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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Oct 18. 2019

그들이 더 강하다

'멘탈이 약한' 사람들이 더 강한 이유

우울증 환자에 대한 가장 흔한 클리셰 중 하나는 아마도 '멘탈이 약하다'가 아닐까 싶다. 밖에서 보기엔 사소한 일로 무너지고, 감정 기복이 심한 그들은 아마도 예민하고 유약한 집단처럼 보이기 쉽다. 내가 우울증을 진단받고 증상을 느끼면서도 가장 듣기 고통스러운 평가 역시 '나약하다'였다. 나 역시도 우울함이라는 것을 내가 가진 어떤 '연약한' 기질과 '우울한' 성향에 뿌리 박혀 있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어떤 기질과 성향은 우울증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나의 예민함과 집요한 분석력이 그러했다. 그렇지만 우울함 그 자체가 거기에서 비롯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나는 아프기 전 나의 예민함과 집요함이 좋은 쪽으로 틀어졌을 때의 삶을 기억한다. 사소한 일에 괴로워하던 것처럼 사소한 일에 크게 웃었고, 분석적이고 집요한 성격 덕에 사람들은 나의 의견을 예리하고 통찰력 있다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프게 된 뒤로 사귀게 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나의 예민함과 분석력을 우울증의 원인으로 판단했다. 내가 깨달은 것은 결국 기질과 성향은 일종의 도구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도구를 바라보고 사용할 것이냐는 것이다.


다리가 부러진다거나 코뼈가 부러지는 일은 주로 명확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그런 고통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울증에는 모두가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고 사람들은 그런 고통은 잘 이해하질 못한다. 사실 당사자들조차 자신의 우울증을 납득하지 못할 때가 많다. 환자들은 혼란에 빠진 채로 주변에서 물어오는 '합당한 이유'를 찾다가 되려 삶의 모든 끔찍한 기억들을 곱씹으며 우울증을 기질적으로 강화시키기도 한다. 우울증이 올만한 '합당한 이유'쯤이야 누군들 한 두 가지가 없을까? 문제는 자신의 상태를 증명해야 한다는 (나는 나약한 게 아니라 '합당한 이유'로 우울증에 걸렸다) 압박감에 스스로를 끔찍한 서사로 옳아메게 될 때이다. 이쯤 되면 마치 나는 태어날 때부터 우울증에 걸릴 운명처럼 느껴진다.


물론 남들에게 나를 이해시키거나 증명시키고자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사귀거나 연인처럼 갑자기 친밀한 사이가 되는 관계에서 극심한 우울함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날 때가 있다. 나는 상대방에게 나의 우울증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것이 앞으로 남은 인생의 가장 큰 태스크라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연습하고 배워가는 과정에 있다. 오직 오랜 시간 옆에서 지켜본 사람만이 가장 자연스럽게 이 병을 납득하게 되는데 우울함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고 불쑥 감당 못할 강도로 찾아온다. 게다가 쌓여온 우울감은 누적형이라 매번 더 크고 무기력하게 찾아온다. 한동안만 그런 순간이 찾아오지 않아 준다면 신규회원으로 강등되어 다시 0부터 시작할 수 있을 텐데, 우울감은 그렇게 리셋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상대방이 잘 모르는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게 전달하려면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우울증 환자에게는 그 '객관성'이라는 것이 사실상 성립할 수 없다. 우울증이라는 것의 객관성은 환자 개인의 주관적 감각에 그 핵심이 존재한다. 그것이 우울증 환자들이 매일 마주하는 객관적 진실이다. 이 '객관적 진실'은 아무도 설득하지 못한 채 같은 상황에서 우울증을 겪고 있지 않는 '정상적인 다수의 시각'으로 판단되기 마련이다. 며칠 전 나의 '객관적으로' 잘 말해보려는 시도는 또 무참히 좌절되었고 그렇게 내 우울증은 트리거 되어버렸다.


밤낮없이 우는 와중에 나는 미팅을 해야 했고, 개를 돌봐야 했고, 과외를 가야 했고, 택배 온 한 박스의 레드키위를 후숙처리해야 했다. 우울증에서 오는 고통은 아주 깊고 마르다. 촉촉하고 어두운 슬픔보다 대낮에 길가에 말라 비틀어진 미역 쪼가리에 가깝다. 아무 느낌없이 멈출 줄 모르는 눈물을 겨우 부여잡고 5시간 동안 인테시브한 미팅을 하고는 돌아오는 길 내내 또 울었다. 눈알이 아파 죽겠는데 미팅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진 개를 새벽까지 산책시켰다. 새벽 3시에 겨우 잠이 들었는데 살인마에게 밤새 칼에 몸이 조각조각 찢기다 6시에 일어났다. 과외가 연속으로 두 개가 있었고 또 과외 학생 집 앞에서까지 울다가 홀연히 정신을 붙들고는 아이들과 웃으며 그림을 그리고 동화책을 읽었다. 그것도 영어만 쓰면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이게 어떻게 유리멘탈이냐. 이건 유리가 아니라 흑연에 가깝다. 다이아몬드와 동일원소고 구조만 다른 셈이다.



가장 심하게 우울증을 겪고 있을 때 사람들이 주로 해준 조언은 바쁘게 살라였다. 바쁘게 살아보면 우울하고 불안할 겨를도 없을 것이라고. 결과는? 온갖 미팅에 치이고 벌여놓은 일이 많아 육체적으로도 힘든 와중에 지하철이나 버스만 타면 불안해서 심장이 덜컹거려 몇 정거장 가다 내리고, 또 몇 정거장 가다 내리고를 반복해야 했다. 자해를 하고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는 와중에 클라이언트와 전화로 페이를 협상했다. 그리고 그걸 보험처리 했다. (위험하니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자해 말고 '과도한 바쁨' 말이다.)


그 뒤로 나는 내 삶에서 밸런스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나한테는 아직은 느슨한 시간들이 많이 필요하다. 결코 그래서 우울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을 버티기 위한 최소한의 밸런스가 존재한다.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만 있는 일도 미친듯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나약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병이기 때문에.


집에서 주로 개를 만지고 책을 읽는 일상은 꽤나 정적이고 우울하다. 많은 일을 하고 바쁘게 지내면 행복감이 문득 돌아오고 쾌활해진다. 그치만 만약 그 바쁜 와중에 무너지게 된다면, 그 때는 정말 겉잡을 수 없는 타격을 받는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버텼지만 차곡차곡 적립된 VIP 레벨 회원인 나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행복할 수도 있을 하루를 위해 내 목숨을 담보로 내놓을 수 없다. 조금만 더 버텨서 내가 신규회원으로 강등되는 순간, 그 때부터 다시 조금씩 바쁘게 살면 된다.


며칠 전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 환자들이야말로 멘탈이 진짜 강한 것이 아닐까? 정신적 고통은 실재한다. 정신적 고통도 결국은 감각이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도 온몸으로 느껴지는 실존적인 고통이다. 그렇게 때로는 옷깃만 스쳐도 아픈 것이고, 그렇게 매일을 살아남는다.


2018년 한국인 사망원인 중 5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1위는 암, 2위는 심장질환, 3위는 뇌혈관 질환, 4위는 폐렴이다. 자살자의 80% 이상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병마와 끊임없이 투쟁하며 삶을 살아가는 환자들은 강하다고 비춰지는 반면에, 정신질환 환자는 주로 '약하다'고 이야기 된다. 하지만 그들도 하루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들이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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