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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의 지금라이프 Aug 14. 2024

우리는 모두 하루살이일까?



설날,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다. 엄마, 아빠, 조카, 형부, 큰 언니, 작은 언니, 나. 

다 같이 거실에 모여 엄마는 과일을 내 오셨고 작은언니와 나는 소파에, 큰 언니와 형부, 아빠는 과일이 놓여있는 작은 상을 둘러싸 앉아있었다. 

아빠는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아빠의 주제는 늘 똑같다.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배부른 돼지가 안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회찬의 죽음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등등. 사람만 모였다 하면 이야기를 스멀스멀 시작한다. 


이날의 주제는 이름하야 ‘인공지능 시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였다. 



“사람은 말이야 늘 대비를 해야 돼. 특히 요즘같이 인공지능 시대에는 인간이 점점 할 게 없어진다 이 말이야. 나중에는 다 로봇이 해 먹을거라고. 그런데 그 때가 되어도 유일하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게 있어.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창작이야. 특히 글쓰기. 글쓰기는 인간의 경험에서 나오는 창작물이기 때문에 로봇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내가 끼어든다. 

“로봇도 글 쓰는데? 데이터 다 집어넣으면 로봇도 글 써.”



아빠가 손사래 치며 말한다. “에이! 그거랑 인간이 쓰는 거랑 다르지. 아무튼, 요즘엔 평생직장도 없고 언제든지 자기가 인생에서 뭘 할 건지 늘! 대비를 해야 한다고. 안서방, 자네는 하고있나...?”



“.......”



큰 언니가 방어하듯 끼어든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기 바빠 죽겠는데 뭘 준비해.”


작은언니가 덧붙인다.


“그래, 우린 다 하루살이야. 무슨 대비야.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아니, 아빠, 형부 컴공과야. 아빠보다 더 잘 알걸?” 


아빠는 웃어 넘겼지만 대화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에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아빠의 말에 동의하며 듣고 있었지만, 나 외에는 누구도 아빠 말에 공감하지 않았고(아마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얘기에는 관심도 없었다. 

스스로를 하루살이라고 생각하는데, 인공지능이 다 무슨 소용일까. 

아빠 혼자 말하고 나만 가끔씩 호응해주는 정도로, 그렇게 단독 연설이 끝났다. 

아빠 타임이 끝난 후에  난 방에 들어갔고 언니들의 토크 타임이 시작되었다. 

코 필러와 코 수술에 대해 열띤 논의를 하고 있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쓴 건, 바로 작은 언니가 한 말, “우린 다 하루살이야”라는 발언 때문이다. 


사실 이 말을 듣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물론 평소에 작은 언니의 라이프 스타일을 항상 봐왔기 때문에, 아빠의 인생관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스스로 ‘하루살이’라고 말하다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정말 하루 벌고 하루 사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아니 볼 생각도 여유도 없는, 인공지능 따위는 나랑 상관도 없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며, 뉴스는 오로지 연예면, 시사는 주변 사람에게 주워듣는 정도, 나를 피곤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방어막을 치고 오로지 나에게 즐거움만 주는 일에만 관심 갖는, ‘배부른 돼지’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 나는 왜 인공지능을 알아야 하고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향해야 하며, 내 머리를 아프게하는 생각들을 해야 하고, 시사를 알아야 하고 나를 피곤하게 하는 것들과 단절되지 않게 해야 하고, 나에게 즐거움을 주지 않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 누구는 스스로를 하루살이라고 칭하며 매일을 어제와 같은 오늘로 살아가고, 다른 누구는 매일이 늘 새롭고 소중하게 느껴지고 성장의 연속을 경험하며
살아가는가? 


  


아빠와 나는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있고 언니 둘은 아니다. 둘 차이를 단적으로 비교하자면, '인생 뭐 있다' vs '인생, 뭐 있어?'로 표현할 수 있다. 

같은 집에서 자랐어도 이렇게 다른 건, 정말 타고난 성향 때문이라는 걸 방증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첫 째거나 둘 째였으면 달랐을까? 내가 지금의 인생관을 갖게 된 것은 대학교 전공의 영향이 크다. 대학교에서 삶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다만 복수전공을 안 한 것이 조금은 후회되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같은 대학교, 같은 전공을 택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전공을 택하게 된 이유는 초등학교 때 큰 언니가 시켜준 ‘튼튼영어’ 때문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계속 영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전공도 영어영문학 아니면 다른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또 내가 독서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작은 언니 때문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였던 당시에 작은 언니의 책장에는 김영하책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나는 자연스레 그 중 하나를 꺼내 처음 독서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뒤로 나도 김영하 팬이 되었으며 최근 ‘알쓸신잡’으로 매니아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던 김영하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져 조금 질투가 나긴 했지만 그만큼 더 자주 볼 수 있어 좋기도 하다. 



나는 가족 구성원들 모두에게 조금씩 영향을 받았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런데 언니 둘과 나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지향하며 살고 있다. 

나는 절대로 하루살이가 아니며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루살이. 왜 이렇게 나한테는 끔찍한 소리로 들릴까? 내가 아직 덜 큰 것일까? 뭣도 모르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패기로 세상에 대드는 것일까? 


독서와 경험을 더 해봐야 할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점점 이 두 종류로 사람들이 양극화 되어가고 있다. 
매일이 똑같은 사람들과, 매일이 새로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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