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Sep 26. 2023

헬무트 랭 없는 Helmut Lang

Brand LAB: HELMUT LANG

Brand LAB: HELMUT LANG

헬무트 랭 없는 Helmut Lang




한 시대를 풍미한 디자이너, 헬무트 랭(Helmut Lang). 그가 레이블을 떠난 지 18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영향력이 깃든 옷을 입는다.


©grailed.com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터 도(Peter Do)가 새로이 그의 세계를 이어받은 지금, 다시 헬무트 랭의 발자취를 따라가 곳곳에 놓인 그의 흔적을 찾아보자.






헬무트 랭, 그는 누구인가


헬무트 랭은 1956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이혼한 부모 곁을 떠나 외조부모에게 보내진 그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악 지대의 람자우 암 다흐슈타인(Ramsau am Dachstein)이라는 마을에서 성장했다.


©wikipedia.org

디자이너 헬무트 랭이 유년기를 보낸 비엔나 Ramsau am Dachstein 마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 시절이 있기에 우리가 기억하는 ‘디자이너’ 헬무트 랭이 있다. 등산화를 만들던 그의 할아버지 덕분에 랭은 신발 제작을 배웠고, 당시 머물던 알프스 지역의 자연 속에서 훗날 그가 선보일 미니멀한 디자인의 기반을 쌓을 수 있었다.


그 후 아버지가 거주하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새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하지만 그 안에서 그 어떤 유대감도 그 안에서 느끼지 못했던 랭. 그렇게 18살이 된 그는 가족을 떠나 웨이터 일을 하면서 비즈니스 스쿨에 다니기 위해 학비를 벌었다. 당시 본인의 경제 사정으로는 취향에 맞는 옷을 살 수 없어 원하는 옷을 직접 디자인하여 제작 의뢰해 입었다고. 그러다 비엔나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옷이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나면서, 자연스럽게 패션 업계에 뛰어들게 된다.



©yahoo.com




헬무트 랭이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한 당시에는 맥시멀리즘의 대표 주자 Jean Paul Gaultier, Karl Lagerfeld가 패션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그러나 랭의 철학은 컬렉션 옷을 실제 생활에서도 입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자신의 소신대로 미니멀하고 캐주얼한 일상복을 만들어 나간다. 그가 기존의 관습과 형식을 답습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관철시킬 수 있었던 건 패션을 정규 교육 없이 독학으로 접근했기 때문이 아닐까.






혁신의 아이콘


패션계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는 헬무트 랭을 향한다. 옷뿐만이 아니라 옷을 보여주는 방식 또한 남달랐던 그.


Helmut Lang, 1998



98년도, 뉴욕을 대표하는 노란 택시 위의 광고판에서 ‘HELMUT LANG’로고를 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그리고 패션 디자이너 최초로 다큐멘터리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에 광고를 하기도 했다. 재밌는 점은 브랜드 광고에서 옷이 없었다는 것.



©are.na

잡지 <National Geographic>에 실린 Helmut Lang 광고 



CD를 통해 인터넷으로 쇼를 동시에 생중계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헬무트 랭이 뉴욕에서 컬렉션 쇼를 선보이기 3일 전 결정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행보였으며, 이는 전 세계 패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wwd.com

Helmut Lang 98/99 WINTER 쇼 CD-ROM


분야를 가리지 않고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즐겼던 헬무트 랭, 1999 AW 광고 캠페인의 얼굴은 사진 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가 촬영한 조각가이자 설치 미술가 루이즈 부르주와(Louise Bourgeois)였다.


ⓒpinterest.co.kr

Helmut Lang 1999 AW ad. Louise Bourgeois photographed by Robert Mapplethorpe, 1982. 



미국의 개념 미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와는 함께 향수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전체적인 아이디어는 사랑하는 이의 향을 담아서 만드는 것이었다고. 이 향수는 연인이 시트에 남긴 향기의 감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i-d.vice.com

Jenny Holzer for Helmut Lang fragrance ad, 2000. 

ⓒhelmut-lang-archive.tumblr.com

Helmut Lang SS 2000



남녀의 경계를 나누지 않고 중성적인 디자인의 선구자였던 랭은 남성과 여성 컬렉션을 단일 런웨이에서 처음 선보인 디자이너 중 한명이기도 하다.



ⓒhelmut-lang-archive.tumblr.com

Helmut Lang SS 1999 






본질에 집중하는, 절제된 미학


헬무트 랭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다.


ⓒhttps://be-in.ru

Helmut Lang 1998 FW Fall/Winter 



사실 헬무트 랭은 단순히 미니멀리스트보다는 에션셜리스트(Essentialist)로 불리는 것이 더 적확하다. 불필요한 것들을 양적으로 제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적은 것이 더 나은 것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사물의 순수한 본질을 이끌어내는 힘을 보여줬으니까.



ⓒvogue.com

Helmut Lang 1998 FALL



본질에 집중한 헬무트 랭의 패션은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에 존재한다. 과시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일상적 편안함에 방점이 찍힌 옷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적합한 옷, 언제나 유효할 수 밖에 없는 패션의 최고 가치다.





아카이브하면 빠질 수 없는 브랜드


여전히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는 헬무트 랭 시절의 대표적인 아카이브 피스들. 그가 브랜드를 이끌던 2005년 이전의 컬렉션 옷들은 수천 유로를 웃도는 가격에 리셀되고 있을 정도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https://be-in.ru

Helmut Lang 1998 FW



방탄 조끼, 페인트가 흩뿌려진 청바지, 본대지 스트랩, 투명한 탑, 반짝이는 비닐 바지 등. 전형적인 옷에 실용적인 요소들을 더해 새롭게 재탄생시켰다.



ⓒtrussarchieve.com

Helmut Lang 페인터 진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알렉산더 맥퀸 1999 

ⓒsumunage.com

M69 FLAK JACKET Helmut Lang 1999 FW 

ⓒnssmag.com




헬무트 랭의 아카이브만을 연도 순으로 정리한 책도 존재한다. 그만큼 예술적 보존가치가 있는 랭의 디자인 미학.



ⓒprintings.jp

1986-2005






디자이너 헬무트 랭 이후의 Helmut Lang


거대 럭셔리 그룹의 주도로 여러 패션 브랜드들의 공격적인 인수 합병이 유행했던 90년대 말 패션계. 헬무트 랭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99년 프라다 그룹에 자기 지분의 51%를 매각해 새로이 성장을 도모하려 했으나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후 2004년 헬무트 랭은 나머지 지분을 프라다에 모두 매각하고 Helmut Lang을 떠난다. 다양한 디렉터들이 Helmut Lang에 잠시 머물렀지만 그 누구도 과거의 영광을 온전히 다시 불러오진 못했다.


그럼에도 기억할 만한 유의미한 이름이 있으니, 바로 Hood By Air의 수장 셰인 올리버(Shayne Oliver)다. 레이블 최초 게스트 디자이너로 영입됐던 그의 2018 SS 컬렉션은 충실하게 헬무트 랭이 있던 시절을 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신의 색깔도 유지하면서 말이다.


ⓒvogue.com, ⓒdazed.com

Helmut Lang 2018 SS by Shayne Oliver 



관능미를 더해주는 브라와 벨트, 브랜드 로고가 그려진 신문지 백, 가죽을 활용한 부츠 샌들, 아크릴 박스 클러치 백 등. 새로운 세대를 위한 아이템으로 쇼를 빼곡히 채우며 과거의 헬무트 랭을 소환하고 현재, 더 나아가 미래의 Helmut Lang까지 제시한 쇼였다.






피터 도의 Helmut Lang이 보여준 것


디자이너 헬무트 랭 없이 Helmut Lang을 다시 ‘쿨’하게 만들기.

새로이 헬무트 랭을 이끌게 된 젊은 디자이너, 피터 도(Peter Do)에게 주어진 미션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디자이너를 재해석해야 하는 부담스럽지만,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된 그의 Helmut Lang 2024 SS 데뷔 컬렉션은 단언컨대 뉴욕 패션 위크의 화두였다. 다들 그가 어떻게 Helmut Lang을 재해석해서 풀어낼지 궁금해했으니.



ⓒnssmag.com

Peter Do 



‘BORN TO GO’라는 테마 안에서 시가 적힌 콘크리트 바닥 위를 거니는 모델들. 시의 출처는 베트남계 미국인 시인 오션 브엉(Ocean Vuong)이었다. 베트남 출신인 피터는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 위에서 Helmut Lang의 세계를 펼쳐내기를 시도했다.



ⓒcnn.com




기존 헬무트 랭 아카이브를 레퍼런스함과 동시에 피터 도의 특기인 섬세한 테일러링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dazed.com




어깨를 타고 흘러나와 허리를 감싼 흘러나와 노란색, 핑크색의 끈은 마치 택시의 안전벨트를 맨 모습을 연상시킨다. 본디지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활용했던 과거 헬무트 랭에 대한 존경심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디테일.



ⓒdazed.com



헬무트 랭은 이번 컬렉션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피터 도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헬무트 랭이 (내가 만든 컬렉션을 보고)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다. 줄곧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그의 유산에 뿌리와 계속해서 대화를 하고 있다. 실제로 그를 만나거나 이야기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브랜드에 대해 얼마나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정의롭게 해나가고 싶은지는 알고 있다.”





제2의 인생, 예술가로서의 헬무트 랭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고 있지 않다. 이제는 나의 행복을 찾고 싶다”며 2005년 패션계를 떠난 헬무트 랭.



@h_lang_

아티스트 Helmut Lang 인스타그램 

ⓒculturedmag.com

Lang’s broken hearts and other injuries (working title), 2019-2022, Artist Helmut Lang in his East Hampton studio



예술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새로운 길을 향해 여전히 나아간다. 단지 표현 수단이 옷에서 조각과 설치물로 바뀌었을 뿐.





헬무트 랭의 레거시


확실한 건 우리는 여전히 헬무트 랭이 영향력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 전에 없던 것들을 보여줬던 그의 아카이브는 여전히 생동력이 지닌 채 혁신의 정신으로 살아 있다. 누군가의 옷장 속에서, 인터넷을 서핑하는 패션 애호가의 화면에서 혹은, 새로이 다음 시즌의 영감을 찾는 젊은 디자이너의 무드 보드 속에서. 그렇게 헬무트 랭의 레거시는 높은 곳에서 새로운 곳을 향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 어떤 굽이친 곳도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그 무엇보다 헬무트 랭스럽게!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jentestore 바로가기

작가의 이전글 오렌지가 먼저일까 오렌지 색이 먼저일까? (에르메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