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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는 여행 중 Nov 15. 2021

못 씻어도 괜찮아, 마음이 빛나니까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조식 시간. 호스트 아주머니는 넌지시 물으셨다.

‘카르타헤나까지 왔으면… 산타마르타도 가나?’


아주머니의 꾀임에 걸려들었다.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도시의 사진 몇 장을 보고는 한눈에 반해버렸다. 이미 3박어치를 선불해둔 호스텔을 버리고 가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비행기 표에 비하면 말이다.

카리브해를 보기 위해 콜롬비아 중심부에서 북쪽 끝으로 이동해왔고 다시 중심부로 돌아가야 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삼일 뒤였다. 예정대로면 카르타헤나를 여유롭게 돌아보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나 갑작스럽게 눈길을 사로잡는 도시의 등장에 고민이 되었다.


방으로 돌아가 자세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산타마르타. 이곳 카르타헤나에서 딱 4시간 거리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면 일박 이일로 마을 전체를 충분히 돌아볼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예정대로 삼일 뒤 비행기에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좋다, 가보자.


부랴부랴 짐을 꾸렸다. 여행 중에 매일 머리 감기란 사치다. 고작 하룻밤 자고 오는 일정엔 여벌 옷도 샴푸도 모두 짐이다. 선크림, 카메라, 일기장 딱 세 개의 물건과 함께 길을 나설 준비를 했다.



남미 여행 한 달 차가 되면 네 시간여의 이동시간은 우습다. 지하철을 타고 옆 동네로 놀러 가는 정도의 가벼운 마음이다. 몽실몽실한 구름이 예쁘게 자리한 하늘을 바라보며 공상을 이어가다 보면 어느새 내릴 시간이다.

도착했을 땐 구름이 더 많아져서 흐릴 지경이었지만 마을의 매력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와보기로 한 선택이 옳았다. 한눈에 반할만한 자태였다.



수많은 골목들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게 겉보기엔 카르타헤나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곳의 완벽하게 가꿔진 파스텔톤의 집과 정원과는 다르게 산타마르타의 골목은 곳곳들이 푹 패어있는 세월의 흔적과 바래고 뜯어진 페인트칠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에 지저분하고 낡았다는 실망감보단 묘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제주도 돌담 사이의 틈처럼 불완전함이 주는 특별함이 있다. 부족한 부분이 바람이 스쳐갈 공간이 되어 오히려 담을 지켜내듯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간직한 자연스러운 모습의 골목은 마을 고유의 느낌을 지켜내고 있었다.


골목들을 헤매며 한 손은 과일장수에게 산 망고 슬라이스를 입안에 밀어 넣느라 다른 한 손은 걸음걸음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멈출 가 없었다. 그러나 골목의 끝에서 탁 트인 바다를 마주친 순간 양손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놀란 얼굴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니, 지금 여기 몽생미셸이야?’


프랑스의 몽생미셸 수도원


오후 네 시, 하필이면 해가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골든 타임에 그 바다와 마주치고야 말았다.
저 멀리 몽생미셸 수도원과 똑 닮은 실루엣의 섬이 바다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여전히 그 섬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니 실제로 섬이 맞기는 한지조차 모른다. 굳이 실체를 알게 되어 마음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다.



홀린 듯이 섬이 가장 잘 보이던 해변의 정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어느새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대로 해가 바닷속 깊숙이 내려앉을 때까지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

아무래도 이틀 뒤 비행기를 놓쳐야겠다. 저 완벽히 아름다운 섬과 단 하룻밤만 함께 할 수는 없다.


취소 수수료가 얼마일지 다음 비행기는 며칠 뒤에 있는지 찾아보지 않았다. 현실로 돌아가 생각하기 전 이 환상적인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야시장을 돌며 배를 불리고 다시 섬이 잘 보이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달이 머리 위로 올라올 때까지도 저 멀리 떨어진 섬만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등대가 앞으로 펼쳐질 나의 길을 안내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호스텔로 돌아왔지만 내 가방을 바라봄과 동시에 팔려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맞다. 나는 씻을 도구도 갈아입을 옷도 가져오지 않았었다. 예약된 비행기는 십만 원, 여기 오느라 이미 날려먹은 카르타헤나 숙박비, 게다가 삼십 도가 넘는 기온에 이삼일 가량 같은 옷만 입으며 지내야 한다니…. 정말 괜찮을까.


호스텔 로비에 앉아 구비되어 있던 각종 여행 정보지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예정대로 떠날지 여정을 연장할지 어느 쪽으로도 선택이 쉽지 않아 마음을 정하기 위한 확실한 근거를 찾아 나섰다.

‘구경할 만한 거리가 없으면 돌아가고 특별한 걸 찾거든 머물자.’


다행히도, 물론 주머니 사정에겐 딱하게도, 긴 시간 애쓸 필요 없이 책자의 첫 번째 장에서 마음을 확정할 수 있었다.

국립공원 안을 이삼일 간 걷는 동안 자그마치 해먹에서 잠을 잘 수 있다고 쓰여 있는 문구를 보고는 더 생각할 것이 없었다. 프론트로 달려가서 직원에게 바로 내일도 가능하냐 물었고 비수기인 10월이었기에 문제없이 예약이 가능했다.


당장 내일이면 해먹에서 잠을 잔다니! 서울 소녀에게 해먹이란 두 글자는 그 이름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나무가 그득한 숲에 해먹 하나, 온기를 더해줄 모닥불과 핫초코, 그리고 콧노래를 흥얼대며 은하수를 바라보는 나. 내겐 이 모든 장면이 함축되어 있어 마음이 간질간질한 단어다. 설레는 마음에 좋아하는 노래 몇 곡을 추가로 다운로드 받았다. 내일 해먹 안에서 들어야지!


이렇게 또다시 계획에 없 일을 저질러버렸다. 언제나 안정적인 걸 추구하던 내가 남미에 온 후 누구보다도 충동적인 날의 연속을 보내고 있다.

여행 속 내가 나일까 아니면 일상의 내가 나일까.













내일은 어디서 눈을 뜰까요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By. 제니 (@hyeziin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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