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기름
A: 주재원이세요?
나: 아니요...
A: 아 그럼 남편분이 혹시 일본인?
나: 아니요, 한국사람이에요.
A: 아, 한/한 부부가 일본에 와서 사는 거 보니 일본어를 잘하나 보다 그래도~
나: 전혀 못해요...
A: 그럼, 왜?....
일본에 이사 와서 모르는 한국인을 우연히 만나면 거의 항상 저런 패턴으로 처음 대화가 시작한다. 심지어 일본인들도 한국인임을 밝히면 주재원이거나 남편이 일본인일 거라고 예상하고 말할 때가 많다. 이제는 설명하기 조차 귀찮다. 이 곳에 사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여기서 유학을 했다가 정착하거나, 일본인과 혼인을 했거나, 주재원이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서양권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일본에 아.무.런. 연고도 없이 와서 생활하는 한/한 부부는 정말 드물다. 간혹 가다가 우리랑 비슷한 배경의 용감한 한국인을 만날 때가 있는데, 대부분이 싱글이거나 신혼이다. 일본에 큰 관심도 없고, 이곳 생활을 지원해주는 회사도 없고, 일본어도 못하고... 그런데 미취학 나이 애가 둘. 내가 생각해도 대책 없기는 하다.
주재원이 참 부러울 때가 많다. 금전적으로 회사에서 집과 자녀 교육을 책임져주는 점도 그렇지만, 제일 부러운 점은 이 곳에 언제까지 있을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떠나는 게 싫고 좋고를 떠나서, 미래에 내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은 현재를 살아감에 큰 도움이 된다. 몇 년 후를 내다보고 계획할 수 있으니 말이다.
대책 없이 와서는 조금 살다 보니 이곳에 익숙해진 나 자신을 발견한다. 재작년만 해도 내 몸뚱이가 살고 있는 일본이라는 현실을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어쩌다가 이 곳에 와있지?'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 곳의 단조로움, 아날로그적인 생활, 맛있는 음식, 깨끗한 거리, 친절한 사람들... 여기를 떠나면 그리울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막상 살고 싶은 다른 나라가 없어지고 나니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영국마저 난리가 났으니 말이다) '이 곳에 정착을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다.
'정착'을 떠올리기조차 하는 이유는, 이곳을 너무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이동에 지쳐서가 더 클 것이다. 나는 중학교 때 보딩스쿨로 유학 간 이후, 4년 이상을 한 곳에 산적이 없다. 보딩스쿨 4년 (그것도 학년이 바뀔 때마다 매년 기숙사 방을 바꿔야 했다), 대학교 4년, 뉴욕 3년, 한국 친정 1년, 한국 신혼집 3년, 런던 2년, 이제 도쿄 4년 차. 역마살도 이런 역마살이 없다. 이제는 내 맘대로 벽에 구멍 뚫어 그림도 걸어보고 맘껏 취향을 드러내고 집이란 곳에 마음을 붙이고 정착하고 싶다.
하지만 이곳에 만약 계속 살게 된다면 나도 아마 영주권 정도나 소유한 내 나름의 자이니치가 되어있지 않을까? 이상하게도 미국 시민권이나 영국 시민권과는 다르게 “일본 시민권”을 생각하면 왠지 모를 죄책감 같은 게 느껴진다. 미국인이 되었거나 영국인이 되었다면 그냥 생긴 모습 하나 갖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조금 더 쉬워서였을까? 일본 국적은 누가 접시에 대령해줘도 취해서는 안될 것만 같은 느낌이 있다. 그렇게 되면 생긴 거로만 판단하기가 어렵기에 누가 뭐라 안 해도 스스로가 조국을 배반한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예전 자이니치들도 그런 이유로 매우 오랜 기간을 대대손손 이방인으로 살았었을 것이다.
이방인의 생활에 지칠 때가 많다. 그래서 멀쩡한 직업과 어렵게 받은 취업비자를 팽개치고 10년 전에 뉴욕에서 한국으로 들어갔더랬지. 하지만 한국 현지 생활은 유학시절 방학 때 잠시 부모님 집에 놀러 가 느끼는 '꿈만 같은 재밌는 곳'과는 또 달랐다. 한국 생활에 지쳤을 때쯤 런던으로 갔을 때 그렇게 숨통 트일 수가 없었는데, 이방인 생활의 권태기가 또 왔나 보다. 얼추 10년에 한 번씩 오나보다.
5년 안에는 어딘가 정착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 여긴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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