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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Oct 26. 2023

그리스 로마 신들의 옷장 훔쳐보기

제우스는 드리스반노튼을 입는다. 

Stories: Fashion and Greek Mythology

그리스 로마 신들의 옷장 훔쳐보기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진 나르키소스, 손에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미다스,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위험한 비행을 시도한 이카루스까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아마 모든 이야기의 출발은 이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가 아닐까? 신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다룬 이 장황한 서사시는 남다른 스케일과 악명 높은 수위로 전 세계의 독자들을 단숨에 매료시켰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저 존경받는 신들의 이야기인 줄만 알고 독서를 감행했던 전국의 초등학생들은 묵직한 충격과 함께 세상의 이치에 눈뜨기 시작했다는... 웃픈 전설도 있으니.






예술과 신화가 빚어내는 황홀한 케미


전 시대를 통틀어 예술과 가장 많은 교감을 나눈 건 다름 아닌 오늘의 주인공, 그리스 로마 신화다. 선명한 캐릭터들이 펼쳐내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야말로 목마른 예술가들에겐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존재였던 것.

특히 르네상스 시대엔 당대 작가들의 주요한 작업 화두가 되었으며 덕분에 고전주의 화풍을 입은 신화 속 장면들은 오늘날까지 유럽 미술관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필수적인 컬렉션이 되었다.



비너스와 에로스, 헤르메스가 등장하는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greekreporter.com
고야,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 마티스, 이카루스ⓒbritannica.com, ⓒmutualart.com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문학에서 다루는 상징과 의미, 인물을 창조하는 방식, 갈등과 테마를 설정하는 흐름 모두 그리스 로마 신화에 적잖은 빚을 지고 있으니까.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역시 자신의 저서 중 상당 부분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차용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T.S. 엘리엇(T.S. Eliot)과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앙드레 지드(Andre Gide) 등 국가를 대표하는 문인들도 고전 신화 속 주제를 새롭게 해석한 작품을 선보였다.



T.S. 엘리엇의 황무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penguinrandomhouse.com, ⓒacappellabooks.com



신화의 이 막강한 영향력은 오늘날 대중문화 속에서도 발견된다. 정호연과 양조위의 등장으로 화제를 모았던 뉴진스의 ‘Cool with You’ 뮤직비디오가 좋은 예시. 인간과 신의 애절한 러브 스토리, 에로스와 프시케 설화를 현대적으로 풀어내 많은 화제를 모았는데 특히 등장하는 주요 신들의 성별을 바꾸어 이야기를 새롭게 풀어냄으로써 대중들의 흥미를 이끌어냈다.



프랑수아 에두아르 피코, 프시케를 떠나는 에로스 ⓒowlcation.com
에로스 역의 정호연(좌)와 아프로디테 역의 양조위(우) ⓒhypebeast.com



신화가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게 된 것은 바로 뛰어난 캐릭터성과 예측 불허한 전개에 있다. 서로 긴밀하게 얽혀있는 인물들의 풍부한 서사가 계속 새로운 스토리를 생성해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던 것. 또한 신들의 작동 원리가 모두 인간의 욕망 시스템과 닮아있다는 점과 존속 살해, 수간, 근친 간의 사랑 등 금기된 소재를 가감 없이 다루었다는 것 역시도 함께 주목할 특징이다.





신들의 세계를 재현하다


그렇다면 패션은 어떤 시선으로 신화를 바라보고 있을까? 우선 그리스 신화를 영감으로 삼았던 런웨이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CHANEL 2018 Cruise ⓒmarieclaire.com.au


‘The Modernity of Antiquity’란 제목으로 개최된 CHANEL의 2018년 크루즈 쇼는 고대 그리스의 유적을 세트로 그대로 재현해 관객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드레이핑, 원숄더 실루엣, 골드 액세서리들로 꾸며진 컬렉션 의상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 여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특히 각 착장마다 매칭한 글래디에이터 샌들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반영함과 동시에 강인한 이미지까지 부각할 수 있는 매력적인 아이템이었다.


CHANEL 2018 Cruise ⓒvogue.com




고대 로마의 향취를 가득 머금고 있는 Dolce & Gabbana의 2014 SS 컬렉션. 현재는 폐허가 된 원형 극장의 옛 사진을 프린트하여 의상을 제작한 것은 물론, 고대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이오니아식 기둥을 구두의 굽으로 둔갑시켜 현대 패션에 적용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피날레엔 쇼에 참여한 모든 모델들이 금빛 찬란한 착장을 하고 행진하는데, 마치 올림푸스 신전의 축제를 감상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



Dolce & Gabbana 2014 SS ⓒvogue.com



항상 새로운 시도로 관객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Alexander McQUEEN은 2006년 SS 시즌 ‘Neptune’이란 타이틀로 런웨이를 진행했다. 냅튠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영어식 이름으로, 올림푸스의 주요 12신 중 한 명이다. 당시 디렉팅을 맡았던 알렉산더 맥퀸은 자신의 장기인 섹시한 테일러링을 주된 테마로 하여 작업을 진행하였다고 밝혔으며, 후반부엔 쇼의 제목처럼 고대 그리스를 연상시키는 작업물도 다수 목격되었다. 하지만 평소 맥퀸의 파격적인 연출과는 궤가 맞지 않아 쇼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다소 부정적이었다고.



Alexander McQUEEN 2006 SS ⓒvogue.com






패션이여, 신화가 되어라


저마다의 독보적인 매력으로 강력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올림포스의 신들. 이번엔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해 볼 시간이다. 만약 그들이 현대로 강림한다면, 어떤 착장을 하고 있을까? 각 신들의 특징에 맞추어 그들에게 어울릴 법한 멋진 착장을 현대의 런웨이에서 선별해 보도록 하자.




제우스와 헤라

앙투안 쿠아펠, 이다 산 위의 제우스와 헤라ⓒbritannica.com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손자이자 크로노스의 막내아들인 제우스.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자식들을 먹어치웠던 아버지 크로노스의 손아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운 좋은 신이다. 넘치는 카리스마와 실행력으로 모든 신들의 아버지라는 명칭을 얻었지만, 한편으론 바람둥이에 사고뭉치이기도 하다.

범상치 않은 위치에 걸맞게 왠지 화려하면서도 무게감 있어 보이는 착장을 원할 것 같은 제우스. 킴 존스(Kim Jones)의 첫 번째 컬렉션인 Dior 2020 FW의 룩과 우아하면서도 강인한 느낌이 엿보이는 DRIES VAN NOTEN의 룩이라면 꼭 어울릴 것만 같다.



Dior 2020 FW, DRIES VAN NOTEN 2016 FWⓒvogue.com



한편 그의 아내인 헤라는 질투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고대 그리스 여성상의 표상이자, 모든 여성의 수호신으로 추앙받아 온 위엄 있는 존재다. 솔직히 제우스가 워낙 난봉꾼이었던 게 문제였다면 문제. 그녀는 결혼과 가정을 관장하는 신이기에, 불화가 생길만한 일에 당연히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맘이 지칠 대로 지쳤을 그녀를 위해 준비했다. Dolce & Gabbana와 CHANEL이 재해석한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CHANEL 2015 Fall Couture, Dolce & Gabbana Alta Moda 2022ⓒvogue.com





헬리오스와 아레스

트로이 유적지의 헬리오스 부조, 자크 루이 다비드, 아레스와 아테나의 전투ⓒbritannica.com, ⓒlemonandolives.com



헬리오스는 태양신으로, 아레스는 전쟁의 신으로서 둘 다 맹렬한 투지는 기본, 뛰어난 기술과 명석한 두뇌까지 장착한 실력자다. 특히 헬리오스는 평소 ‘후광이 보인다’라는 표현이 적용된 최초의 인물일지도. 물론 그가 태양빛을 몰고 다닌 이유도 있겠지만, 워낙 뛰어난 용모 덕분에 알렉산더 대왕, 로마 황제 네로가 자신의 초상화를 헬리오스와 비슷하게 그려달라 요청했다는 썰도 있다.

태양을 닮은 레드가 찰떡인 헬리오스에겐 MAISON MARGIELA와 Kaushik Velendra의 레드 셋업, 나아가 25년 동안 Alexander McQUEEN을 지켜주었던 사라 버튼(Sarah Burton)의 마지막 컬렉션 속 레드 드레스가 최고의 선택이 되어 줄 듯.



MAISON MARGIELA 2019 SS, Kaushik Velendra 2022 SS
Alexander McQUEEN 2024 SSⓒvogue.com




반면 아레스는 피와 살상을 즐기는 잔인함과 야만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는 갑옷과 투구를 쓰고 칼과 창을 든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는데, 전쟁을 관장하는 신답게 언제든지 참전할 준비가 되어있는 차림새다. 2023년 런던 패션 위크에서 대활약한 아방가르드 브랜드 KWK by Kay Kwok의 컬렉션 의상과 한때 한국의 밤거리를 사냥개 프린트로 물들였던 추억의 GIVENCHY 착장이야말로 그들의 야성성을 밖으로 표출해 줄 최고의 의상이다.


KWK by Kay Kwok 2023 FW, GIVENCHY 2011 FWⓒvogue.com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기원전 430년에 제작된 화병 그림,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britannica.com



저승을 다스리는 왕인 하데스. 그는 에로스의 화살에 맞아 제우스와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인 페르세포네에게 한눈에 반하게 되는데, 결국 그녀에 대한 소유욕이 극에 달한 나머지 납치하여 왕비로 삼는 파렴치한 짓까지 저지른다. 때문에 페르세포네는 일 년의 반을 지하 세계에서 지내야만 하는 신세가 된다.

이 안타까운 커플에겐 음산한 블랙 무드가 매력적이었던 BALENCIAGA의 커플룩과 떠오르는 신생 브랜드 HELIOT EMIL,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마스크가 돋보이는 Alexander McQUEEN의 착장을 추천하고 싶다. 세련된 은둔자의 모습이 지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증폭시켜 줄 듯.



BALENCIAGA 2023 SS
HELIOT EMIL 2023 SS, Alexander McQUEEN 2012 SSⓒvogue.com




아프로디테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mozartcultures.com



저스트 텐미닛. 모든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겐 단 십 분도 필요 없다. 아마 전 세계에서 제우스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신이자, 온 여성의 선망의 대상이 바로 그녀 일테니. 하지만 남편인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눈을 피해 전쟁의 신 아레스와 밀회를 즐기고, 이후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불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용을 쓰는 모습은 외모에 맞지 않게 좀 추잡스럽다. 그의 아들이 공포의 신인 포보스와 데이모스라는 것도 꽤나 아이러니. 아름다움과 두려움은 언제나 함께하는 것일까?

이런 아프로디테에게 영감을 받은 룩이 SAINT LAURENT의 1999년 쿠튀르에 등장한다. 꽃을 유독 좋아했던 그녀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지는 핑크빛 의상이다. 또한 전신의 플라워 장식이 돋보이는 Chloé의 드레스도 굉장히 만족스러워할 것 같다.



SAINT LAURENT 1999 Couture, Chloé 2024 SSⓒvogue.com






아폴로

샤를 메이니에, 아폴로와 우라니아 ⓒen.m.wikipedia.org



음악과 시의 신인 아폴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풍류를 즐기며, 여행의 신 헤르메스가 선물로 준 하프로 수준급의 연주까지 해낼 수 있다고. 이런 다양한 재주 덕에 자연스레 올림포스 최고의 파티 피플로 등극한 아폴로는 예술적인 감각 또한 뛰어나서 영감의 여신인 아홉 명의 뮤즈들과도 두터운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고도 한다.

속박될 수 없는 그의 영혼엔 락 시크한 무드가 딱이다. 패션에 락을 녹여내는 것이 에디 슬리먼(Hedi Slimane)의 장기이기에, 당연히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CELINE의 룩. 이외에도 방랑하는 음악가가 떠오르는 UNDERCOVER의 2017 SS 컬렉션도 아폴로라면 충분히 소화 가능할 것 같다. 입는 것만으로도 연주 실력이 향상된 기분이 들 듯.



CELINE 2023 SS, UNDERCOVER 2017 SSⓒvogue.com






디오니소스

카라바조, 바쿠스(디오니소스) ⓒko.wikipedia.org




디오니소스는 술과 광란, 황홀경을 관장하는 신이다. 때문에 도취와 쾌락의 신으로도 통한다. 초기엔 수염이 긴 전형적인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지만, 나중엔 종종 그를 양성적인 모습으로 표현하곤 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젠더 간의 경계를 허무는 젠더리스의 선구자로도 볼 수 있을지도.

장 폴 고티에는 이러한 양성적인 느낌을 가장 잘 구현하는 디자이너로 통하는데, 때문에 Jean Paul Gaultier의 초기작과 그가 디렉팅을 맡은 최근의 MAISON MARGIELA의 룩들은 이런 디오니소스의 정체성과 절묘히 맞아떨어진다.



Jean Paul Gaultier 1997 SS, MAISON MARGIELA 2020 SSⓒvogue.com




그리고, 프로메테우스

하인리히 퓌거,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는 프로메테우스 ⓒmedium.com



신들에겐 희대의 배신자지만, 인간에겐 영웅이자 은인인 게 바로 프로메테우스다. 그는 인간에게서 불을 뺏은 제우스의 이기심에 반기를 들고 꺼지지 않는 불을 회양목 안에 감추어 몰래 인간에게 돌려주었다. 그의 이러한 패기는 후대에 길이길이 남아 강렬한 영감으로 전해졌는데, 절대자에게 반기를 들고 약자인 인간에게 최고의 무기를 선사한 용기 있는 행동 덕에 선구자, 혁명가의 상징이 되었다.

패션계에도 이러한 반향을 일으킨 여러 인물들이 있다. 미와 추의 경계를 허문 COMME des GARCONS의 수장 레이 가와쿠보(Rei Kawakubo), 얼마 전 타계한 펑크 패션의 선구자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패션과 기술을 융합한 하이 테크놀로지 패션을 선보였던 후세인 샬라얀(Hussein Chalayan), 익명성을 추구하며 획기적인 시도를 거듭한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까지.



레이 가와쿠보와 COMME des GARCONS 2015 SSⓒdazeddigital.com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1994 SSⓒdazeddigital.com, ⓒnssgclub.com
후세인 샬라얀과 비행기 날개를 모방한 드레스ⓒtexintel.com
마르틴 마르지엘라와 파리의 동네 놀이터에서 열렸던 1990 SS 런웨이ⓒdazeddigital.com



이외에도 미처 언급하지 못한 여러 인물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누구냐가 아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태도 즉, 저항과 혁명의 마음 그 자체다. 그 꺾이지 않는 마음이 역사 속 보물과 같은 순간들을 탄생케 한 것이니. 이러한 그들의 신념과 굳건한 열정은 마치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식지 않는 영감으로 영원히 패션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 줄 것이다.

마치 한 편의 신화처럼.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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