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성냥팔이 소녀>
입술이 바싹 마르는 가뭄에 벌써 3년째 시달리던 해였다. 여름엔 더위에 흐르는 땀마저 마를 정도로 건조했고, 겨울엔 눈조차 내리지 않을 만큼 이곳은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푸른빛의 대지는 하루가 다르게 생명력을 잃어 황량한 죽음의 땅으로 싸늘하게 변해갔다. 날이 갈수록 비어 가는 식량창고와 지칠 줄 모르는 뜨거운 햇빛에 마을 사람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휴, 어떡하죠? 올해가 지나면 창고가 동이 날 텐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떻게든 최소한의 농작물이라도 길러내야 버틸 수 있을 텐데.. 다 모조리 말라죽어서 씨앗 하나 찾기 힘드네요."
"남아있는 물조차 동나기 전에 빨리 손을 써야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손부채질을 해가며 대책 없는 비상회의를 시작했다. 방에서 흘러나오는 시끌벅적한 웅성거림과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아지랑이가 형체 없이 뒤섞이며 텅 빈 거리를 메워나갔다. 그리고 그 거리의 한구석, 손바닥을 겨우 가리는 그늘 아래, 한 가엾은 소녀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빨갛게 익은 두 볼과 상처로 가득한 맨발을 숨기려는지, 소녀는 고슴도치처럼 움츠리고 있었다. 고슴도치와 다른 점이라면 소녀에겐 가시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가시라도 박혀있는 듯, 사람들은 좀처럼 소녀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그늘이 닿지 않아 스스로의 어깨를 감싸 안아야만 했던 소녀의 손은 따갑기만 했다.
소녀에겐 가족이 없다.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소녀는 혼자가 되었다. 성냥 한 갑과 끊어질 듯 녹이 슨 목걸이만이 소녀가 간직할 수 있는 할머니와의 유일한 추억으로 남았다. 성냥 한 갑은 지난겨울에 다 써버렸으니, 소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 목걸이뿐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목걸이는 절대 팔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이미 오래다. 잿빛의 목걸이를 매만지자, 소녀는 차가운 것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소녀의 눈물이 깡통의 바닥을 적시는 '톡, 톡' 소리만이 거리 한 구석을 오랜 시간 맴돌았다.
노을이 질 때쯤 소녀가 깡통을 집어 들고 거리로 나섰다.
"눈물 사세요, 눈물 사세요."
질긴 가뭄에도 마를 날이 없던 소녀의 눈물은 소녀가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소녀가 찰랑거리는 깡통을 내밀었다. 하지만 동네 식량이 바닥을 보이자, 더 이상 소녀의 눈물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 누구도, 소녀의 눈물을 본채 하지 않았다. 부서질 듯, 위태롭게 소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만이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한참을 걷던 소녀는 말라 굳어버린 흙 위에 털썩 앉았다. 목이 타는 것 같은 갈증과 오랜 배고픔에 소녀는 더 이상 일어설 힘 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소녀는 조심스레 목걸이를 풀어 눈앞에 들어 올렸다. 눈높이와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자 목걸이는 그제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할머니가 해주신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가야, 이 목걸이는 특별한 힘이 있단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 진가를 알 수 있지. 무릎을 굽혀 너와 눈을 맞출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네 목에 걸린 목걸이의 가치를 알 수 있을게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거든, 목걸이의 구슬을 빼어 햇볕이 잘 드는 땅에 함께 묻거라. 남을 돕는 따듯한 마음이 가져다주는 선물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게다."
하지만 1년을 지나도 목걸이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소녀를 불쌍히 여겨 위에서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는 사람은 더러 있었지만, 자세를 숙여 소녀와 같은 눈높이에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 누구도 가엾은 소녀를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목걸이를 쥐고 있었는지, 소녀의 손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뻐근한 손을 풀어보려 소녀는 자신의 눈물이 담긴 깡통에 손가락을 담가보았다. 손끝부터 느껴지는 시원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갑자기 소녀의 주변에 반짝이는 계곡물과 떼를 지어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나타났다. 할머니와 예전에 고기를 잡으러 나왔던 계곡이 틀림없었다. 시원한 바람에 소녀의 머리카락이 춤을 추듯 저마다 휘날렸다. 고개를 들어 해를 바라보았다. 뜨겁기만 하던 해가 따듯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얼마만이던가. 신이 난 소녀가 계곡물에 풍덩 뛰어들려던 찰나, 시원했던 손가락이 금세 미적지근해졌다. 주위에는 금이 쩍쩍 간 흙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소녀는 이번에 깡통에 손 전체를 담가보았다. 그러자 풍덩! 하며 기분 좋은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온몸을 감싸는 상쾌함이 느껴지자 소녀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울퉁불퉁한 바위들을 방석삼아, 쪼르르 흐르는 계곡물을 이불 삼아 누워있자니 온 근심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발에 가득했던 상처들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물고기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아차! 빨리 고기 잡아서 할머니랑 집에 가야 하는데! 소녀는 그물을 찾으러 벌떡 일어났다. 물에 흠뻑 젖었을 옷을 힘껏 짜내려는 순간, 소녀는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멈칫하며 내려다보니, 소녀의 옷은 먼지로 뒤덮인 한 여름에 버려진 신문지처럼 빳빳했다.
소녀는 깡통 속의 눈물을 옷자락에 조심스럽게 조금 부었다. 그리고 눈물을 흠뻑 먹은 옷자락을 다시 한번 힘껏 짜냈다. 뚝뚝 떨어지는 물의 감촉에 슬며시 발을 내려다본 소녀는 까르르 웃었다. 놀아달라는 듯, 물고기들이 소녀의 발등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성큼성큼 물살을 헤치고 계곡 건너편에 다다른 소녀는 그물을 집어 들었다. 소녀의 작은 손에 딱 맞는 것이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준 그물임이 틀림없었다. 갑자기 힘이 솟은 소녀가 이리저리 바쁘게 돌을 옮기며 그물을 설치했다. 끝났다! 이젠 시원한 수박을 먹으며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할머니에게는 비밀이었지만, 소녀가 흔쾌히 낚시를 하러 나오는 이유는 과즙이 가득한 수박을 먹기 위함이었다. 할머니를 찾으러 가기 위해 소녀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은은한 꽃내음이 가득한 바람이 휭 불었다. 소녀는 잠시 눈을 감고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땐 바람도, 꽃향도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마지막으로 소녀는 깡통 속의 눈물을 그대로 몸에 쏟아부었다. 그러자 멈추었던 바람이 다시 불고, 그 바람을 타고 온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야, 새참 먹어야지. 오늘은 이 할미가 특별히 수박 말고도 사과, 참외, 딸기, 포도도 가져왔단다. 그동안 배 많이 고팠지? 이거 다 먹고 할미랑 좋은 곳으로 가서 푹 쉬도록 하자." 할머니가 건네주시는 수박을 한입 베어 문 소녀는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 "진짜죠, 할머니? 이제 제 손 놓으시면 안 돼요!" 그렇게 소녀와 할머니는 오랜만에 꼭 맞잡은 두 손을 놓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몸이 흠뻑 젖은 어린 소녀가 죽어있었다. 뜨거운 햇살에 소녀의 눈물은 희미한 곡선을 그리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소녀의 손에 닿을 듯 말 듯, 찌그러진 깡통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눈물이 흘러나와 소녀의 작은 손을 적시고 있었다. 얼마나 꽉 쥐고 있었던 건지, 소녀의 손바닥에는 목걸이 자국이 아직 선명히 남아있었다. 목걸이는 끝내 땅에 묻히지 못하고 그렇게 오랜 시간 소녀의 곁을 지켰다. 소녀는 그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차가워져 갔다. 곧 죽어버릴 어린 새싹을 움켜쥔 채로…….
재창작에 대한 간단한 소개: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위에서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눈을 맞춰야 한다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동정과 연민이 아닌, 공감에서 우러나오는 도움의 손길. 나의 시선이 아닌, 그들의 시선에서 그들의 아픔을 바라보려 노력하는 마음처럼 말이죠. 평소 불평등에 관심이 많았기에 안데르센 작가님의 작품들 중, <성냥팔이 소녀>는 제게 조금 더 짙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소외된 이웃들, 굶주리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을 생각하며 소설을 재창작해보았습니다. 여기서의 '눈물'은 원작에서의 '성냥'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죽어버린 어린 소녀가 가엾다'라고 끝마치기엔 현실 속의 그 죽음들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고민 끝에 추가한 것이 바로 '목걸이'입니다. 목걸이는 소녀의 죽음, 마을 사람들의 무심함과 그로부터 비롯된 잔인한 결과를 부각하기 위한 요소입니다. 소외된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따뜻한 마음이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영향력에 대해서도 여운을 남기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