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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의 지금라이프 Jul 30. 2024

이해와 앎의 차이

이해는 머리가, 아는 것은 몸이 

사과 맛에 대한 글을 읽은 사람이 있고, 사과를 먹어본 사람이 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한 사람은 사과 맛을 이해했고, 한 사람은 사과 맛을 안다. 


'사과는 새콤 달콤하면서 아삭한 식감이 있습니다. 덜 익은 사과는 쓴 맛이 느껴지기도 하고 아주 잘 익은 사과는 단 맛이 강하게 납니다'


사과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사과 맛이 어떨지 추측만 가능하다.  

사과를 먹어본 사람은 사과맛을 안다. 


씹을 때 식감, 혀에서 느껴지는 시큼함, 입 안에서 터지는 사과즙을 온 몸으로 느끼고 경험했기 때문에 추측하거나 이해하려는 과정이 필요 없다. 


세일즈 기술에 대한 책을 100권 읽은 사람이 있고, 세일즈를 10번 해본 사람이 있다. 

전자는 세일즈가 어떤 건지 머리로 추정했고,

후자는 세일즈가 어떤 건지 온 몸으로 경험했다. 


이 논리는 모든 곳에 통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추측과 이해'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해는 머리가 하는 것이고, 앎은 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개를 혼동하며 살아간다. 


공통적으로 겪는? 예시를 들어보자.


어떤 사업가의 성공 스토리가 담긴 책을 읽는다.

당신은 책을 읽는 동안에는 추측과 이해를 통해 어떻게 해야 성공하는지 '아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원래 상태로 리셋된다.

이 반복적 패턴으로 많은 사람들이 좌절을 겪는다.


바로 '이해'와 '앎'을 혼동하는데서 온 인지부조화 때문이다. 


사실은 리셋된 것이 아니다.

애초부터 나라는 사람은 바뀐 적도 없고 어떻게 해야 성공하는지 모른다.

단지 책을 읽는 동안 잠시 착각에 빠졌을 뿐이다.


머릿속에서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내 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이걸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 중요할까?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착각했을 때가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 때가 완전 무방비 상태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낫다. 모르면 준비라도 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할 때 무방비 상태가 된다.

휩쓸려 오는 쓰나미를 보면서도 단순한 파도라고 단단히 착각하는 사람에게 어떤 대피명령도 소용이 없다. 



처음에 사과맛이 궁금해서 책을 읽었으면, 그 다음은 사과를 먹어봐야 한다.


왜 먹어봐야 할까?


그래야 실체가 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로 이해만 하고 몸으로 알게 되지 못한다면, 그건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는 허상이다.

몸으로 경험해야만 실체가 된다. 


우리는 사과 먹기를 두려워한다.

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생존 본능에 어긋나기 때문에. 

사실 생존을 걱정하는 시기는 이미 끝났음에도, 인류 유전자에 새겨진 DNA가 그렇게 만든다.


그래서 경험은 미루고 미루고 미룬다.


'사과를 내가 직접 먹었다 잘못되면 어떡하지?'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 맛이 아니면 어떡하지?'

하며 또 다른 책을 핀다.


100번 추측과 이해를 한다고 해서 몸이 알게되지 않는다. 

몸은 사과 맛을 모른다.


사과를 먹어보는 행위는 피할 수 없는, 꼼짝 못하는 경험이다.

사과를 씹어서 목으로 넘기는 행위, 이것이 경험이다.

몸이 아는 것.


다시,

이해가 앎으로 넘어갈 때 허상이 실체가 된다.

실체가 있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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