회적 판단과 착각>수업과 토론이 너무 좋았고, 급기야 종강하기 2주전부터 집에 가는길에 아쉬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데 다행히, 이번학기에도 나를 즐겁게 만드는 수업이 생겼다! 역시나 화요일 2교시, 박선웅 교수님 시간인데 하필 간담회며, 개천절이며 이런저런 행사와 휴일이 화요일에 몰려 이래저래 수업을 벌써 두번이나 못하게됐다. 얼마나 아까운지. 다음주에는 수업이 없으니까 그 시간에 교수님 책을 읽으려고, 책을 샀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오늘 다 읽고 말았다.
심리학 교수들 모두가 MBTI 를 비과학적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지만 이미 MBTI 식 대화에 익숙해진 MZ를 비롯한 우리들에겐 MBTI가 아니라면 그 대체제 같은게 필요했다. 박선웅 교수님은 MBTI 대신 <서사정체성>이라는 대안을 제시해주셨다. MBTI가 문제라면 대안은 무엇인가, 에 대해 고민해보셨는데 교수님이 내린 결론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서사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의 당신의 모습에 이르게 된 결정적 경험이 무엇인가?
지금의 내모습은 무엇인가? 회사에선 잘나가는 상사인데 집에가면 존재감 없는건 아닌지? 내러티브라는게 단지 정체성뿐만 아니라 여러군데 사용될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는 자신을 제일 잘 대변할 수 있다.
by 박선웅 교수
지금의 나의 모습에 이르게 된 결정적 경험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는데 쉽게 그 사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결정적 경험>을 찾기에 앞서 '지금의 나의 모습에 이르게 된 결정적 경험이 무엇인지' 부분에서 <지금의 나의 모습>에 대한 규정부터가 어려웠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어떤거지?
나는 나를 잘 아는 편이고 자기 객관화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타인에게서 그런말을 자주 듣는 편이고. 그런데 교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이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어제 읽은 조민의 책 <오늘도 나아가는 중입니다>를 읽으면서 조민은 자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됐다. 근거없이 밝은 사람. 하고 싶은것과 하기 싫은게 명확한 사람. 다름사람이 아무리 맞다고 해도 내가 <아니>라고 명확하게 자신의 옳고 그름이 있는 사람.
조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겠지만 조민을 바라보는 조민 스스로의 시선과 조민의 가장 친한 친구와 그의 가족들 기준으로 조민을 평가하자면, 조민은 자기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약한 사람을 돌봐주고 싶어하고, 편견이 없는, 아주 멋진 청년이다.
자신이 마주한 고통과 파도를 피하지 않으며 파도를 거슬러 헤쳐나갈 준비가 되어있고 심지어 그 파도를 즐기려고 노력하며, 무엇에도 휩쓸리지 않은 채 자신만의 속도에 맞춰 자신의 흐름을 찾아가려는 아주아주 건강한 삼십대.
그렇다면 제니퍼는 어떤 사람일까?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면 나는 내책에 어떤 여덟장면을 넣어야 할까.
(자신의 삶을 하나의 책이라 생각하고 총 여덟장면, 즉 최고점, 최저점, 전환점, 가장 빠른기억, 중요한 유아기 기억, 중요한 청소년기 기억, 중요한 성인기 기억 그 이외에 개인적으로 중요한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면 된다고 책에 쓰여있다)
책에서 언급된 8가지 카테고리의 도움을 받자면 일단 제니퍼의 책은 대략 이렇게 구성될 것같다.
1. 남자아이를 바란 집에서 딸로 태어난 비애, 나라는 아이에 대한 거부감으로 둘러싼 척박한 환경에서 조금은 슬픈 어린시절을 보냈다.
2. 환영받지 못한 아이라는 생각때문에 뭐든지 성실하고 열심히,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3. 내향적이면서도 자존감이 높지 않았던 아이의 좌충우돌 청소년기, unfair함에 반항심이 컸던 질풍노도의 시기에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의 차별에 저항하며 모난 모습을 보이기도했다.
4. 하나님을 만나고 교회에서 교사라는 직분을 담당하면서 나 자신이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5. 폐암으로 아빠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엄마도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병원에서 엄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일이 많아지면서 아들이 아니라 딸로 태어난 이래 어린시절 내내 인정받지 못해 상처받은 부분에 대해 엄마와 많은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엄마로부터 사과를 받으며, 또 엄마의 삶도 녹록치 않았음을 이해하게 되며 어린시절 상처받았던 마음이 많이 위로가 되었다.
6. 첫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하면서 나에게 부족한 부분인 영어에 대한 갈급함으로 영국 유학을 감행한다. 그 시절 첫사랑을 만나 사랑을 하면서 낮은 자존감이 나의 사랑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했고 다시 좋은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사랑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내마음이 중요하다는걸 가슴아린 이별을 통해 배웠다.
7. 현재의 회사에 입사해서 10년간 성실하게 일함으로 인해 대표님과 동료로부터 인정받고, 주 2회는 원하는 학교에서 동경하던 심리학을 배우고 있는 지금이 아마도 내 인생의 전환점이 아닐까싶다.
8. 심리학과에 진학하고 심리학 상담을 통해 내가 본투비 내향형인간임을 확인받고 내가 편안하게 느끼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환경은 다수와의 만남이 아닌 친밀감있는 소수와의 만남임을 확인받게 되었고,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이유로 자제했던 감정표현에 대해 솔직하고 담담히 내 감정을 바라보고 그 감정을 흘려보내야 한다는것도 배우게되었다. 조직심리학과 리더들의 정서지능, 자기이해와 리더십과 같은 커리큘럼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었는데 제일 먼저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위로하게 되는 것 같아 너무도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내 인생의 최고지점은, 심리학 대학원에 입학한게 아닐까 싶을정도다. 인생의 큰 결정을 상담해도 좋을 멋진 교수님들을 만난것도 그렇고. 박선웅 교수님같은.
자신의 삶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돈을 많이 벌고 직장에서 성공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실용서를 읽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 자체가 숭고한 목적이라면 삶에 의미를 불어넣을 수 있는 인문학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이창동의 영화 <버닝>에서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와서 두가지 종류의 굶주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부시맨에게는 두가지 굶주림이 있는데 하나는 육체적으로 배가 고픈것이고(리틀헝거),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려 이쓴 것이라는 내용이다. 포스트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깊고 극심한 고통에 빠뜨리는 고통에 빠뜨리는 방법은 의미없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중략) 하루종일 아무런 의미도 재미도 없는 일을 하면서 시계만 바라보고 사는 삶이 절대 만족스러울리 없고 행복할리 없다. 일에서 얻을 수 없는 재미와 의미를 여가 활동을 통해 보충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오염구조로 말하는지, 구원 구조로 말하는지는 정신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참여자들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책이라 생각하고 총 여덟장면, 즉 최고점, 최저점, 전환점, 가장 빠른기억, 중요한 유아기 기억, 중요한 청소년기 기억, 중요한 성인기 기억 그 이외에 개인적으로 중요한 기억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결과는 오염구조로 말하는 사람들은 우울도가 높았고 구원구조로 말하는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가 높았다. (중략) 인생이야기는 단순히 삶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그 일을 어떻게 해석하고 자신 안에 품는지를 둘러싼 이야기다.
밀란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간은 오직 한번 살기 때문에 자신이 내린 삶의 결정들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아닌지 확신할 방법이 없고,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없는 삶이란 깃털처럼 가볍다는 말을 했다.
결국 좋은 인생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좋은 인생을 살아야만 하고, 좋은 인생은 좋은 인생 이야기를 통해 완결된다.
워라밸. 나는 이 말의 취지에는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워라밸이라는 표현 자체는 그리 달갑지 않다. 일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깨어있는 시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일을 소외시켜 삶과 대척점에 둔다면 좋은 삶을 영위하기는 쉽지않다.
자신의 삶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돈을 많이 벌고 직장에서 성공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실용서를 읽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 자체가 숭고한 목적이라면 삶에 의미를 불어넣을 수 있는 인문학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많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그리 즐겁지 않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유진은 아주 외향적인 사람은 아닌 듯하다.
자존감은 패러독스이다.
자존감이 필요한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
_리처드 라이언과 커크 브라운-
목적지가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아니다
_몽테뉴_
인간미 넘치는 학자.
직장인의 애환을 이해하는 교수.
비싼 학비 아깝지 않도록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저자의 바람은, 이 책을 읽은 이들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기를, 그게 부담된다면 적어도 정체성이라는 세 단어를 기억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다른 독자들도 그랬겠지만 나역시 이 책을 통해 내 이야기를 <구원구조>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어떻게 내 이야기를 써내려가면 좋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조민의 책에 이어 오늘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어떤 기대감 같은게 몰려왔다. 어쩌면 이제 나도 내 오래된 숙원사업이자 나의 꿈인 내 책, 을 쓸 수 있지않을까 하는. 2025년 2월, 대학원 졸업기념으로 논문대신 나는 내 책을 한권 써볼 작정이다.
나의 결심으로 저자가 조금은 뿌듯해졌기를,
따뜻한 시선을 가진 저자의 두번째 책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