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만한게 하나는 있겠지
대학교를 휴학하고 알바를 해야만 할 때의 이야기다. 가진 재능 중 그나마 돈이 되는 것이 영어 과외였다. 전공인 디자인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길 희망했지만 아무도 내 포트폴리오에 답장을 주지 않았다. 고작 학부 2학년차, 나보다 디자인을 잘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았다.
영어 과외는 비교적 고소득 알바였지만, 고정된 수업 시간이 있었기에 시간 활용이 유동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눈을 돌려 재택으로 할 수 있는 번역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번역 알바에 지원하기 위해 이력서를 쓰는데 쓸 말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아무 상관 없지만 디자인 툴을 다룰 수 있다고 기재했다.
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예상외로 번역을 얼마나 해봤냐는 질문이 아니라, 디자인툴이 얼마나 숙련되어있는지 물어봤다. 툴 다루는 것이야 문제가 없었기에 능숙하다고 답변했더니 번역과 디자인을 동시에 맡기고 싶다고 했다. 나는 번역도 처음이고 디자인도 툴만 할 수 있지 처음 해본다고 솔직히 말했다.
"아무 상관 없어요. 번역은 어차피 초벌만 부탁할거고 숙련자가 검수할 거예요. 디자인은 이미 저희 디자이너가 만든 파일 위에 얹기만 하면 되니까 툴만 다룰 수 있으면 되어요. 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나는 인생 최초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따왔다.
일을 해보니 나한테 맡긴 이유가 눈에 보였다. 출판사에서 번역본 출간을 하는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1. 기존의 원문 텍스트를 영어로 번역한다.
2. 번역본 디자인 위에 텍스트를 교체한다.
이 프로세스를 진행하기 위해서 출판사는 초벌 번역가, 번역 검수자, 디자이너를 고용해야 한다. 근데 나는 그 중에 초벌 번역과 디자인을 모두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프로세스는 모든 출판사가 동일했다.
이력서를 바꿨다. 아예 번역본을 준비중인 출판사만 타겟으로 해서 번역과 디자인툴을 활용한 텍스트 배치까지 가능하다고 적었다. 첫 일을 줬던 출판사와는 정산 문제로 얼마 못 가 틀어지게 되었지만 이력서를 바꾼 뒤로 일이 쏟아졌다.
이 이야기는 내가 가진 여러가지 능력 조각 중 두 가지가 처음으로 맞닿으면서 새로운 기회가 생긴 케이스이다. 나는 살면서 이런 기회를 정말 많이 만났다. 그렇게 나는 분산과 연결로 생존하고 있다.
쓸만한 나의 조각 찾기
나는 계획 짜는걸 좋아한다. 물론 충동적인 성격 때문에 계획대로 일이 흘러간 적은 없지만, 큰 방향성을 자주 앉아서 정리하고 다듬는다. 그 때 내가 꼭 하는 일 중 하나가 내가 가진 조각 중 쓸만한 조각을 정비하고 그룹화 하는 것이다.
아마도 분산과 연결이라는 키워드가 눈에 띄어 이 글을 읽게 되었다면 여러분도 나만큼이나 산만한 관심사와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가진 관심사 조각과 능력치 조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정리를 해두는 것이 쓸만한 조각을 찾는 여정의 시작이다.
관심사 조각은 말 그대로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에 관한 것이다. 이 분야는 동사가 아닌 명사로 정리해두면 편리하다. 예를 들면 '반려동물', '영어', '뜨개질', '패션', '식물' 이런 식이다.
능력치 조각은 내가 가진 능력 중 수익화가 가능하거나 수익화의 잠재력이 있는 동사로 정리하면 유용하다. 예를 들면 이런식이다.
강의하기
디자인하기
컨텐츠 만들기
글쓰기
관심사 조각과 능력치 조각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 관심사 조각은 단순히 내가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조각들이다. 이것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주거나 연결 고리 역할이 된다.
능력치 조각은 실질적으로 내가 그 능력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조각들이다. 때로는 관심사 조각이 성장하여 능력치 조각이 되기도 하고, 관심사 조각과 능력치 조각이 조합되기도 한다. (영어)에 대한 (강의를 할 수도) 있고, (뜨개질) 도안을 (디자인을 할 수)도 있다. (반려동물) 관련 (컨텐츠를 만들 수) 있고, (패션 분야)에 대한 (칼럼을 쓸 수)도 있다.
관심사 조각과 능력치 조각은 딱 하나의 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어 강의'를 할 수도 있고 '디자인 강의'를 할 수도 있다. 글쓰기나 컨텐츠 만들기 같은 능력치는 모든 관심사 조각과 조합하여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이 조합을 만들어 나가다보면 계속 중복되게 연결이 가능한 능력치 조각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강의하기' 능력치 조각이 여러 관심사 조각과 연결되고, 또 다른 능력치 조각과도 연결이 된다. 예를 들어 디자인 하는 법을 강의할 수 있고 컨텐츠 만드는 법을 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유독 다른 조각들과 연결이 쉬운 조각들이 있는데, 이런 조각이 바로 '쓸모있는 조각'이다. 우리는 이 쓸모있는 조각들을 차곡차곡 모아 계속 여러 트랙으로 가지고 가면서 발전 시켜야한다.
관심사 조각은 많아도 괜찮지만 쓸모 있는 능력치 조각은 어느 정도 한정을 짓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능력치라는 것은 일종의 커리어로 계속 계발이 되면서 경력이 쌓이고 나의 몸값도 올라가기 때문에 내가 계속해서 절대적인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능력치 조각
능력치 조각은 쉽게 말하자면 내가 잘하는 것과 시장이 원하는 것의 교집합이다. 그 둘의 교집합에는 보수가 따라온다. 내가 암만 잘해도 시장이 원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돈을 벌 수는 없다. 연필을 아주 잘 깎는다거나, 암산을 아주 잘 한다거나 하는 재능은 시장의 수요가 충분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내 능력치 조각을 수집할 때는 내가 한 번이라도 돈을 벌어본 적이 있는 경험부터 떠올려 보면 좋다. 무언가를 가르치고 그 대가를 받은 경험이 있는가? (강의) 무언가를 팔아본 경험이 있는가? (마케팅) 나만의 창작물을 만들었는데 판매가 된 경험이 있는가? (창작, 생산)
그것이 돈을 벌게 해 준 핵심적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가진 지식이 전달되어서? 내가 고객을 잘 설득하고 원하는 것을 잘 찾아내서? 내 창작물만의 스타일이 미감적으로 훌륭해서?
능력치 조각의 코어를 파악하면 "시장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정리된다.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나는 "강의하기(영어과외)", "디자인하기(10만원짜리 로고 만들기)"로 돈을 벌어본 경험이 있었다. 각각의 능력치는 하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객단가가 낮은 일 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량한 클라이언트를 만나 돈 떼이는 일이 다반사였고, 좀처럼 가르치는 일도 정해진 시급의 장벽을 깨기가 어려웠다.
그 때 내 돌파구가 되어준 것이 관심사 조각이였다.
관심사 조각
매번 새로운 흥미가 생길 때면 나는 그 분야가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곤 했다. 꽃집에서 알바를 하며 식물이 너무 좋아졌을 때는 식물학자가 되겠다며 대학원을 알아보고, 비건 생활에 몰두할 때는 동물구조단체에서 활동가로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꽤나 진지하게 몰두하곤 했지만 - 아마 그 자아들은 평행우주 어딘가에서는 훌륭한 식물학자와 동물권 활동가가 되었으리 - 그 흥미는 길어야 6개월 이상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좌절했다. 내가 그렇게 시간과 애정을 쏟아 부은 흥미도 결국은 한 순간 식어버리는 나의 산만한 관심사에 불가하는구나.
산만한 관심사에 몰두한 그 어느 시간도 허튼 시간은 없었지만, 그때는 몰랐다. 이대로 살다가는 정말 망하는 줄 알았다.
식물에 몰두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집에서 대중적으로 키우는 왠만한 식물들의 이름과 성향을 알게 되었다. 아라우카리아, 호랑가시나무, 녹보수는 어느 정도의 빛과 물이 필요한지, 틸란드시아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포인세티아의 잎은 항상 빨강색이 아니라는 것과 남미에서 왔다는 것...
동물보호법 제 10조 1항의 4조가 무엇인지, 동물을 구조할 때 어떤식으로 학대자와 협상해야 하는지, 동물을 학대자와 격리할 때 그 법적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조항이 어디에 있는지, 시행령은 무엇이고 시행규칙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였다.
식물, 동물보호법 등의 관심사에 대해 깊이 몰두하던 시기는 지났지만 그렇게 내 마음과 머리속에서 길고 얇게, 남들이 지나칠 때 한 번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그런 조각들이 되었다.
그렇게 시덥잖은 과외와 디자인 일을 쳐내던 일상을 보내던 중 우연찮게 동시에 두 가지 일이 들어왔다. 한 가지는 견적이 200만원인 브로셔와 로고디자인 일로, 그 당시 10만원짜리 로고를 만들던 나에게는 꽤나 큰 일이였다. 클라이언트는 당시 내가 살던 지역의 국회의원 분이셨다.
동물권에 큰 뜻이 있던 분으로, 반려동물 복지를 향상할 수 있는 지역 협동 조합을 만들고자 하셨고, 그런 쪽에서 활동을 했다보니 어찌어찌 일이 나에게까지 전달이 된 경우였다. 나의 다소 아마추어틱한 포트폴리오를 전달드렸고, 마음에 드시는지 어쩐지 모르는 상태에서 커피를 한 잔 하게 되었다.
우리는 2시간 가까이 한국의 동물권에 대해 심도있는 대화를 나눴고, 지역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움직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지 토론했다.
물론 그 일은 나에게 왔다. 그 분은 디자인 실력보다도 동물권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사람이 이 일을 맡길 바랬고 내가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신기했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연달아 꽃집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고객분들이 식물관리법을 헷갈려해서, 간단하게 식물 종류별 관리법을 전달할 라벨을 제작하고 싶다고 했다. 식물이라면 뭐, 왠만한 것은 다 알고 있었다. 내용을 전달주시지 않아도 알아서 디자인까지 작업이 가능하다고 하니 일반적인 작업 단가에서 두 배 더 높은 가격으로 일을 주셨다.
물론 그 분도 내 아마추어틱한 포트폴리오를 보고는 떨떠름해 했지만, 나에게는 식물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었으니... 그 분과도 1시간 가까이 식집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베프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일들은 우연이 아니였고, 그 뒤로도 끊임없이 생겨났다. 관심사 조각이 빛을 발하는 데 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것은 확실하고 단단한 돌파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