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케도 살아남았군
경력 6년 차 프로페셔널 우울증 환자
병원도 다녀봤다.
상담도 다녀봤다.
약도 먹어봤다.
매일 운동도 해봤다.
꾸준한 취미생활도 가져봤다.
어느덧 어엿한 6년 차 정신질환 환자가 되었다. 6년은 꽤나 긴 시간이어서 아프기 전의 내 삶이, 또 내 사고 회로가 어떤 식으로 작동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갓 병원에 다니기 시작하고 약을 먹기 시작했을 때에만 해도 극명하게 나뉘어 보였던 아프기 전과 후의 경계는 거진 다 흐려졌다. 신입 시절에는 '아프기 전'의 활기찼던 삶을 되찾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과연 '아프기 전'의 삶이라는 게 존재는 했는지 의심이 든다. 결국 모든 것은 무엇을 의식하느냐에 있다.
본래 정신이라는 것은 육체에서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육체가 작동하기까지 최대한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진행되는 일종의 육체-선행적 단계일지도 모른다. 그 주객이 전도되어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 모든 육체의 움직임과 물리적인 외부 요소들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여 돌멩이처럼 멈춰 서서는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느라 그 생각들에 사로잡혀 물 한 잔 뜨러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정신의 감옥에 나는 갇혀 있다. 한 번 머릿속에 갇힌 육체는 쉽사리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고, 그렇게 기나긴 겨울잠에 빠진 곰처럼 몸을 웅크리고는 모든 동작을 최소화한 채로 꿈속을 둥둥 헤매며 생각의 굴레에 잠기곤 했다.
정신의 감옥이 무서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곳에는 아무런 물리적 자극이 없다. 모든 것은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머릿속에서 끝난다. 실행으로 옮기지도 않을 일을 상상으로 수도 없이 옮겨보며 가짜 결과를 도출해낸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서 얻게 될 물리적 자극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며 무기력에 빠진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지금 몇 달째 사과 8개가 있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이 사과를 먹겠다고 다짐한다.
'오늘은 꼭 저 사과를 먹고 말겠어!'
그리고 다시 눈을 감는다. 30분 정도 뒤 나는 또 생각한다.
'저 사과를 어떻게 먹지? 껍질을 깎아서 먹을까? 과도칼로 한 번도 껍질을 안 끊기게 깎아봐야지.
아니면 미국 드라마에서처럼 손으로 들고 우걱우걱? 근데 사과를 냉장고에 둔 지 너무 오래돼서 맛이 없을 텐데.. 졸여서 잼 같은 걸 만들까? 그리고 어떻게 만들었는지 찍어서 블로그에 올리고, 언니랑 친구들에게도 나눠주고 그다음에 또 어쩌고 저쩌고...(사과잼으로 만들 수 있는 샌드위치 베리에이션을 50가지 정도 떠올린다.)'
물론 사과 8개는 아직도 냉장고에 고스란히 모셔져 있다. 나는 무려 두 달 동안 이 사과를 먹겠다는 다짐과 어떻게 먹을지 계획을 세우는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두 달째 머릿속에서 벌어진 사과 파티 때문에 사과에 지치게 되었다.
'됐어. 어차피 먹어봤자 사과가 사과맛이고, 깎아 먹든 잼으로 먹든 청을 담그든 그냥 사과일 뿐이야. 그걸 먹어서 대체 뭐하냐고. 아침에 사과를 먹으면 조금 더 건강해질 것 같아? 아니면 아침에 사과를 먹는 행위를 함으로써 내가 건강하게 하루를 잘 시작했다는 뿌듯함을 얻고 싶은 거야?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군.'
일단 이렇게 생각이 한 번 방향을 틀기 시작하면 그 뒤를 따라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마침내는 모든 생각과 질문의 종착지에 도착하게 된다.
'죽을까?'
그렇다. 이게 바로 정신 감옥의 위엄이다. 냉장고에 사과 8개만 있어도 죽을지 말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다. 죽기는커녕 나에게는 사과 하나를 깎을 힘도 없다는 것을..
이미 나는 모든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서 아주 꼼꼼하게 훑어보았고 그 모든 것이 시시해져 버렸다. 사과를 먹는 것도 시시하고 친구를 만나는 것도 시시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식물 가게 구경도 귀찮고 책 읽기도 지겹다. 머릿속에서 다 해봤기 때문에 말이다. 이런 자기기만으로 질식할 듯이 시시한 일상이 내가 겪는 우울증이었다. 병의 이름은 결국 편의를 위해 임의로 정한 사회적 약속일뿐이고 모두 다 다른 방식으로 고통받고 있겠지만, 만약 모든 우울증 환자를 관통하는 근원이 있다면 바로 활기의 부재이다. 그리고 어떤 노력으로도 이 삶의 활기가 복원되지 않을 때, 학습된 무기력이 찾아오고 이때부터는 정말로 빠져나가기 힘든 굴레에 갇히게 된다.
우울증의 초기 단계가 슬픔과 우울감, 눈물과 혼란을 가져온다면, 담쟁이 덩굴처럼 이미 온몸을 칭칭 감싸고 만 우울증의 말기 단계는 더 이상 어떤 느낌도 불러오지 않는다. 키우던 개가 죽어도 눈물이 나질 않고 가족이 결혼을 해도 그저 결혼식이 귀찮다. 그렇다고 매 순간이 불행하거나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냥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이 시시할 뿐이고, 그 뒤를 따라오는 허무함에 목이 조일뿐이다.
지난 6년 동안 나에게 행복한 순간들은 참으로 많았다. 불행한 순간도 분명히 있었다. 행복과 불행은 일종의 상대적이고 인지 가능한 관념이다. 박완서 선생님의 어느 소설에서 나왔던 구절처럼, '남의 불행을 고명으로 해야 더욱더 고소하고, 맛난 자기의 행복...'
불행과 행복은 결국 생각에서 비롯되고, 생각! 생각만큼은 나는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 하지만 활기는 어디에서 오던가? 활기는 울고, 웃고, 화를 내고, 아프고.. 몸을 움직이며 햇살을 느끼고 꽃냄새를 맡고 바람의 온도를 온몸으로 느낄 때. 내 머릿속에 생각이 들어오기 전에 내 육체가 외부의 자극에 끊임없이 반응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행복한 순간들과 불행한 순간들 중 어떤 것도 나에게 활기를 주지 못했다. 희망이 되지 못했다. 그저 죽지 못해 사는 날 중 하루일 뿐이고 짐이었다. 무언가를 느끼는 법 따위는 잊고 살았다. 맛있게 사과를 먹는 법도 개의 죽음을 슬퍼하는 법도.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던 고통과 괴로움에도 익숙해진 나와 단둘이 자취방 책상에 앉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렇다.. 너도 이제는 어엿한 6년 차 환자구나. 우리는 결국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구나.
죽기는 싫다. 이제는 죽어도 죽고 싶지 않다. 죽음을 갈망하고 자살을 실천으로 옮길만한 미칠듯함 고통도 열렬한 우울감도 이제는 없다. 그저 겸허히 죽음을 기다리는 스님의 마음이랄까. 익숙해진 만큼 덜 힘들면 좋으련만 매번 좋지 않은 날이 올 때면 갓 살이 오른 간을 독수리에게 쪼이듯이 또 새롭게 고통스럽다. 그래도 바닥을 한 번 찍고 나면 반동으로 조금은 튕겨 올라온다.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사과 한 개를 깎아 먹었다. 그렇게 맛있거나 달지는 않았지만 사과의 맛이었다. 내가 아무리 머릿속으로 생각해봐도 절대 느낄 수 없을 그런 맛. 배나 수박처럼 아삭하지만 밀도가 꽉 차 있는 식감, 다른 잘 익은 과일처럼 달지만 어딘가 꿀 같은 아찔하고 진한 단 맛이 있고 조금은 새콤한. 샤워를 하고 예쁜 옷을 입고 가방을 쌌다. 도서관에 가려했는데 너무 배가 고파 혼자 점심을 먹었다. 오랜만에 단골가게에 와보니 메뉴가 바뀌어 있었다.
'이제 해물탕 정식은 안 하세요?'
'아.. 저번 달까지 했는데 아무도 안 시켜서 뺐어요.'
이럴 수가. 나는 메뉴에서 줄어든 종의 다양성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며 된장찌개를 시켰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매번 지나치기만 했던 액세서리 가게에 들려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봤다. 비록 돈이 없어 사지는 못했지만. 고운 사장님이 너무 상냥하셔서 소소한 얘기를 나눴다.
'가게가 너무 예쁘네요.', '직접 만드시는 건가요?', '제품이 참 다양해서 좋네요.', 어쩌고 저쩌고.. 아무 핸드메이드 액세서리 집에 가도 내뱉을 수 있을 무의미한 말 따위의 것들....이라고 내가 이미 머릿속 경우의 수 중 하나로 실행하고 판단해버렸던 그런 대화를 했다. 사장님은 또 뻔한 대답을 했지만, 가게 조명에 반짝이는 눈가의 옅은 은색 아이쉐도우, 이제 막 차가워진 가을바람에 펄럭이는 앞치마, 수줍은 목소리와 미소, 내 머릿속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을 대화의 활기, 온기, 에너지. 나는 대화 몇 마디에 온몸이 무언가로 가득 찼다. 비록 도서관까지는 가지 못하고 밥만 먹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최소한 펜을 잡고 움직일 에너지를 얻어낸 것이다. 초콜릿도 한 통 사 와서 까먹었다.
자신의 머릿속 기만에 속아 겨울잠에 빠지지 말 것. 사과를 깎고, 말을 건네고, 사지 않을 장신구를 잔뜩 해볼 것. 그런 것들이 자꾸 쌓여 나를 또 7년 차, 10년 차 환자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이냐. 에 앞서, 일단 살아있는 게 훨씬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