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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Sep 22. 2023

오렌지가 먼저일까 오렌지 색이 먼저일까? (에르메스)

Stories: Fashion and Color Orange 

오렌지가 먼저일까 오렌지 색이 먼저일까?

Stories: Fashion and Color Orange




‘공감각적 심상’. 이 문구를 읽는 것만으로도 수능 언어 영역의 PTSD가 오지만, 사실 이 공감각은 대단한 게 아니다. 쉽게 말하면 한 감각이 다른 감각과 공유되는 것인데, 숫자에서 색이 보인다거나 소리에서 맛이 난다거나... 대충 이런 식이다. 물론 이 감각이 절묘하게 맞물려 극도의 케미를 이루게 된다면, 그 어마어마한 활용성 덕에 능력자로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그건 전 세계의 1%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럼 이 경우는 어떨까? 오렌지색을 보면 신맛이 느껴진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공감각의 일종이긴 한데 단, 조건이 있다. 오렌지라는 과일의 존재 자체를 몰라야만 한다. 뭐야, 이건 공이야? 하며 보자마자 뻥 차버릴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이라면 그럴 일은 없기에, 우리는 그저 경험적 정보를 토대로 오렌지색만 보면 입맛을 다시게 되었다는 게 결론이다. 그렇다면 과일 오렌지를 빼놓고선 오렌지 색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걸까? 아니다. 할 수 있다.






오렌지가 먼저일까 오렌지 색이 먼저일까


하지만 오렌지 컬러를 이해하려면, 먼저 과일 오렌지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적을 치려면 적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게 기본이니까.

우선 오렌지는 신맛과 단맛, 그리고 약간의 쓴맛이 나는 과일로 엄청난 품종과 교잡종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건 네이블 오렌지(Navel orange)란 종이다. 대신 주스엔 발렌시아 오렌지(Valencia orange)가 사용되는데 이유는 과즙이 풍부해서라고.



네이블 오렌지(좌)와 발렌시아 오렌지(우) ⓒunivela-morocco.com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과연 과일 오렌지가 먼저일까, 오렌지 색이 먼저일까? 정답은 오렌지 색이 먼저다. 다만 아직 과일 오렌지가 전파되기 전이었던지라, 당연히 명칭이 달랐다. ‘어두운 노란색’, 혹은 ‘금색’, 심지어 ‘빨강+노랑’까지 부르기 편한 대로 마구 불려왔던 것.

이후 16세기, 중국에서 넘어온 오렌지가 유럽에 전파되기 시작했고, 오렌지 나무는 열매가 달리는 모양새가 아름다워 결실과 부의 상징으로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엉겁결에 오렌지를 닮은 오렌지 색은 이때부터 비로소 ’오렌지‘란 이름으로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



1920년대의 오렌지 광고 ⓒwdcvalencia2022.com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오렌지 색 역시도 부와 다산을 상징하게 되었다. 또한 태양의 색과도 비슷했기에 용기와 힘을 의미하기도 했다. 실제 색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빨강 염료와 노랑 염료를 섞어 이루어지기에, 일출과 일몰까지의 태양빛을 전부 담아내는 낭만적인 색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울 시민에게 오렌지 색이란? 그저 택시 색깔.



ⓒkoreajoongangdaily.joins.com






자꾸만 들었다 놨다 해


화가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와 모네(Claude Monet)가 사랑했던 색. 고갱(Paul Gauguin)이 줄기차게 사용했던 색. 오렌지는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분위기를 풍기는 색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선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모네의 <해돋이>에선 은은함 속에 감춰진 힘으로, 타히티를 배경으로 한 고갱의 그림들에선 원초적인 야생성으로 말이다.



보티챌리, 비너스의 탄생 ⓒmymodernmet.com
모네, 해돋이 ⓒmonetpaintings.org
고갱, 아레아아레아 ⓒumaid.art


이토록 다양한 매력을 가져서일까? 오렌지는 현실에서도 극과 극의 활용성을 보여주는데 생명을 구하는 구명조끼와 소방복으로, 한편으론 형벌과 격리를 위한 죄수복의 색으로서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한다는 것이다. 근데 둘 다 쓰임의 이유는 같다. ’눈에 잘 띄어서‘.


<Fire Country>의 한 장면 ⓒcbs.com, VETEMENTS 2024 SS ⓒvogue.com
<Orange is the New Black>의 한 장면 ⓒpeoplesworld.org


한편으로 오렌지는 동남아의 수도승들이 선택한 색이기도 하다. 색 자체가 이글거리는 해와 비슷해서, 그들의 열반을 향한 거침없는 질주와 지치지 않는 열정을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승들은 자신의 승복을 스스로 염색한다고 하는데, 이때 사용하는 천연염료에 주홍빛을 내는 샤프란 꽃의 암술이 들어있어 그토록 아름다운 색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theguardian.com, ⓒreneesgarden.com






Fashion In Colors: Orange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오렌지 색만큼 호불호가 강한 색이 없다고 한다. 연구의 출처가 없어 단정할 수 없지만 이유는 아마 당근 때문일지도? 하지만 이런 위험 부담을 안고도 거침없이 오렌지를 선택한 패션들이 있다. 그들의 과감한 행보를 지금부터 차례로 살펴보자.




Hermès의 오렌지


ⓒnssmag.com



평소 패션에 관심 좀 있는 사람이라면 오렌지 색을 보자마자 떠올린 브랜드가 있을 것이다. 바로 럭셔리의 끝판왕, Hermès. 전 세계의 탑 브랜드가 가장 호불호가 심한 색상을 선택하다니.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던 걸까?

원래 1920년대 Hermès의 박스는 크림색에 황금빛 테두리를 두른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이후 좀 더 진한 베이지로 조용한 변화를 꾀하긴 하지만, 1940년대에 들어 갑자기 진한 오렌지 빛의 생뚱맞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collectingluxury.com



이 비장한 선택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거라 기대했다면 오산. 그저 역사가 긴 브랜드가 으레 거쳐갈 수밖에 없었던,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물자 부족으로 인한 해프닝이었다. 인기가 높았던 크림이나 베이지는 진즉에 재고가 동이 나버려, 결국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오렌지가 유일한 선택지로 남게 된 거라고. Hermès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우연히 오렌지색이 되었네요.’라고 쿨하게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Hermès의 오렌지는 그 어떤 브랜드의 키컬러보다 강렬히 꽂힌다. 물론 브랜드 자체가 가진 이미지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겠지만, 완성형이라 할 수 있는 현재의 오렌지 컬러가 따뜻함과 활력을 가득 담은 오묘한 분위기를 띄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불호가 강한 이유도 한몫했다. 정말 좋아하던 너무 싫어하던 어쨌든 시선이 쏠리는 건 매한가지니까.



ⓒhermes.com





런웨이 위의 오렌지


그렇다면 패션계는 이 까다로운 오렌지 컬러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고 있을까?

우선 VERSACE의 올해 FW 시즌의 룩을 주목하자. 살구빛이 감도는 오렌지 컬러를 필두로, 광활한 사막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파이어 & 마멀레이드 오렌지까지. 다채로운 주홍빛과 맞물리는 트위드와 레더, 실크 소재의 의상들이 쌀쌀한 날씨 속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하게끔 돕는다. 특히 블랙과 브라운 등에 포인트로 얹힌 오렌지 포인트는 전체적인 착장의 생기를 불어넣는 중요한 요소.



VERSACE 2023 FW ⓒvogue.com




DRIES VAN NOTEN의 2024 SS 맨즈 컬렉션 역시 노을빛 오렌지로 물들어 있다. 오렌지의 마수가 내년부터 남성 패션계를 본격적으로 점령할 예정인 듯. 베이지와 브라운, 골드처럼 비슷한 계열의 컬러와 어우러지니 부담이 확 줄었다.



DRIES VAN NOTEN 2024 SS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러블리하게. 런웨이 위의 오렌지 룩은 생각보다 다양한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저 평범한 크레파스 주홍빛을 줄곧 떠올렸던 당신의 편견을 단번에 날려줄 이색적인 모습으로 말이다.

오렌지 룩에 대한 쟁점은 세 가지 정도로 추려볼 수 있다. 첫째로, 빨강과 노랑의 비율이다. 어느 쪽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확 달라지는 무드로 표현되니 활동적인 분위기를 내고 싶다면 빨강 쪽으로, 부드러운 인상으로 기억되길 원한다면 노랑 쪽으로 가면 된다.



Zegna 2024 SS, Craig Green 2024 SS
Onitsuka Tiger 2023 FW, BALENCIAGA 2023 FW
Genny 2023 SS, VALENTINO 2020 SSⓒfashionista.com, ⓒvogue.com




둘째로, 다른 컬러와의 매칭이다. 오렌지 자체가 강렬하기에 왠지 강렬한 컬러는 피해야 할 것 같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극과 극의 대비를 통해 통통 튀는 팝적인 분위기를 내기엔 이만한 무기가 없기 때문. 특히 보색인 블루 계열이나 데님과 함께라면 궁극의 효과를 낼 수 있다.



Prabal Gurung 2022 SS, Roksanda 2015 SS
Rag & Bone 2012 SS, Prabal Gurung 2011 SS
Y/PROJECT 2022 FW, Alberta Ferretti 2020 SS
Lebor Gabala 2018 SS, Creatures of Comfort 2016 SSⓒvogue.com




반면 무채색 의상에 곁들여 활용하기도 좋은 색이다. 블랙과 그레이, 브라운과 같이 단조로운 색상에 키치적 감성을 입히고 싶다면 반드시 오렌지다. 대신 채도에 신경을 써야 할 것.



KIKO KOSTADINOV 2023 FW, LEMAIRE 2023 FW
GUCCI 2023 SS, Martine Rose 2019 SS



셋째로, 완벽한 포인트로서의 오렌지다. 모자부터 안경, 머플러, 백과 슈즈까지 오렌지가 안착하지 못할 영역은 없으니. 오렌지가 좋은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고 생각되는 이들이여, 애써 티셔츠 같은 걸 골라 옷장에 처박아두지 말고 보다 위험부담이 없는 액세서리로 먼저 시도해 보자. 그렇게 차근차근 물들어가는 게 바로 패션이니까.



MICHAEL KORS
MIU MIU, GCDS
Off-White, Marc Jacobsⓒelle.com, ⓒapparelnews.net, ⓒstylecaster.com




오렌지는 이렇게 입으시면 됩니다


매번 셀럽들의 패션을 소개할 때마다 ‘그건 셀럽이니까 가능한 거야‘라는 소리를 듣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럽들의 착장은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번 오렌지 색처럼 평범치 않은 컬러를 다룰 때엔 더욱 그렇다. 모델보다 다양한 체형, 직업적인 다양성, TPO에 따른 기준 역시 전부 다르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참고서나 마찬가지.

차분한 누드 컬러의 느낌을 주면서도 좀 더 화사한 분위기를 강조할 수 있는 벨라(Bella Hadid)의 미니 드레스와 재킷부터 구두까지 올 오렌지 룩으로 나타난 지지(Gigi Hadid), sacai만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착장으로 눈길을 끈 젠데이아(Zendaya), 힙스러움의 정점을 달리는 오렌지 아우터로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 리한나(Rihanna)와 켄달(Kendall Jenner)까지. 이 정도면 계절별로 어떤 오렌지 아이템을 장만해 두어야 할 지 슬슬 감이 오지 않는가?



ⓒglamourmagazine.co.uk, ⓒen.celebrity.tn, ⓒpeople.com


뻔한 소리지만 사람은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 수 없다. 가끔은 싫고, 어렵고, 짜증 나고, 귀찮은 것도 결국은 해내야 할 때가 있다.

오렌지가 바로 그런 컬러다. 당신이 오렌지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에 관계없이 말이다. 오렌지색 사용설명서의 마지막 장은 바로 이것이다. 반드시 실행할 것.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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