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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Nov 01. 2023

소녀의 일기장을 닮은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매혹당한 사람들>, <마리 앙투아네트> 등

Stories: Filmmaker, Sofia Coppola 

소녀의 일기장을 닮은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들



무려 여덟 편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자 90년대를 주름잡던 패셔니스타, 또한 럭셔리 브랜드 LOUIS VUITTON의 뮤즈까지. 이 모든 걸 해낸 한 사람, 바로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다.


ⓒft.com






진부함을 경계하라


"너무 진부한가요?"소피아는 올해 3월 가디언지(The Guardian)와의 인터뷰에서, 평소 자신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문구를 묻는 질문에 이와 같이 답한다. 진부함. 이는 그녀가 가장 창작에 있어 가장 경계하는 부분이었고, 덕분에 남들과는 차별화된 스타일을 목표로 자신의 필모그라피를 착실히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진부함과 거리가 멀었던 건, 다름 아닌 그녀의 태생이었다. 대부 시리즈와 지옥의 묵시록, 럼블피쉬 등을 연출한 영화계의 거장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가 바로 그녀의 아버지. 세상에,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유명 작곡가인 카르미네 코폴라(Carmine Coppola), 어머니는 다큐멘터리 감독 엘레노어 코폴라(Eleanor Coppola), 큰 오빠는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감독의 각본 파트너인 로만 코폴라(Roman Coppola), 마지막으로...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Nicolas Cage)라는 어마어마한 사촌 오빠까지. 이쯤 되면 영화계에 진출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소피아 코폴라 ⓒft.com
니콜라스 케이지와 코폴라 부녀, 로만 코폴라와 웨스 앤더슨ⓒeonline.com, ⓒindiewire.com




일단 코폴라 가문 자체가 이렇게 대단한 분들로 가득하니, 소피아 코폴라 역시도 자연스레 대중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첫 도전은 아버지의 영화 대부 3에 출연한 것이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무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기력을 비판받고 있으니까. 뭐, 연기에 대한 애착이 그다지 크지 않아 상처받진 않았다고 하지만.

결국 그녀는 연기를 포기하고 영화감독으로의 전향을 결심한다. 결과는 성공적. 데뷔작 처녀 자살 소동(The Virgin Suicides)이 생각보다 많은 호평을 받았고, 이후 여덟 편의 영화를 직접 연출하며 크고 작은 상도 여러 번 수상하게 되었으니.



대부 3에 ‘매리’ 역으로 출연한 소피아 ⓒnytimes.com




세상의 모든 소녀와 여성들의 이야기. 소피아의 작품 속엔 정말 다양한 형태의 여성상이 등장하는데, 이런 특징은 그녀의 유년 시절과 깊은 연관이 있다. 2018년 인터뷰 속 그녀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마초 영화감독인 아버지 밑에서 여자 형제 없이 아홉 명의 남자 사촌들과 함께 지내야 했기에, 본인은 여성성과 여성스러운 미학에 본능적으로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고.







화려함 속에 숨겨진 진지한 멜랑콜리


알다가도 모를 여자의 마음. 소피아의 영화 속엔 영영 풀리지 않을 의문투성이의 마음들로 가득하다. 세상 걱정 없이 행복한 웃음을 짓다가도 뒤돌아서면 풀 죽은 채 복잡한 머릿속을 부여잡았던, 그런 마음들로 말이다.



사랑스럽고도 불안한: 처녀 자살 소동(The Virgin Suicides)


ⓒtheguardian.com


영화 처녀 자살 소동은 연출자로서의 소피아의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게 부각되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데뷔작 특유의 부산함이 좀 흠이긴 하지만, 탄성이 나올 만큼 수려한 이미지들과 그녀의 장기인 몽환적인 분위기 연출 덕분에 볼수록 묘하게 압도당하는 느낌까지 받게 되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처녀 자살 소동의 스틸컷 ⓒfilm-grab.com
촬영 현장 ⓒft.com




영화는 1970년의 미국, 보수적인 리스본 가의 다섯 자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평소엔 동네 남자아이들이 우상처럼 여기는 존재이지만, 그중 막내인 '세실리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벌어지며 이들의 삶 속에 감춰졌던 어두운 이면이 드러난다. 어딜 가나 주목받던 사랑스럽고 천진한 모습 속에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불안이 싹트고 있었던 것. 미숙한 자아가 풍기는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이 잘 표현된 작품이며, 특히 프랑스의 일렉트로닉 듀오 Air가 OST에 참여해 감각적인 미장센에 힘을 실어준다.

Sandy Liang의 2024년 SS 런웨이가 이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영화 내내 시선을 뗄 수 없던 걸리시한 무드의 패션이 컬렉션에 고스란히 적용된 것을 볼 수 있다.



Air가 참여한 처녀 자살 소동 OST ⓒopen.spotify.com
Sandy Liang 2024 SS ⓒhighend-magazine.okezone.com







서툴지만 섬세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


ⓒdenofgeek.com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한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소피아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출세작이다. 전작인 처녀 자살 소동에서 느껴졌던 스토리텔링의 부재가 보완되며 보다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거듭난 것. 대중들은 물론 평론가들 역시 호평 일색이었는데, 76회 아카데미에선 각본상을 받았고 감독상을 비롯한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을 정도다.



ⓒdenofgeek.com



사진작가인 남편을 따라 도쿄에 왔지만 언제나 혼자였던 샬롯(스칼렛 요한슨), 위스키 광고 촬영차 일본 일정에 참석했지만 낯선 문화와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고 있던 밥(빌 머레이). 이 둘은 우연히 만나 함께 일주일을 보내며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들을 둘러싼 삭막하고 차가운 도쿄의 풍경은 모든 청춘이 한 번쯤 겪었을 방황의 순간을 대변하는 장소다. 마치 기울어진 지붕처럼 스러지기 직전, 서로를 만나, 서로에게 기대어, 가까스로 외로움을 견디어내는, 모든 것에 서툴렀던 젊은 날의 사랑. 하지만 멀리 상대방의 기척까지 알아챌 수 있는 섬세함이 살아있던 그 시절의 이야기다.



사랑에도 통역이 되나요? 스틸컷ⓒfocusfeatures.com, ⓒnetflix.com







정열적이지만 공허한: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vogue.com



사치와 허영, 수많은 스캔들로 얼룩진 비운의 왕비에 대한 새로운 해석. 소피아는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를 통해 그녀를 끝없는 비난의 역사 속에서 구해내려 시도한다. 굶주려 가는 국민들에게 케이크를 먹으라고 외쳤다는 철없던 왕비를 말이다. 하지만 소피아는 마리를 사랑에 굶주린 가여운 아내이자, 무거운 드레스를 입고도 들판을 질주하는 정열적인 소녀이자, 허울 좋은 귀족들의 두 얼굴에 지쳐버린 공허한 영혼으로 묘사한다. 지상 최악의 왕비가 아닌 한 사람의 여성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틸컷과 촬영현장ⓒvogue.com, ⓒmichigandaily.com
1977년 Charles Jourdan의 캠페인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의 오프닝 ⓒvogue.com



이 영화는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볼거리와 들을 거리도 넘쳐나는 작품이다. 창백하게 표백된 하늘에 총천연색의 드레스를 교차로 등장시키며 어느 럭셔리 브랜드의 오트 쿠튀르 패션 필름에 버금가는 미장센을 선보인다. 여기엔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등의 의상을 맡은 실력자, 아트 디렉터 밀레나 카노네로(Milena Canonero)의 역할이 컸다. 그들은 영화 자체가 패셔너블한 느낌으로 인식되길 원했고, 특히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의 Dior 쿠튀르 작업을 주로 참고하여 의상들을 제작했다. 감독이 패션에 진심이면 어떤 영화가 탄생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시대극 배경에 현대의 감성을 추가하기 위해 뉴 오더(New Order)와 큐어(The Cure) 같은 강렬한 밴드 음악을 OST로 선택하였는데, 이게 또 끝내주는 신의 한 수였다는.



총 네 번의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은 밀레나 카노네로 ⓒfoodietown.ca
존 갈리아노의 Dior Couture 2005 SS, 2007 FW ⓒvogue.com





순수하고 가여운: 썸웨어(Somewhere)

ⓒtv.nu



6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 사자상을 수상한 영화 썸웨어. 당시 수상에 굉장히 이견이 많았던 게 한 차례 이슈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의 소피아의 영화보단 많이 정제되어 있고, 무엇보다 등장인물에 관계성에 집중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기에 개인적으로는 극호.

내용은 딸에게 무심한 슈퍼 스타 아버지가 우연히 딸과 함께 긴밀한 시간을 보내게 되며 일어나는 해프닝을 다룬 이야기인데, 현실에 치여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소중한 것들의 존재를 더듬어보게 하는 울림이 있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하지만, 마음 한 켠엔 부정에 대한 애절한 갈망을 품고 있는 가여운 소녀의 모습이 인상적.



썸웨어의 스틸컷과 촬영현장ⓒimdb.com, ⓒft.com




최근 부녀 간의 관계를 다룬 애프터 선(Aftersun)더 웨일(The Whale) 같은 영화가 연일 화제에 오르며 가족애가 최근 영화계에 주요 화두가 되었는데, 이 영화가 그 초석을 다졌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또한 아기자기한 미장센과 딸 클레오 역할로 출연한 엘르 패닝(Elle Fanning)의 패션에 담긴 소피아의 독보적 취향이 작품에 집중하게 만드는 또다른 동력이 되어준다.



ⓒimdb.com







절망 속에서도 환상을 품는: 매혹당한 사람들(The Beguiled)

ⓒfashionista.com



언제나 시각적인 영감을 가득 품고 있는 소피아의 영화들. 1971년 동명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매혹당한 사람들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내용은 17세기 남북전쟁 상황, 일곱 명의 여자들이 그들이 살던 기숙학교에 고립되는데 이 폐쇄된 공간에 부상당한 군인이 찾아오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온 세상이 절망뿐이지만 그 안에서도 끈질기게 피어나는 여성들의 욕망과 환상, 그 날카롭게 반짝이는 감정들을 우아하고 절제된 톤으로 담아낸 점이 관전 포인트다. 소피아는 이 영화를 통해 70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거머쥐는 쾌거까지 누렸으니, 이로써 그녀의 작품 세계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음이 증명된 셈이다.



매혹당한 사람들의 스틸컷 ⓒtheartofcostume.com




신비롭다 못해 음산한 분위기까지 서려있는 미장센은 작품에 빈티지한 무드를 심어주는 효과적인 장치다. 실제로 당시의 패션을 재현하기 위해 의상팀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옛 직물의 견본 책자를 구해 열심히 연구했고, 소장 중인 17세기의 옷들까지 전부 섭렵하는 열정을 보였다. 때문에 당신이 패션에 관심이 높다면 영화 속 등장하는 의상들의 소재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도 좋을 듯. 또한 가파르게 치솟는 인물들의 욕망과 함께 점점 화려해지는 장식 디테일을 찾아내는 것도 숨겨진 재미가 될 것이다.



남북전쟁 당시의 복식 문화를 반영한 영화 속 의상ⓒfamilysearch.org, ⓒtheartofcostume.com







영화만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패션


칼 라거펠트와 소피아 ⓒtheglobeandmail.com



소피아에게 패션은 영화보다 먼저 마음을 훔친 존재였다. 그녀는 15세 무렵부터 CHANEL의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밑에서 인턴 생활을 했는데, 이 경험은 훗날 감독이 된 후에도 큰 영감으로 작용했다. 섬세하며 디테일이 살아있는 영화 속 패션이 오늘날 소피아의 작품에 큰 장점이 되어주었으니까. 여전히 CHANEL과의 관계는 돈독해서 2019년부터 지금까지 쭉 브랜드 홍보대사로 활동 중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패션 커리어에서 가장 손꼽는 건 아무래도 LOUIS VUITTON과의 협업일 것이다. 세계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백이 런칭되는 기쁨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터. 평소 그녀의 귀족적인 분위기와 커리어에 몰두하는 모습이 현대의 새로운 여성상에 부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외형만을 중시한다고 비난받던 패션계에 내밀한 스토리를 부여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었던 것. 보이는 것 역시도 이야기의 일부라 전하는 그녀의 철학이 비로소 힘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LOUIS VUITTON의 AD에 자주 등장했던 소피아와 그녀를 뮤즈로 제작된 코폴라 백 ⓒhollywoodreporter.com



마지막으로 패션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90년대의 파파라치 샷 속 그녀의 모습을 감상해보자.





ⓒwmagazine.com, ⓒvogue.com




내가 원하는 대로 정확히 영화를 만드는 것이 나에겐 가장 큰 성취다.
-소피아 코폴라



소피아의 영화는 소녀의 일기장을 닮아있다. 남몰래 즐기던 엉뚱한 공상과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사소한 고민들, 어쩔 줄 몰라 맘 속에 눌러두기만 했던 서툰 감정들이 빼곡히 적혀있는 장소. 남들은 쉽게 해독하지 못할, 비밀스럽고 난해한 세계. 그러나 겁먹지 마라. 먼 훗날, 이젠 다 커버린 당신을 웃음짓게 했던 그 사랑스런 천진함도 함께 찾아오리니.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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