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be less unethical
매년 새해가 오면 하는 다짐이 있다.
'부디 올해는 비건에 성공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올해도 그 다짐은 간만에 모이는 동창회 자리에서 한 점의 삼겹살과 함께 무참히 박살났다. 얄팍한 죄책감과 어찌할 도리 없이 맛있는 이 미각만을 남기며..
요새는 점점 비건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다양한 이유로 비건을 지향하고 있어 예전보다는 비건 식당이나 식재료가 찾기 쉬워지긴 했다. 사실 맘을 굳게 먹고 할려면 할 수 있다. 미역국 먹고, 부추전 먹고, 미역줄기 볶음이랑 쌀밥 한 공기면 뚝딱 맛있는 한 끼 비건식이 되긴한다.
실패하는 이유는 결국 나다. 나의 이 굳건하지 못함.
그렇다면 굳건하지도 못한 주제에 왜 비건을 하려고 이렇게 실패와 시도를 반복하는 것일까? 뭐, 아주 간단하고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동물이 불쌍해서'가 되겠다. 물론 이 대답은 귀찮고 굳이 자세히 구구절절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쓰는 대답이긴 하다.
'불쌍'이라는 단어를 사람들은 감정에서 비롯되는 비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 못한 행동의 모티베이션이라고 여길 때가 많다. 가장 흔하게 되묻는 말은 '아니 그러면 야생에서 사자가 토끼를 뜯어 먹는 건 안 불쌍하고?' 같은 류의 질문이다. 개고기를 반대한다는 의견에 '아니 그러면 개만 불쌍하고 다른 동물은 안 불쌍해?' 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일단, 나에게 동물이 '불쌍한' 이유는 동물을 죽여서 고기를 얻기 때문에 '불쌍하다'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불쌍(?)하다. 사람이라는 영장류는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연민'이라는 것을 느낀다.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라, 그거야말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모티베이션 아닐까?) 야생에서는 사자가 토끼머리를 오도독 오도독 씹어먹어도, 암컷 사마귀가 수컷 사마귀를 뜯어 먹어도 불쌍하다는 생각을 동물들끼리 서로 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상상을 하고, 자신을 다른 위치에 대입해보며 감정을 이입하는 능력이 있다. '개'를 먹는 것이 다른 동물을 먹는 것에 비해 극도로 끔찍하게 여겨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는 모순이거나 비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다. 인간이 가지는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인 감정이다. 우리의 공감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이끌어져 나와 멀리로 이어진다. 나의 가족이 된 이 한 마리의 '개' 덕분에, 나는 다른 모든 개의 삶을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게 되고, 또 개에서 다른 동물로 내 공감의 인식을 확장해나간다.
'왜 개만 불쌍해?'가 아니라 '개가 불쌍해'가 시작점이다. 감정은 멈춰선 하나의 절대적 사실이 아니라, 앞으로 이어나갈 방향성의 시작점 역할을 한다.
장애가 있는 가족이나 지인이 있는 사람이 장애인 인권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우울증을 앓아 본 사람이 정신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더 화가 난다. 개를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이 개고기에 눈깔이 뒤집히는 것은 지극히 이성적인 일이다. 우리는 자신과 가까운 일에 더 크게 공감하고 느낀다. 그것을 모순이라고 지적한다면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가기 어렵다. 하늘에서 갑자기 유토피아가 뚝 하고 떨어지지 않는 이상.
우리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연민이라는 감정을 무기삼아 서로 소통을 하고, 언어를 짓고, 협상을 하며 지구의 최강 포식자로 진화해왔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벗어나, 이 약하고 갸날픈 몸뚱아리로 지금처럼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포식자가 된 것도 그 덕택이다.
그런데도 동물을 먹는 것에 있어서 동물이 '불쌍한' 이유는, 그들의 죽음이 아니라 삶 때문이다. 오로지 값싸고 맛있는 고깃덩어리가 되기 위해 최적화된 삶을 살다 죽어야하는 것이 '불쌍하다'. 차라리 인간 모두가 고기를 먹기 위해 사냥을 해서 직접 잡아야 한다면 떳떳하게 고기를 먹겠다.
자연상태에서 동물은 상위 포식자에게 잡아 먹힐 위험에 항상 처해있다. 제 수명을 다해 늙어 죽는 일은 야생의 세계에서는 흔하지 않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는 원할 때 마다 고기를 먹을만큼 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타협과 협상'이라는 인간만의 무기를 이용했다. 물론 이 '협상'은 아주 일방적이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자연상태에서 어쨌든 잘 살아가고 있었던 동물과 우리는 일방적 협상을 맺는다. 동물을 가축으로 삼아 보호하고 그 대가로 편하게 털, 고기, 가죽 등을 얻는 것이였다.
여기에 자본주의가 맞물리면서 문제는 시작된다. 생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동물학대(이런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겠지만)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중세시대의 윤리성과는 다르다.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더 빠르게 더 많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동물은 그저 고기가 되기 전 단계의 과정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젖소에게 우유를 많이 얻기 위해 어린 송아지들은 엄마젖을 물 수 없도록 뾰족한 장치가 달려있는 입마개를 쓴다. 육질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어린 송아지를 거세한다. 돼지는 ‘가장 맛있는’ 7개월 정도 때 도축된다. 수병아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하고, 닭들은 움직일 수 없는 철장에 부리가 잘린 채 갇혀있다. 물론 소비자는 이를 자세히 알 터가 없다. 모든 것은 보기좋고 아름답게 상품화되어 있고 그런 광고야말로 자본주의의 미덕이다. 그치만 그런 미덕을 위해 그들의 삶을 희생시키기엔 그 삶은 너무나 처절하고 많다.
현대 사회에서 동물은 과거에 비해 확실한 생명권을 가진 개체로 인식 되고 있지만(포경, 투우, 실험동물 같은 문제들은 큰 논쟁이 되곤 한다) 육식품을 생산/제조하는데에 있어 동물의 삶은 기본적인 자연의 섭리, 즉 '인간은 원래 육식을 한다' 라는 그늘 아래 자본주의와 손을 꼭 잡고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동물을 먹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고기라는 것이 하나의 생명이였다는 연관성을 잊도록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광고와 마케팅이며, 그 고리를 점점 느슨하게 만들어서 모두가 삼겹살이 사실 돼지의 배였다는 걸 까먹고 오로지 '좋은 고기'가 되기 위해 그들의 삶을 마음껏 도구처럼 활용하는 방식의 자본주의식 축산형태이다.
나에게 있어 채식의 목적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래서 차선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한국에도 마크만 '동물복지'(이 마크를 달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푸른하늘 파란하늘 꿈이 드리운 초록 언덕 아니다)를 달고 최소한의 환경만을 유지하는 농장이 아니라, 자연 방사식으로 계란을 얻고, 돼지의 습성을 최대한 고려하여 농장을 운영하는 곳들도 있다(물론 상위 1%급의 동물복지 농장운영방식을 보더라도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를 것이다). 이런 곳에서 제품을 구매하고 계속해서 관심을 갖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다. 이러한 옵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한 번 앉아서 고민해 보면 된다. 안 되면 되는 거 하자. 할 수 있는 거부터 하자.
결국 우리는 모두 가치관이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귀한 음식을 먹는게 인생의 제일 큰 쾌락일 수 있다. 나도 궁금해서 푸아그라 먹어봤다. 뭐 그렇게 크게 맛있지 않았다. 누가 비싼거 사준대서 어린 송아지 요리도 먹어봤다. 참 잔인한 메뉴명인데, 입에 군침이 도는 건 왜지? 이미 자본주의에 깊게 학습되어버렸나.
그렇다, 나도 한낱 인간이다. 이의 목숨과 개의 목숨이 똑같게 여겨졌으면 부처였겠지. 내 목숨이 젤 중하고, 내 삶이 제일 중하다. 모르고 싶은건 눈 감고 그냥 합리화하면 속 편하다. 내 입 안에서 벌어질 사소한 경험을 위해 불쌍한 거위와 어린 송아지의 삶을 흔쾌히 희생시켰다. 어차피 내 눈 앞에 보이는 건 잘 차려진 하나의 예쁜 요리. 동물들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는 난 보지도 듣지도 않아도 돼. 이 음식이 비싼 이유는 그거야. 그 끔찍함과 죄책감을 예쁘고 아름답게 가려주는 것이지.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페이스북에 자랑하고. 동물을 사랑한다는 나. 오늘 먹은 소고기 오마카세를 지나칠 수는 없지. #존맛 #한우 #투뿔
나는 수없이 많은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모순이기를 멈출 수 없다. 가죽가방이 예뻐 보인다. 오리털 이불이 포근해 보인다. 고기가 맛있다. 그치만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순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또 너무 큰 모순일까?
비록 엉망진창일지라도, 그 엉망진창을 오래해보고 싶다. 변화를 만드는 힘은 완벽한 하나의 삶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엉망진창이지만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여러 명의 삶이 합쳐졌을 때라 믿고 싶다. 그러니까 혹시, 하고 싶지만 못 할 것 같아 시도하지 않은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우리 그냥 같이 한 번 해보자. 혹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가,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겼다면 더 관심을 가져보자.
고기가 먹고 싶으면 삼겹살 집에 가도 되고, 양꼬치집에 가도 된다. 비엔나 소세지도 굽고 스팸도 굽고 씁쓸하게 맛있는 고기를 즐기자. 그리고는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가보자.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어쩔 수 없이 맛있는 고기를 고뇌하며 먹을 때 세상은 이미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