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노치원에 다녀왔다.

by 책읽는 헤드헌터




2023년 10월 8일

유치원 갔는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수진이가 애원하니까 한번가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권하고 동네서 운동해야지. 런니머신만 있어도 (좋았을텐데)

(엄마의 일기를 읽어주자 큰언니는 말했다. 내가 은제? 내가 은제 애원했어? ㅎ)


다음날

지금 은숙이마저 떠났다.

마음이 허전하구나.

평생같이 살것도 아닌데

마음약하게 먹지말자,애심!



어제 새벽 두시에 양평에 내려왔다. 오늘 나에게는 미션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를 <주야간 단기보호센터>에 모시고 가서, 간단한 서류 작성하고 사인하는 것.

이 일을 도맡아 하는 1번+3번 혹은 4번 언니가 오늘 모두 다른 일정이 있어서 4순위 담당자인 내게 이 일이 배정됐다(내게는 위로 언니 4명이 있는데 편의상 번호로 호칭하고 있다.나는 5번이고, 번호의 끝이다).


나이 마흔넘어 올라온 아토피때문에 최근 한달간 잠을 잘못잔탓에 오늘 늦잠을 잤다. 10시에 가야한다는걸 알았다면, 그시간보다 미리 가서 기다렸을텐데 미처 메세지를 확인하지못하고 알람도 끈채로 (토요일이니까!) 화장실때문에 들락날락하는 엄마의 인기척을 느끼면서 계속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때마침 걸려온 4번언니 전화.


"잘 도착했어?"

이 아침에 대체 어딜? 웬 뚱단지 같은 소리인가 했다.


"오늘 엄마 서류 사인하러 가는 날이잖아. 10시까지"


오전 7시에 어설프게 잠이 깼을때 엄마랑 점심밥 맛있게먹고 점심후에나 찬찬히 나가자, 약속해서 늑장을 부렸는데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니! 게다가 10시??


그러나, 이미 9시 55분이었다.

폐끼치기 싫은데 이를 어쩐다.


가본적은 없지만 대략 위치는 알고 있던터라 일어나서 부랴부랴 양치만하고 엄마와 길을 나섰다.

10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죄송하다는 메세지는 담당자분에게 먼저 드려놓고서.

초보운전자니까 엄마는 서둘지 말라고, 했는데 서둘러졌따.

어제 양평오는길에 연료부족 경고등도 떠서 걱정이 됐는데, 기름을 넣고가기엔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고. 그냥 가려니 찜찜하고, 와우. 아침부터 혼비백산이다.



주야간 단기보호센터에서

안내받은 다섯가지 사항들

그렇게 당도한 주야간 단기보호센터.

길치답게 노인요양보호센터와 장애인센터를 번갈아 오가면서 헤매다가 극적으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단기보호센터를 찾을 수 있었다.


안내를 받아 담당자분들께 설명을 들으면서 언니들에게 전해줄 것들을 메모 해두었다.


1. 주 1회 요양보호사님들이 목욕 서비스를 해준다는것 (무료로!)

이게 제일 좋았다. 벌써 30년전에 아빠가 손수 지은 단독주택에 살고있는 엄마는 겨울엔 특히 너무 추워서 씻는걸 두려워했는데, 미끄러워질까도 염려도 됐고. 주1회 요양보호사의 손길로 씻을 수 있다니! 엄마처럼 거동이 편치않은 노인분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2. 아침 8시 37분에 집에서 센터 차량에 탑승하면되고 4시 40분에 그 차로 집에 오면된다.

첫주는 적응기간이 필요해서 3시에 집으로 돌아가겠냐고 물으시더니, 엄마는 적응기간 필요없을 것 같다고 그냥 첫주도 원래대로 4시 40분에 일과를 마치는걸로 이야기 나누었다. 뭐든지 척척척 대답 잘하는 우리 엄마. 걱정할게 별로없다. TMI 가 걱정이라면 걱정인데 어쩌겠는가. 집안 내력인 것을.


3. 미끄럼 양말, 요실금 팬티, 지팡이 등은 장기요양등급 서류 보여주면 할인해서 구입할 수 있으니 남한강마트 근처에 있는 신기의료기?로 가보라고 했다.

근데 엄마는 한사코 그런 지팡이는 필요없다고해서, 구입은 안하고 집으로 왔는데 이건 언니들과 상의해봐야한다.


4. 욕실, 주방, 잠깐 쉬는 병원용 침대, 수업받는곳, 휴게공간을 둘러봤는데 모두 깔끔하고 청결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운동기구가 없다는 것. 매일 5시에 집에와서 집앞에 산책하는 루틴은 유지해야한다고 엄마에게 돌아오자마자 일러두었다. 엄마도, 그러마,했는데 지켜질지 모르겠다. 원체 운동싫어하는 우리 모녀...운동을 하고나면 그렇게 개운하고 기분이 좋을수가 없는데 하러 가기까지 몸이 왜 그리 천근만근인지. 오늘은 운동을 쉬어야할 수백만 가지 이유를 만들어낸다. 비가 와서, 애들이 와서, 추석에 사람들에게 뒤뚱뒤뚱 걷는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감기기운이 있어서, 어제 잠을 잘 못자서 등등등.


5. 끝으로 간단한 인지검사 후 환자+보호자 서명을 하고 모든 절차가 끝이났다.

인지검사를 하는데 올해가 몇년도냐는 질문에 엄마는 모른다, 고 했고 10월인데 9월 26일아라고 말했다. 철수가 자전거를 타고 11시에 수영장에 갔다, 라는 문장을 따라하라고 했을때는 곧잘 따라했는데....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엄마는 뇌경색으로 뇌의 일부 부분이 손상되기 이전에도 지금 사회복지사가 물어보는 이런저런 것들을 잘 몰랐다. 잘 아는것도 공부, 라는 개념으로 묶이면 얼어붙는 엄마.

사회복지사의 질문 대부분에 틀린답을 하는 우리 오마니. 엄마의 뇌 손상과 가벼운 치매가 원인이 아닌 것을 나는 안다. (엄마도 나도 알지만 그들은 모르는 것이다. 하하하!!!)



매주 토요일 행복한 점심 한끼

간단한 인지 테스트에도 밑천이 드러날세라 두려움에 떨었던 엄마를 모시고,

집으로 오는길에 엄마가 좋아하는 족발을 샀다. 두시전에 가야 get 할 수 있는 양평내 인기족발 (구 길병원 맞은편인데 청년들도 친절+싹싹하고 냄새도 안나고 우리집 사람들, 특히 내가 즐겨찾는 곳이다)!!


족발을 싣고, 다음주가 중고등학생들 시험이라 주말에도 학원으로 출근하는 4번언니를 위해 언니가 좋아하는 빵집에 들러 산딸기 바게트, 휘낭시에, 바질스콘, 달걀잔뜩들어간 에그 뭐시기빵, 꽈배기 등등을 사서 학원에 배달해주었다. 빵순이 언니의 잇몸이 만개되는 것 보니 내 마음도 세상 행복.


그나저나 오늘은 1번 언니가 유사나 세미나에 간 날이라 엄마랑 나랑 단둘이 점심을 먹어야 한다.

뭐든지 대강대강 대충대충인 두사람의 오늘 점심식사는 과연...

센터 가기 전에 엄마가 미리 냉동실에서 꺼내놓은 돼지갈비를 약불에 오래오래 구웠다. 원래도 없지만 요리할때도 물론 인내심따위는 없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아 최대한 약한 불에서 돼지갈비를 은근히 구웠더니 꽤 흡족한 결과가 나왔다. 아주 살짝...아주 조금 탓지만 아주 맛나게 익었다! 야호!!


엄마는 그 사이 검은 콩 넣고 몸에 좋다고 요즘 꽂혀있는 율무를 넣어 새밥을 지었다.


2번언니가 보내준 양념게장과, 교회에서 받은 김과 오늘 사온 족발을 한상 차려놓고 보니 그래도 나름 구색이 갖춰진 것 같았다. 다 맛있긴 했지만 오늘 제일 맛있었던 건 역시나 우리 4번 언니가 고추 짓이겨 만든 고추 다대기+ 엄마가 지난주에 볶아준 볶은김치 두가지다.


늘 집밥만 드시는 엄말 위해서 주1회 한번은 외식을 해도 좋으련만, 주중에 늘 외식하기 때문에 주말이라도 엄마나 언니들이 손수 만든 반찬에 집착하게 된다. 제일 속이 편하고 맛있는 건 엄마랑 언니의 음식들이기 때문에.


달짝지근하고, 뭔가 뒷맛이 깔끔하지 않고, 먹고나서도 냄새가 지속되고, 가려움증과 재채기를 유발하는 음식점 음식들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피하게 된다. 빵과 튀김류, 치킨은 아직도 유혹적이기는 하나 이번에 올라온 아토피 핑계대고 그런것들로부터 거리를 좀 둬볼 작정이다. 지난주에는 친구가 좋아하는 닭똥집 튀김을 포장해갔는데 하나도 먹지 않았다. 어제는 친구들이랑 치킨을 먹을까, 기름에 튀긴 삼겹살을 먹을까 고민했는데 튀긴것 제외하고 먹자고 제안해서 대구탕을 먹었다. 두번의 고비를 넘긴 나 스스로를 칭찬하며 앞으로도............사회생활에 방해될지라도 (심지어 먹고싶어지더라도) 아토피 핑계대면서 밀가루+ 튀김 같은 것들을 좀 자제해야겠다.

(그런데 오늘 김부각과 한과를 폭풍흡입.....했....)


이사가면, 밥 더 잘 해먹어야겠다, 생각했다.

언니한테 나물하는 법도 배우면서.


아침에 부지런을 떤 덕분에 이제 겨우 낮 한시 45분이다. 오예!!

엄마도 산책가고

언니들도 세미나로 집을 비우고

밤새 집 지키느라 잠을 설친 개들도 돌에 턱을 괴고 잠든 고요한 토요일 낮.


추석에 엄마랑 가파도에 다녀온 친구가 사다준 보리차 한사발(ㅋㅋㅋ) 타서

조금 쌀쌀하지만 내게 너무도 사랑스런 우리집 앞마당에 나가서 책 한권을 읽어볼랍니다. 오늘은 허캐로로가 빌려준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라는 책.

작가의 문체나 생각이 나랑 비슷하다고 추천해준 책이라 기대만발이다.


아뿔싸.

그런데 배고프다며 큰 조카가 찾아왔다.

밥을 차려줘야한다...

평화로운 시간 끄읕.......



1. 오늘의 미션 카드 2. 사회복지사의 인지 체크 질문에 긴장한 최토끼씨 3. 테스트 마치고 홀가분하게 걷는 엄마





노치원 입학전에 필요한 서류들


우리가 챙겨간 서류와 챙기지 못한 서류를 나누어서 표를 그리고 싶은데 브런치에는 표를 그리는 양식이 없...


1. 건강진단서 (한달 이내)

2. 코로나 검사 결과지

3. 의사 소견서 (주요질환 병명)

4. 처방전(현재 복용중인 약에 한해)

5. 가족관계 증명서 (엄마 기준으로)

6. 주민등록등본 (양평 거주지 확인용)

7. 기초수급자인 경우 증명서

8. 장기요양인정서 (엄마의 경우 장기요양등급 4등급)

오늘 내가 놓친건 처방전, 다음주에 노치원가는날 챙겨가야 한다. 잊지말것!


[당일에 챙길 것들]

* 평소 드시는 약 (처방된 약)

* 여벌옷, 잠바 등

* 수건 3장 (3장씩이나?)

* 실내화 (하얀색 운동화 모양)




에필로그

태어나는 아이들보다 노인들 인구가 많아서 유치원이 노치원 된다는 즈음, 엄마는 노치원에 등록했다.

엄마보다 인지능력 부족하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 친구들이 집보다 더 좋다며 센터에서 즐겁게 지내시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모든 자식이 그러하듯 나또한 우리 엄마가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 싶었지만, 집에서 하루종일 혼자 계시는것보다는 색칠공부도 하고 만들기도 하고 대화도 나누는 공간이 있는게 낫겠지싶어 언니들과 결정한건데 그곳에서 엄마의 월화수목금이 조금 더 활기찼으면 좋겠다.


한주 가보고, 영 시원찮으면 때려치지, 뭐.


노치원 입학당시 엄마의 다짐대로 엄마는 첫날 바로 노치원을 때려쳤다.

표면적인 이유는 애먼떼먼 동네를 다 돌아다니다 내려줘서 멀미를 심하게 했다는 것이었는데 엄마도 더 노화가 시작된 분들사이에서 엄마는 도망치고 싶었던게 아닐까싶다. 나이듦이, 약해짐이 옮겨지기라도 할까봐서 화들짝 놀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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