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표를 살지 말지 고민하던 한 달여의 시간이 우습게도 마음 가득 따듯한 기억만을 안고 돌아온 카리브해.
비행기에서 내려 홀로 마주한 중미의 낯선 향기는 지독히도 차가웠다. 뚱한 표정으로 호스텔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뒤적이고 있던 내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준 친구, 이리스. 그녀 역시도 혼자 떠나온 여행자였으며 여기서 지내는 동안 알게 되었다는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인종도 국적도 모두 다른 우리들은 삼시 세끼를 함께하며 웃고 뛰고 춤추며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여행 중 만남은 언제나 끝이 정해진 채로 시작되기에 각자의 여정에 따라 친구들은 다시 한 명씩 한 명씩 곁을 떠나갔다.
다시 혼자가 된 내겐 지나치게 행복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팔찌 하나가 남았다.
이리스는 섬을 떠나기 전날 밤 내 남은 여행길이 늘 행복하길 기원한다며 엄마가 직접 만드셨다는 분홍색 비즈 팔찌를 자신의 손목에서 풀어 내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노트에 집 주소와 연락처를 적어주며 리마에 오거든 꼭 전화하라고 신신당부하며 떠나갔다. 마음이 뜨거워졌다.
홀로 남은 나는 바닷가 앞 카페에 자리를 잡고 오래간만에 긴 일기를 적어보았다. 일기장 한 가득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의 이름이 적혔다. 믿을 수 없이 완벽한 날들이었다.
수영을 못하는 나를 업어서 건너편 섬까지 데려다준 너네를, 광장 한복판에서 아이유 노래를 부르게 만든 너네를, 한국에선 삼시 세끼 쌀밥을 먹는다고 하니까 믿을 수 없다며 엄청 웃더니 막상 직접 만들어주니까 맛있다고 더 달라고 한 너네를, 매일 밤 살사를 가르쳐준 너네를, 그리고 디스코테카에 데려가서 배운 대로 해보라며 손뼉 치던 너네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다. 너희를 만나서 행운이었다는 내게 너가 우리의 행운이었다고 대답해 주던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들.
혼자인 채로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침에 일어나서 수영하고, 점심 먹고 수영하고, 저녁 먹고 밤바다 걷고…. 맥주 한 캔을 들고 해변가에 앉아 쏟아질듯한 별빛 아래 찰랑이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있을 땐 정말이지 오늘 밤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래도 좋을 만큼 완벽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두려워하지 말자, 너는 생각보다 강하다.
그 어떤 상황에도 스스로를 제한하지 말자.
나는 평생 못할 거라 생각했던 바다 수영도, 다이빙도 사실 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붐비는 광장 한복판에서 춤도 출 만큼 용감하고, 걱정과는 달리 한 달이 넘도록 지구 반대편을 즐겁게 헤매고 있다.
이렇게 강한 사람이란 거 떠나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테다. 새로운 환경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한 새로운 내 모습들. 익숙한 사무실 안 좁다란 내 자리에 앉아서는 정말이지 영원히 몰랐을 테다.
앞으론 또 어떤 나를 만나게 될까. 고작 한 달 만에 이렇게나 많은 감정을 느꼈는데 이 여행이 끝날 때쯤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