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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Dec 30. 2023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 불안하고 소란한 세상에서 



내년 5월에 첫 출산을 앞둔 캐롤이 '팀장님이 쓴 글 같다'면서 추천해준 책이다. 


'조용하고 할말많은 내향인의 은밀한 자기돌봄' 이라는 책 설명을 읽고, 모호연 작가의 <반려물건>을 읽었을때처럼 '어쩌면 이렇게 생각의 흐름이 나와 비슷할까' 라는 느낌을 받을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아니었다. 이윤주 작가의 글에서는 교열기자+ 출판사에서 일한 경력이 더해지면서 '남다른 문장' 혹은 '다른사람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직업의식같은게 느껴졌다. '슬리퍼소리가 정적을 갈랐다'라는 표현같은 것도 '일반인'인 내게는 조금 어색하게 다가왔다. 








편애하는 밑줄

박완서 선생이 소설가로 한창 활동하던 때 대학을 갓 졸업한 아들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알려져있다. '참척'이란 단어를 그때 처음 알았다. 선생이 참척을 당하고 모든 작품활동을 중단한채 홀로 토해낸 일기가 발표됐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중략) 선생이 아들이 사고로 떠난 직후 올림픽이 열렸다. 인생에서 가장 깊은 어둠에 내던져진 때에 유례없는 국가적 도파민의 공격을 받고 선생은 '미친년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했다. (중략) 선생이 서문에서 말했듯 "훗날 누가 읽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같은 것을 할만한 처지가 아닌 상황에서  통곡대신 쓴 것" 쓴 글. 이런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은 없다. 글쓰기는 자의식에서 시작하므로 '어느정도의 제정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내가 약자였을때 목격한 폭력을, 처지가 좀 나아졌다고 외면하지 말아야지.

남의 개소리가 듣기 싫으면, 나도 개소리 하지 말아야지.


내속엔 애와 개가 있어서

애도 개도 키워본적이 없는 내가 자녀 교육 전문가와 개훈련 전문가의 영상을 꼬박꼬박 찾아보게 될줄이야. (중략) 강형욱 훈련사는 한 인터뷰에서 "강아지 훈련사라고 속이고 가서 사람을 교육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오은영 박사는 아이를 진단하는 동시에 부모를 진단하고 아이를 훈육하는 동시에 부모 의 행동을 바로 잡는다. (중략) 오은영 박사를 만나려면 1년은 대기해야 한다고 들었다. 강형욱 훈련사는 아직은 네발로 다니는 동물만 다루고 있다. 


끼니는 그저 반복되는 것이지만 반복되기에 강한 것이다. 따뜻한 한끼는 많은 순간에 어떤 사람을 일으키거나 버티게 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좀 늦게 알았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고작 먹는일 따위가 아니라 무언가 더 추상적이고 '원대한 감응'일거라고 오랫동안 믿었지만 마음이 비맞은 새처럼 처량한 날에 나를 다독여준것은 원대한 감응이 아니라 멸치육수가 진하게 우러난 잔치국수였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반복되는 한끼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다가....(생략)

비맞은 새가 처량하다는 것은 철저하게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이 아닐까? 비맞은 새의 심정이 정말 처량할까? 오랜만에 샤워하는 듯 시원하게 느껴지는 않을까? 


당신의 경우 '고독한 행복' 이 언제 변질하기 시작하여 '고립된 절망'으로 변형되는가?
하루가 지나면? 열흘? 한달?
세상을 차단해버리고 싶은 충동은 언제 닥치며, 그 진정한 동기는 무엇인가?
당신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낫기 위해서인가, 숨기 위해서인가?
_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 중에서 

이윤주 작가의 책을 통해 만나본 '캐럴라인 냅'의 글에서 나를 돌아본다. 입버릇처럼 '혼자있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 고독한 행복은 이내 고립된 절망으로 변형되리란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고작 며칠이 지나면 세상을 차단해버리고 싶은 충동과, 혼자있고 싶은 열망은 사그러들텐데. 그러나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이유다. 결코 숨기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세상에 나와 어울렁더울렁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기위해 숨을 고르는 행위일 뿐. 고독한 행복과 고립된 절망이란 개념을 알게 해준 캐럴라인 냅의 책을 한번 읽어봐야겠다. 



에필로그 

27살때 네이버 블로그에서 <27살의 치유록>이란 글을 연재한 적이 있었다.

첫사랑과 헤어진 후 매일매일이 너무 괴로웠던 그때, 그에 관해 우리에 관해 무엇이라도 쓰지 않고서는 견딜수없어서 글을 썼었는데 훗날 그 글을 치유록이라 명명했던 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의 고통이 치유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김지은입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조국의 시간> 같은 글들은,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아픔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들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다가온다. 나의 아저씨 이선균의 황망한 죽음앞에서, 고인의 대한 안타까움 못지 않게 남겨진 가족에 대한 걱정이 든다. 그의 배우자와 아들들도 사랑했던 남편과 아빠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면서, 생애 마지막에 남긴 오점보다 더 진하고 깊은 그리움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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