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모임 아니고 개모임

털은 피보다 진하다

by 산만한 프리랜서

개가 있는 사람은 외출을 오래 할 수 없다. 외박은 꿈도 못 꾼다. 내가 유난스러운 편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반려견이 있는 집은 반려견에게 지키는 일종의 룰이나 약속 같은 것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개를 혼자 두는 시간은 최대 4시간 이하, 산책은 하루 두 번이다. 너무 개위주로 돌아가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하루종일 이 좁아터진 방구석에서 나만 기다릴 개를 생각하면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없는게 아쉽다.


프리랜서가 되면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장땡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물론 혼자 두는 거 보다는 낫겠지만 같은 공간에 있어도 나는 할 일을 해야하고, 개는 나를 좀 귀찮게 하다가 포기하고 결국은 하루종일 잠만 잔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워 중간중간 장난감으로 열심히 놀아주지만 십 분 정도 하다보면 어깨가 아프다.


산책이야말로 개들이 기다리는 유일한 시간이다. 매일 같은 루트를 반복해서 다니는데도 그렇게 신나하는 개들을 보면 매번 미안한 마음만 생긴다. 그런 내가 요새 아주 열심히 참가하는 모임이 있으니 바로 집 앞 한강공원 개모임이다.


처음에는 우연히 산책 시간이 겹치는 개들과 인사를 하던게, 나중에는 왠지 매일 보던 개를 안 마주치면 허전해서 기다리게 되고, 그렇게 만나는 개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밤 8시에서 9시 사이만 되면 한강 앞에 조그만 펜스가 쳐져있는 공터에 온동네 개들이 모인다. 그렇게 치사량에 가까운 사랑스러움이 펜스 안에 가득 차고 나면 견주들은 흐뭇한 모습으로 한 걸음 뒤에서 개들을 지켜보고 개들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뛰어놀기 시작한다.



샤일로



그래 만날 내가 장난감 던지고 놀아주는 것보다 친구들이랑 노는게 훨씬 재밌겠지. 개들의 행복한 꼬리를 보다보면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아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서로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지만, 서로의 개들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 오늘 자루 미용했네요? 오늘 라봉이 샤워했어요~? 옥이가 키가 더 컸네요? 귀신같은 눈썰미로 견주들은 오늘도 넘쳐나는 개들의 귀여움을 발견하여 코멘트하고 괜찮은 간식과 장난감 정보를 공유하는게 주요 대화내용.


개들은 이상하게 주인을 담는다. 점잖게 뒷짐을 짊어지시고 견주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는 정중한 견주분이 이 모임의 반장같은 역할을 하신다. 개들이 모두 물을 마실 수 있게 챙겨주시고, 싸울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금방 눈치채고 제재를 한다. 웃긴건 이 '반장님'이 키우는 개도 주인과 똑같다는 점이다. 통통한 코카스파니엘 타미는 느릿느릿 여유롭게 걷다가 개들이 너무 흥분하거나 짖으면 사이에 끼어들어 제재를 한다.


라봉이


상냥한 한 커플이 데려오는 하얀 초대형견 라봉이는(풀네임 한라봉) 주인의 상냠함을 똑 닮아 매일같이 꼬리를 휘휘 저으며 이 친구 저 친구 모두에게 놀자고 그 큰 몸을 들이댄다. 친구들이 아무리 귀찮게 해도 바보처럼 헤헤거린다. 기분이 절정에 도달하면 잔디에 큰 몸을 눞히고 마구 비비기 시작하고 다른 개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라봉이 배에 올라타서 같이 비빈다. 우리 옥이는 라봉이를 좋아한다.


그 외에도 옥이의 베프들은 자루, 해나, 조로.. 모두 다 이상하리만치 주인과 생김새도 성격도 꼭 닮아있다. 신기하게도 서로 더 친한 친구가 있고, 그렇지 않은 개가 있다. 옥이는 라봉이랑 자루를 제일 좋아하는데, 이 둘이 먼저 귀가하면 펜스 앞에 서서 애처롭게 짖어댄다. 그러다가 다음 날 아침 산책길에 우연히 마주치면 마치 몇 년만에 상봉한 가족처럼 꼬리로 모터를 돌리며 자지러진다. (니들 어제도 같이 놀았잖아..)



자루와 옥이의 꼬리모터


이렇게 서로 죽고 못 사는 친구들이 되어버리니, 그 시간만 되면 바빠도 산책을 안 나갈 수가 없다. 가끔은 눈치게임에 실패해서 아무도 못 만나고 돌아올 때도 더러 있다. 그럴 때면 옥이는 아주 당황한 표정으로 왜 오늘은 형아들이 아무도 없지? 하고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그렇게 며칠을 엇갈리다 친구들을 만나면 나까지 반갑다. 잘 계셨어요? 하고 안부를 묻지만 그러기엔 서로 안 본 지 삼일밖에 안 됐다. 가족보다 친구보다 동네 개모임 사람들을 가장 자주 보게 될 줄이야.


가끔은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경로로 여기까지 걸어오는 지 궁금할 때가 있다.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하는지, 어떤 연애를 해 왔는지, 형제자매는 있는지, 머리는 어디서 자르는지.. 그런 사소하고 작은 질문들.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남에게 쉽게 습관적으로 던지는 그런 질문들 조차 우리는 던져본 적이 없다.


사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아니, 우리는 서로를 알기 위해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개를 키우고, 개들의 눈물나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어김없이 이 시간에 산책을 나온다. 우리는 우정도 피도 아닌 그보다 진득한 털뭉치로 연결되어 있다.



클로이


날씨가 추운 겨울밤은 산책을 건너뛰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밀려온다. 그냥 내일 아침에 좀 길게 산책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 잠옷 차림으로 패딩만 걸치고 마지못해 옥이와 산책을 나간다. 다행히 오늘도 개들만의 계모임이 한참이다. 옥이의 꼬리가 또 휭휭 돌아가기 시작한다. 나와 함께하는 동안은 이 꼬리를 최대한 많이 돌려 주자고 오늘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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