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어쩌다 보니 대부분의 통화 내용이 그렇듯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주제로 얘기하고 있었다. 통화 내용은 전반적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치부를 아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대체로 나의 치부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아는 것은 불편하다는 사실이었다. 상대방이 나의 치부를 알게 된다는 것은 나의 약점을 발목 잡히고 마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럼 동정을 받으면 괜찮을까? 아니었다. 동정하는 것은 약점이라는 것을 또 한 번 각인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동정심이란 무엇인지 궁금했다.
구글에 검색해 보니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기거나, 그 사정을 이해하고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도움을 베푸는 것'이라고 나온다. 여기서 '남의 처지를', '자기 일처럼'이라는 표현을 보고 왜 '동정'이 싫은지를 이해했다. 거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왜 남의 처지를 평가하지? 2. 1번을 전제로 절대 자기 일처럼 감히 생각할 수는 없다. 3. 결국 그 사람만이 해결해야 되는 숙제이다.
그 사람은 안 그래도 말하기 어려운 부분을 의도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상대방이 알게 되었는데 거기다가 불쌍히 여기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포착하는 순간 모욕감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치부'라는 단어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싶다. 단어가 탄생하기 전에 행동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 행위(동정)로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한 것은 분명 그 감정을 느낀 사람을 탓할 수는 없다. 딱하다고 여기며 쳐다보는 눈빛은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하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눈빛은 한 존재의 다른 한 부분 (도움을 줄 수 있는 강한 존재)을 부정당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그런 눈빛을 받는 것에 대해 당연한 것이고 심지어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눈빛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열등감이 많은 것이라고. 동정심을 옹호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많은 사람들은 강한 위치에 있고 싶어 한다. 자신이 약자에 처하고 도움을 받아햐 하는 처지는 벗어나고 싶어 한다. 대학 동창 모임만 가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다들 안 그런 척하지만 자기 자랑하느라 바쁘다. 사회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개개인은 각자의 특별함이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그런 자리가 너무나 불편하고 힘들다. 그냥 체념한 듯 조용히 듣고 있거나 아니면 나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같이 내세우기 바쁘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 둘 다 힘들다. 귀에서 피가 나거나 목에서 피가 나거나 둘 중 하나다.
인간의 이런 성향만 보고도 '사람은 베푸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걸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말 자기 일처럼 '동정'했다면 불쌍하다, 안 됐다는 혹은 딱하다는 거만한 생각보다는 힘들겠다며 공감은 하되 상대방에게 잘 헤쳐나갈 것이라는 신뢰를 줄 것이다. 괜찮다고. 그 '치부'를 한 사람의 '전부'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치부' 때문에 사람 관계에서 을과 갑의 관계가 형성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사람을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치부 말고도 존재에 대한 어떤 대단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치부는 대부분 바꾸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선택이기보단 타의적인 것들이다. 그렇기에 누군가 해결책을 대신 내주긴 어렵다. 즉, 그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안고 가야 하는 한 부분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 '치부'가 주워진 것은 사실 그 사람의 어떠한 status를 표할 수는 있지만 부정적일 순 없다. 견뎌내고 있는 것 만으로 존중받을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람으로부터 딱하다고 지적받을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