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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Sep 15. 2023

입을 수 없는 옷이 과연 가치가 있을까?

Stories: Fashion and Dadaism

입을 수 없는 옷이 과연 가치가 있을까?

Stories: Fashion and Dadaism 




예술계의 타노스, 다다이즘(Dadaism). 타노스는 그나마 세상의 절반은 살려주는 자비라도 있었지만, 다다이스트들은 달랐다. 기존의 전통과 관습은 물론이며 제도와 규범까지 전부 부정하려 했기 때문.

하지만 모든 선택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다다이즘의 사연이 궁금하다면 지금부터 이어질 내용에 주목하기를. 덤으로 패션계에 잠입 중인 다다이스트들의 행보까지 낱낱이 추적할 것이니까.






고쳐쓸 수 없다면 버려라


1916년, 스위스 취리히의 주점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였다. 프랑스의 시인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를 중심으로 한 이 모임은 기존의 예술 형식에 지루함을 느낀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탈출구였다. ’다다‘는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사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1차 세계 대전을 피해 취리히로 망명을 온, 다시 말해 전쟁과 징집을 피해 모국을 떠나 도망 온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에겐 언제나 억압에 대한 분노와 자유에 대한 갈망이 서려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다이스트 모임. 앞줄 맨 왼쪽 단안경을 착용한 사람이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 ⓒen.wikipedia.org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의 외관 ⓒtheatreartlife.com
1920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 1회 국제 다다 박람회의 풍경 ⓒwsj.com




다다이스트들에게 동시대 예술이란 ‘고쳐 쓸 수 없는 것’이었다. 비단 예술뿐만도 아니었다. 국가와 사회, 이를 지탱하는 전통과 제도, 규율까지 모두 마찬가지였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그들의 꿈과 희망을 전부 앗아가 버렸으니... 이런 사상도 어찌 보면 전쟁의 참상 중 하나였을 수 있겠다.

고쳐 쓸 수 없다면? 버리자! 그렇게 그들은 그동안의 예술을 과감히 버리기로 작정한다. 관습과 체제에 대한 절연을 선언하고 혼란과 무질서를 그대로 구현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렇게 허무정신과 반항 정신으로 무장한 다다 운동은 반문명과 반이성, 반도덕 등 현실 전복의 추구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 예술 비평가(1919-20) ⓒthecollector.com




하지만 다다는 그들의 바람처럼 예술을 ’파괴하지‘ 못한 채 단명했다.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다 파괴해버리자. 그리고 그 다음은? 그들에겐 바로 이 다음이 없었다. 게다가 예술을 향한 독특하고 맹렬한 제스처들은 오히려 그 자체로 예술화되는 지점에 도달해 버렸으니… 그렇게 예술을 붕괴시키려 한 다다이즘은 스스로 예술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알고보면 별 의미 없는 말


‘다다’는 프랑스어로 아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를 지칭하는 단어인데, ‘까까’, ’ 바바‘처럼 아이들이 쓰는 유아기적 언어의 일종이다. 때문에 ’다다이즘‘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아이의 옹알이, 즉 별 의미 없는 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게 되는데, 깊은 고찰 없이 놀이처럼 예술을 다루겠다는 다다이스트들의 의지가 엿보이는 작명이다. 그래서인지 다다 운동의 피를 수혈받은 작품들은 그 이름처럼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무의미한 단어들로 구성된 시 Karawane과 저자인 후고 발(Hugo ball)의 낭독 모습 ⓒen.wikipedia.org



‘평범한 사물을 결합시켜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 사진가 만 레이(Man Ray)의 1921년 작, <선물>은 작가의 기발한 다다적 발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는 벼룩시장에서 구매한 다리미에 구리 못을 붙여 물건이 가진 유일한 기능을 삭제시킨다. 만약 이 다리미를 진짜로 사용한다면... 대체 옷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만 레이는 이 무시무시한 다리미를 직접 사용해 본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나는 언젠가 이것으로 옷을 찢어본 적이 있는데, 한 흑인 소녀에게 이걸 입고 춤을 추어달라고 부탁했다. 움직일 때마다 찢어진 틈 사이로 그녀의 몸이 보였다. 마치 움직이는 브론즈 같았다. 정말 아름다웠다.”



만 레이, 앵그르의 바이올린(1924)(좌) 선물(1921)(우) ⓒthehindu.com




당시 다다이스트들은 좀 더 급진적인 방향성을 꾀하기 위해 위험한 시도들을 반복했다. 목적은 하나였다.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것.’ 그리고 이는 예술뿐만 아닌 실생활에서도 요구되었다. 그들은 마약과 섹스 등의 위반 행위를 즐기고 규범을 해체한다는 명분으로 모욕적인 제스처를 일삼았으며, 때로는 신성모독까지 서슴지 않았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점잖은 사회가 결국 신뢰를 잃고 오히려 붕괴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모나리자 엽서에 수염을 그린 뒤샹(Marcel Duchamp)의 작품 L.H.O.O.Q (1964) ⓒthecollector.com




전성기가 십 년도 채 못 되는 짧은 운동이었지만 그 영향력만큼은 무시무시했다.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 영화까지도 다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었으니까.

기성품을 작품인 양 전시장에 가져다 두는 레디메이드(Ready-made) 역시도 다다의 발상 중 일부다. 또한 문학에선 단어나 글자를 무작위로 배열하여 글을 짓는 경향으로 나타났으며, 의미 없는 대사를 읊거나 청중에게 물건을 던지는 기행동이 연극 공연 중에 벌어졌다.

그렇다면 영화에서의 다다는 어떤 모습일까? 극을 이루는 기본인 서술적 플롯과 연속 편집을 거부하고, 필름을 조작해 그로부터 탄생한 추상적 이미지 자체를 즐기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패션 속에 움튼 다다이즘의 씨앗


이번엔 패션계에 잠입 중인 다다이스트들의 행보를 추적해 볼 차례다. 반미술로 대두되는 다다이즘과 안티패션은 기존의 형식을 거부한다는 지점에서 드라마틱하게 이어지는데, 때문에 그들의 패션 역시도 충격과 난해함을 동반한다.



LOEWE 2022 FW, JACQUEMUS 2015 FWⓒvogue.com




릭 오웬스


ⓒnews.artnet.com



매해 악명 높은 컬렉션으로 우리를 충격에 몰아넣는 릭 오웬스(Rick Owens). 하지만 이건 특급 칭찬이다. 그의 심상치 않은 능력 덕분에 패션계는 도무지 지루해질 틈이 없으니.

의복의 기본 역할을 무시하는 건 물론이며,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실루엣과 설명 없인 절대 착용할 수 없는 옷들이 릭의 쇼에선 거의 매해 등장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에게 ’인체‘는 더 이상 탐구의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작품을 관객에게 선보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실용성이나 편리함 따윈 챙길 필요가 없다. 대신 작품이 자신의 이상과 얼마나 가까워지는지가 그에겐 더 중요한 쟁점일 것이다.



2016 SS
2015 FW, 2014 SS ⓒvogue.com




인간 백팩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2016 SS와 금기시되어왔던 남성 누드를 원시적으로 표출한 2015 FW 컬렉션은 그가 전복과 반항을 추구하는 다다이스트의 후예라는 걸 확실히 보여준다. 가방처럼 ‘운반’되는 인간들과 수치심을 모르는 전라의 소년들, 그리고 그 순수함. 확실히 릭 오웬스는 패션 그 이상의 무언가로 우리와 소통하고 있다.






레이 가와쿠보


ⓒnewyorker.com



옷이 꼭 아름다울 필요가 있는가? COMME des GARCONS의 수장인 레이 가와쿠보(Rei Kawakubo)는 보편적인 미에 대항하기 위해 익숙한 아름다움을 철저히 배격한다. 고의로 옷감을 훼손하고, 신체의 굴곡과 반대로 실루엣을 잡거나, 얼굴이나 팔, 다리를 위해 뚫린 구멍들을 예상치 못한 곳에 위치시켜 둠으로써 미감은 물론 온전한 의복의 역할까지 할 수 없게 만든다.



2023 FW, 2021 SS
2015 FW, 1997 SS ⓒvogue.com




“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옷을 만들려고 한다.” 그녀의 옷은 다다이스트가 그토록 원하던 걸 모두 지니고 있다. 무질서와 불확실성, 혼돈으로 가득 찬 카오스의 세계 말이다. 게다가 이젠 상상으로도 닿을 수 없는 옷을 만들겠다는 포부까지 밝혔다.

여기서 문득 궁금해진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옷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옷임을 증명해야 할까? 아, 이러면 가능하다. ’디자이너인 레이 가와쿠보가 만들고 그녀가 옷이라 명명했다’고 하면 된다!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간에.






빅터 호스팅과 롤프 스뇌렌


ⓒarts.ac.uk



빅터 호스팅(Viktor Horsting)과 롤프 스뇌렌(Rolf Snoeren) 듀오의 예측 불허한 컬렉션을 만나볼 수 있는 브랜드 Viktor & Rolf. 그들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패션이 가진 온갖 선입견들에 맞서 온 패션계의 투사다. 싸움의 이유는 명확하다. 패션과 예술 사이의 경계를 허물기 위함이다. 때문에 그들의 런웨이엔 가끔 당황을 넘어서, 실소가 터지게 하는 엄청난 비주얼들이 출현한다. 허나 맘껏 조롱해도 괜찮다. 굳이 예술적으로 해석하려고 고상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바라 볼 필요도 없다. 이는 마치 다다이스트가 건네는 농담과 같은 것이니.



2023 FW, 2008 FW



그들의 2017 FW 시즌은 그야말로 경악스럽다.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다. 무대 위의 모델들이 전부 거대한 인형탈로 얼굴을 감추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충격적인 컬렉션을 대변하기 위한 Viktor & Rolf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 인형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이 부패한 세상에 나름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2017 FW ⓒvogue.com



이 컬렉션이 뻔한 코미디가 아닌 이유는 쇼의 중반에 비로소 나타난다. 인형들의 런웨이가 끝난 후 인형탈을 벗은 모델들이 같은 의상을 입고 다시 출현해, 관객에게 프로페셔널한 자신의 본모습을 확실히 보여주었던 것. 이 모든 게 단지 ’쇼‘에 불과하다는 걸 제대로 각인시켜 주기 위해.





마틴 마르지엘라


팀 마르지엘라, 빈 의자는 마틴 마르지엘라의 자리 ⓒvogue.com



기존의 관습과 규칙을 파괴하는 해체주의 패션의 선구자,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 사실 이쪽 계열에선 이 사람을 따라잡을 자가 없다. 그의 초기 커리어는 익숙함을 왜곡하고 이상적인 미를 부정하는 다양한 실험들로 가득하다. 스티치를 마감하지 않거나 옷의 안과 밖을 반전시켜 혼돈을 조장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는 성공 이후에도 철저한 익명성을 유지하며 개인의 영광 대신 팀의 공으로 모든 성과를 돌린다. 혼자서는 세상을 지배하는 편견과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진작에 깨달아서 일까. 이런 그의 태도는 그동안 예술계를 이끌어왔던 모든 운동과 닮아있다. 집단을 이루고, 함께 하나의 사상을 공유하고, 마침내 원하는 결과로 향해가는 과정들. 이것이 바로 ‘마르지엘라 운동’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2001 SS, 1999 SS ⓒvogue.com
1998 SS, 1997 FW ⓒvogue.com



마르지엘라에게 있어 옷이란 이미 인간의 ‘몸’으로부터 해방된 존재였다. 특히 1998 SS 컬렉션에선 모델에게 옷을 ‘입히는’ 대신 옷을 손에 ’들고‘ 런웨이를 걷도록 연출했는데, 이는 인간에게 종속된 옷의 개념을 보란 듯이 배반하는 그만의 발칙한 아이디어였다. 몸을 위해서만 기능하는 옷이 아닌, 옷 자체의 독립적 위치를 강조하기 위한 특별한 시도였던 것이다.






입을 수 없는 옷이 과연 가치가 있을까?


이처럼 그 본질과 역할을 벗어난, 애초에 ’입을 수 없는’ 옷들은 대체 어떤 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을 설명하는 데에 반드시 다다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듯 다다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인물들이다. 문명과 목숨이 하찮게 스러지고 그동안 신처럼 숭배했던 예술품들이 폭발과 화재로 증발해 버리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으니, 그들이 느꼈던 무력감과 공포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터.



막스 에른스트,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1922) ⓒbrainart.co



하지만 그들은 모든 걸 포기하는 대신 더 강렬한 움직임을 택한다. 그것이 비록 ‘파괴’라는 극도의 부정으로 향했을지라도 말이다. 죽음 앞에서의 필사적인 몸부림, 다다의 허무주의와 저항 정신엔 생존을 향한 처절한 갈망이 서려 있다.

패션도 마찬가지다. 획일화의 끝은 가치의 종말이다. 옷의 경계를 부수어가는 몇몇 디자이너의 행보는 반대로 옷의 생존을 위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옷의 의미를 존속시키기 위해 입을 수 없는 옷을 지어 간다는 소리다. 안티 패션도 결국엔 패션이다. 패션계의 다다이스트들은 우리를 패션계에 영원히 묶어두기 위해, 기꺼이 옷을 포기한다. 세상 그 누구보다 옷을 사랑하기에.




Rick Owens 2017 FW ⓒmedium.com




다다이스트이자, 프랑스의 작가 조르주 리브몽 데세뉴(Georges Ribemont-Dessaignes)의 일기엔 이러한 구절이 적혀있다.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추한 것은 무엇인가? 위대하고 튼튼하고 약한 것은 무엇인가? 모르겠다. 나 자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나는 이에 덧붙인다. 예술은 무엇인가? 패션은 무엇인가?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절대 풀리길 바라지 않는다. 앞으로도 이렇게 영영 풀리지 않을 질문으로 남아, 끝까지 우리를 궁금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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