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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Jun 19. 2020

우리는 치킨을 꼭 먹어야 할까?

개는 사랑해 닭은 맛있어

자취를 시작하고부터 일주일에 한 번쯤은 치킨이 먹고 싶었다. 그럴때면 혼자서 한 마리를 절대 다 못 먹는다는걸 알면서도 치킨을 시켰다. 태어나서 한 번도 치킨을 좋아한 적이 없고 몇 조각 못 먹고 그만둔다는걸 잘 알면서도 입안에 잘 튀긴 후라이드 다리를 한 쪽 넣고 바삭바삭 씹으며 느껴질 쾌락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막상 치킨이 오면 모든게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다리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너무 컸고 바삭한 튀김을 씹고나면 안에 하얀 속살은 비릿한 닭냄새가 났다. 닭뼈 군데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붉고 검은 자국들을 볼 때면 내가 시체를 먹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남기면 안된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치킨을 먹고나면 다음날 아침 매번 토를 했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다시는 치킨은 먹지 않아.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면 또 스멀스멀 치킨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치킨을 몇 마리씩 맛있게 먹는 먹방 유투버들 때문인지 한 가게 건너마다 마주치는 치킨집 때문인지 나는 치킨을 좋아하지도 먹고 싶지도 않은데 나도 모르는 새에 그런 욕망이 어디선가 내게 들어왔다. 먹방들을 보면 나도 왠지 한 마리를 싹싹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치킨을 시키고 토하고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내 몸 어딘가에서 닭고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 고기를 먹는게 나에게는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삼겹살이나 소갈비를 먹는 날에는 딱히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데 유독 닭만 먹으면 그렇게 몸이 반응하는 이유는 뭘까? 생각했었다. 어렸을 적 가족끼리 식사를 하러 교외에 한 닭 백숙 식당에 자주 갔다. 넓직한 땅에 여기저기 평상이 있고 뒷쪽으로는 닭이랑 개들이 있었다. 나는 식당에 도착하면 어설픈 가림막을 젖히고 그 안으로 들어가 개들과 한참 놀고 닭구경을 했다. 나같은 손님 때문에 죽임을 맞이할 동물이라는건 생각도 못했다.


어느 날은 그렇게 한참을 놀고 밥을 먹으러 평상으로 가기 전에 손을 씻으려고 화장실에 갔다. 남자 칸 여자 칸 그리고 마지막 한 칸이 더 있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세 번째 칸에 들어갔다. 거기서 사장님은 우리가 먹을 닭을 잡고 계셨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사장님은 개의치 않고 닭목을 치더니 구경하는 내가 귀엽다는 듯이 닭목에 손가락을 넣어서 인형극 할 때 가지고 노는 손가락 인형을 가지고 하듯이 '안녕 꼬끼오!'하고 나한테 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안녕 하고 손을 흔들었지만 그 때 마주쳤던 닭 눈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끔찍하게 과장된 채로 기억에 새겨졌다. 그 일 때문일까? 나에게 유독 치킨이 먹기 힘든 고기였던 것은.


살면서 닭은 종종 만날 일도 있고 만질 일도 있다. 돼지나 소는 사실 만질 일도 볼 일도 없다. 우리가 그들을 만날 일이 있다면 마트나 고기집에서 깨끗하게 잘려나온 살점앞에서 아름다운 마블링을 논하며 침을 떨어뜨리고 있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치킨은 시키면 한 마리가 온다. 닭도리탕을 하거나 백숙을 하려고 닭을 사면 잘 손질되어 있긴 하지만 모양이 그대로 남아있는 닭 한 마리가 온다. 돼지나 소는 그렇게 만날 일이 없다. 우리는 돼지나 소를 한 마리씩 먹을 일도 없고 한 마리를 먹는다 하더라도 그 한 마리가 형체 그대로 우리 앞에 올 일은 없으니까. 그렇게 그 삼겹살이 고기가 되기 전에는 나와 같은 동물이였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은 한 마리의 돼지에서 나오는 n인분의 삼겹살만큼 나뉘어져서 식탁에 오고 우리는 금새 돼지가 살아있었다는 걸 망각한다.


고기를 그만 먹어야겠다고 결심한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 계기는 고기가 어떻게 식탁에 오는 지 더 자세히 알게 되면서였다. 예전에는 막연히 고기를 먹는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야생에서도 일어나는 일이고 고기는 좋은 단백질원이다. 현대 사회에 고기가 필요이상으로 자주 소비되는 건 사실이지만 고기를 먹는게 나쁘지는 않다. 자연상태에서도 호랑이가 토끼를 뜯어 먹으니까.


식탁에 올라오는 고기의 99%가 공장식 축산을 통해 나온다는 걸 알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참고로 공장식 축산에서는 최소한의 윤리의식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노하며 반대할만한 모든 일이 당연하게 벌어진다. 산란계에서 숫병아리는 몇 톤씩 생매장 당하거나 공업용 믹서기에 갈려 죽음을 맞이하고 돼지는 움직일 수 없는 크기의 사육장에서 임신과 출산만을 반복한다. 도축을 할 때에는 제대로 기절을 시키지 못해서 의식이 있고 고통을 느끼는 상태에서 소의 머릿가죽이 벗겨지고 다리가 잘려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고기를 먹지 않아야겠어. 근데 그게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일까? 그것보다도 지속가능하게 생산되는 축산업을 지지하는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자연상태에서도 동물들은 서로를 뜯어먹고 죽이는데, 공장형 축산이 문제가 되는 건 동물을 오로지 아직 죽지 않은 시체로 여겨서이지. 동물과 인간은 계약을 맺었어. 우리가 고기를 가져가는 대가로 사는 동안은 행복한 삶을 살게 해줘야지! 그런 고기라면 먹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바뀌고 나서는 적극적으로 대안이 될 만한 동물성 상품의 생산자들을 찾아보았다. 참고로 동물복지 마크는 우리가 상상하는 동물 복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동물복지 마크와 상관없이 돼지를 돼지답게 키운다는 농장, 방사형으로 닭들을 키우고 계란을 얻는 농장을 찾아보았다. 그런 농장에서도 여전히 인공수정을 마친 돼지는 몸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자리에서 임신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프리미엄 방사 유정란만을 생산한다는 한 브랜드에서는 '초란'을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초란은 암탉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낳은 달걀. 그러니까 초란을 계속 얻기 위해서는 닭들을 계속 길러내야 한다. 그 시스템이 유지되려면 나머지 닭들은 어디로 가지?


알면 알수록 동물성 제품을 끊는 것말고는 답이 없어 보였다. 어릴 적부터 든 습관 때문에 유독 일회용품 쓰는 일에 예민했던 나는 머리를 한 대 쳐 맞은 것 같았다. 그깟 빨대 그깟 종이컵 몇 백 개는 써도 괜찮다. 고기를 먹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일에 적극적으로 일조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된다면 과연 지금처럼 고기를 자주 먹을까? 일주일에 한 두번씩 치킨을 시켜 먹고 고기 뷔페에 가서 고기를 먹고 매일 우유를 마시고 계란을 먹을까? 내가 아는 한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은 평균 정도의 윤리 의식과 평균 정도의 동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정도면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하는 데에 충분한 윤리 의식이였다. 고기가 식탁에 오기까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다면.


먹는다는 것, 미각, 그 쾌락과 즐거움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고기를 끊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었다. 먹는게 대수다! 라고 생각했으니까. 개를 수간하는 영상을 보며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마스카라를 만든다고 토끼 눈이 멀 때까지 약물을 넣는다는 영상을 보면 그깟 마스카라 안 써하고 다짐할 사람은 많다. 근데 먹는 거는? 내 미각의 쾌락을 위해 나는 어디까지 다른 개체의 고통을 허용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도 우월한 감각이였을까. 애초에 자연상태에서 우리는 맛있으려고 음식을 먹은 적이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 먹었다. 어쩌면 우리가 삶을 지속하기 위해 하는 행위 중 가장 원시적이고 1차원적인 행동일 지도 모른다. 미각의 고도화는 어쩌면 인간이 진화시킨 가장 악랄한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맛있다는 이유로 다른 동물을 먹는 동물이 인간 말고 또 있을까?


고기를 안 먹기로 다짐한 뒤로도 종종 고기를 먹었다. 같이 밥 먹으러 간 친구가 고기를 남기면 몰래 한 점 집어 먹었다. 어차피 버릴 건데 이건 내 배로 들어가도 되겠지 뭐. 다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고기가 조금이라도 안 들어간 메뉴가 없어서 그나마 제일 덜 들어간 걸 시켜서 먹었다. 그 몇 덩이 국에 들어간 고기를 씹을 생각에 신도 났다.


오늘은 계속 피하고 있던 영상을 하나 봤다. 도축장에 잠입취재해서 찍은 영상이였다. 영상 속 모든 동물들은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울부짖고 두려움에 떨고. 기절같은건 매번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도축 전에 의식을 잃게 해야한다'라는 지침 따위가 우리가 매년 먹는 10억마리의 닭 모두에게 잘 적용됐을 리가 없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있다. 소들이 모두 고리에 꽂힌 채 가죽이 벗겨지고 있는데 한 마리가 피범벅이 된채로 절뚝거리며 도망치려 하는 장면이 찍혔다. 피가 잔뜩 묻은 작업복을 입은 사람 세명이 뛰어가 소를 잡았다. 인간과 계약을 맺은 대가로 행복하고 동물다운 삶을 보장해주고나면 (물론 이것도 해 준 적이 없지만) 우리는 과연 그들의 머리를 공기총으로 때려 기절시키고(운이 좋아야 기절하지만) 머리가죽을 벗기고 다리를 자리고 내장을 뽑을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내 손에 피는 묻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음식을 생산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 무엇을 먹을 지 우리는 매번 선택하고 있다.


점심 시간이 다가온다. 더워지는 날씨에 맞춰 평양냉면 한 그릇이 땡긴다. 슴슴하고 시원한 국물에 질감이 그대로 다 느껴지는 면발 위 고기 한 점. 고기 한 점인데 먹으면 안되나. 아니지, 생각을 고쳐본다. 풀밭 한 번 밟아 보지 못하고 인간 나이로 따졌을 때 10살도 채 안 된 나이에 도축장에 끌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는 소, 안 먹으면 안되나.


치킨 한 마리, 삼겹살 1인분, 평양냉면 위 고기 한 점. 아직 초보자인 나는 이 끔찍한 사실들을 알면서도 고기 한 점 생각하며 입안에 도는 침을 막질 못한다. 다만 치킨을 생각할 때만큼은 맛있겠다라는 생각보다는 어릴 적 백숙집 사장님이 손가락에 닭머리를 꽂고 안녕하고 인사하던 것만이 생각나며 메스껍고 소름이 끼친다. 감각도 학습되는 것이다. 내 식탁 위의 고기가 얼마나 나와 비슷하고 닮아있던 한 동물이였는지 생각해보면 고기는 곧 시체로 변한다. 개에서 닭으로, 닭에서 돼지로, 돼지에서 소로, 그리고 또 포유류에서 어류로. 우리에게는 동물을 우리와 연결시켜 생각하고 감각할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있다.


유독 치킨을 사랑하는 한국인의 연간 닭 도축량은 10억 마리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10억마리의 치킨이 필요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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