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희생, 애착
짜장이를 입양한지 어느덧 1년이 되었다. 임시보호 기간 1년을 포함하면 함께 산지 2년이 되었다. 그 전에도 본가에서 키우던 개가 있었고, 동물구조단체에서 활동하며 스무 마리에 가까운 개를 임시보호하고 입양을 보냈다. 길게는 1년 넘게 함께 산 친구도 있었고 짧게는 두어 달 정도 함께한 친구도 있다.
사람들은 임시보호가 종료된 뒤 개를 입양 보낼 때, 어떻게 그 슬픈 일을 매번 하냐고 물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슬펐던 적이 없다. 만남에 앞서 항상 이별을 생각했고, 한 마리, 한 마리 너무나 특별한 존재였지만, 스스로를 그들이 거쳐가는 정거장이라고 생각했다.
해외입양을 가는 개들을 데려다 주며 공항에서 눈물을 매번 훔쳤지만, 그것은 예견된 슬픔 정도의 일이였다.
짜장이를 입양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였다. 내가 임시보호했던 개중에 처음으로 입양처가 나오지 않았고, 마침 파주로 이사를 하며 좀 더 넓은 공간에서 살게 된 나는 이제는 개를 입양할 수 있겠는데? 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졌다.
많고 많은 임보견들중 왜 하필 짜장이를 입양한거예요? 묻는다면 딱히 감동적인 대답은 없다. 그냥, 그 때,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 준비가 되었을 때, 옆에 있던게 짜장이여서요(짜장이가 조금 서운하려나). 하지만 우리는 결혼에 대해서도 흔히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 결혼할 시기에 옆에 있는 인연과 결혼하게 되는 것이라고. 나 역시도 죽을만큼 짜장이만을 사랑해서 짜장이여야해서 짜장이를 선택한 것은 아니였다.
좋아하는 것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이 책은 문체가 섬세해서 좋아, 이 카페는 커피에 산미가 있어서 좋아. 사랑에는 이유가 없고 겉잡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상대를 사랑하면 인생이 파국으로 갈 수 있다. 그런 경험을 해왔기에, 나는 매번 좋아하는 이유가 명확한 존재만 사랑하려고 애써왔다.
사실 짜장이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반려견과는 거리가 조금 있다. 일단 28kg가 나가는 대형견이라 육아 난이도가 최상이다. 경계심이 강해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으르렁 거리기 일쑤고, 개 친구도 유별나게 가린다. 30분만 뛰어 놀면 지쳐서 뻗어 버린다(나는 나와 매일 1-2시간씩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개를 꿈꾸곤 했다).
그저, 그 때, 내 옆에 있었고, 짜장이는 갈 때가 없었기에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나는 짜장이 입양 서약서에 덜컥 사인을 했다.
스스로가 평생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책임감이 도무지 모자랐고, 희생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연인이 사귈 때도 이런 나의 태도가 자주 문제가 되었다. 한 사람을 만나면서 다른 사람도 만나면 왜 안 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아 "다른 남자랑 데이트 해도 돼?"라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종종 던졌고(이걸 이해해준 전남친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내며), 내 에너지와 시간을 써서 상대방을 기쁘게 하려는 노력을 하기가 좀 어려웠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러했다. 아- 나는 평생 혼자 살아야겠다. 남한테 피해주지 말고 혼자 살자. 나의 희생정신과 책임감은 오직 시간이 한정되어 있을 때에만 발동되었다. 곧 죽을 병에 걸린 가족에게는 열과 성을 다하듯이, 이별이 보장된 임시보호견들에게는 밤을 새워도 산책을 꼬박꼬박 나가고, 여행을 포기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왜? 어차피 다 끝날테니까.
나에게 희생이란, 오로지 끝이 있을 때에만 상상할 수 있는 그런 것이였다.
물론, 비극적이게도 개는 사람만큼 오래 살 수가 없으니, 짜장이를 입양할 때에도 나는 이별을 예견했을지 모르겠다. 입양 후 1년이 지나니, 이제는 짜장이와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된다. 짜장이의 삶은 나의 선택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내가 돈을 못 벌면 짜장이는 굶어야 하고, 내가 아프면 짜장이는 똥 싸러 산책을 못 나간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서야 나는 조금씩 깨닫는다. 책임감이라는 무겁고 단단한 단어. 일생동안 책임을 피해서 이리 저리 도망다녔는데, 이제는 피할 수 없다. 희생이라는 농담같기만 했던 말. 희생을 하면 이상한 보상심리만 생겨, 건강하지 않아, 라고 말하기 일쑤였던 지난 날들... 짜장이의 행복을 위해 내가 무언가를 희생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놀랍다.
책임감과 희생 없는 사랑은 알맹이가 없다. 나는 내가 상대에게서 투영되어 보일 때 비로소 그 존재를 사랑한다.
짜장이가 내가 만든 화식을 맛있게 먹을 때, 그걸 만든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나 좋은 엄만가? 라는 생각들), 눈을 보여주겠다며 추워 죽겠는데 새벽 5시에 밖에 나서 짜장이가 신나하던 모습, 흔들던 그 꼬리. 그리고 우리가 함께 쌓은 무수히 많은 시간들.
2년의 시간만에 사랑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다니, 짜장이는 실로 놀라운 존재다.
내가 살고 있는 파주는 북한에 가깝다. 파베리아라고도 불리는 이곳의 오늘 온도는 영하 -13도. 짜장이에게 10만원짜리 영국 브랜드 핑크 후리스를 입히고, 나는 대충 굴러 다니는 반팔티에 후드를 입는다. 정말 춥다. 나가기도 싫다. 하지만 그는 똥을 싸야 한다. 그것은 내가 오늘 나의 편의를 희생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런 것이 사랑이구나,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