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밝고 예쁘던 애가.. 도대체 왜?'
우리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 앞에서 '왜'라는 질문을 쉽게 떠올리곤 한다. 마치 자살과 같은 엄청난 일에는 그에 합당한 엄청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자살은 좀 더 쉽게 이해받고, 어떤 자살은 이해받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살(suicide)이라는 것은 어떤 계기에 의한 인과응보로 벌어지는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suicidal한 상태에 어떤 자극이 가해졌을 때 이미 마지노선까지 버티고 있는 상태가 폭발하는 것에 더 가깝다. 자살을 하기 위해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삶의 하루하루가 죽음과 등가교환할만한 대상으로 여겨지는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의 큰 폭력이 아니라 일상이 이미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을 때 사람은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도, 날카로운 말 한 마디에도 무너진다.
그러니까 자살은 순간적 선택보다는 삶에 대한 의지가 상실되고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될 때 계획되기 시작하는 연속적인 행위의 종착역에 더 가깝다. '죽을까?'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살아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하는 상황에 놓아질 때 개인은 자살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실천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신할 수 없을 때, 삶이 죽음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다고 느껴질 때. 어떤 사람들에게는 숨을 계속 쉬어야 한다는 것 조차가 자살의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아주 평범한 나의 경우는 이러했다: 딸밖에 없는 종갓집에서 아들일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태어났던 나는, 크면서 내가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딱 한 번 지나가는 소리로 할머니가 나에게 한 말에서 나는 처음으로 죽음의 실존을 깨달았다. 자살이라는 옵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옵션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보다 자살할 확률이 당연히 더 높다.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의 자살이 주변의 자살률에 영향을 미치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 자살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대학교에 다니면서 남자문제와 관련된 가십에 휩쓸렸을 때였다. 여자 신입생이라는 포지션은 여러 가십에 취약했고 보통 그런 소문은 남자에게는 명성을 여자에게는 비난을 가져오기 마련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일이라지만, 별 것 아닌 일이 아니였다. 세상에 대체 별 것 아닌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누군가에게는 '별 것이 아닐 수 있는 일'로 나는 죽도록 힘들어 한다는 사실에 나는 더 부끄러워 죽고 싶었다.
애초에 어떤 사람은 극복할 수도 있는 '별 것 아닌 일'을 누군가는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스스로의 삶이 무가치하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등급이 높을수록 더 많이 적립되는 멤버십제처럼 이미 죽음에 힌트를 얻은 사람들은 더 쉽고 빠르게 죽음이라는 퍼즐을 맞춰나간다.
그 뒤로 나의 사고회로는 어느 정도 고장나서, 삶은 매일매일이 감당할 수 없는 초과된 무게의 것으로 여겨졌고 아주 '사소한 일'로도 죽음을 생각했다. 과제가 하기 싫을 때에도, 알바가 가기 싫을 때에도, 부모님과 다툴 때에도 나는 툭하면 자살을 고민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주로 나약한 스스로를 자책했다. 나의 삶을 죽고 싶을만큼 힘들게 하는 것들은 대부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구조에서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였다. 자살이라는 최종 종착역으로 누군가를 밀어내고 있는 것은 개인의 기질과 성향이 아니라, 개인의 힘으로는 절대 뒤집을 수 없는 구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자살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개인적이자 정치적인 선택이다.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공기같은 폭력이 생존본능이라는 기본 가치체계를 망가뜨릴 때, 자살은 단순한 생각에서 실천가능한 행위로 옮겨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이렇게 질문한다.
'그렇게 밝고 예쁘던 애가.. 도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