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 파일로와 에디 슬리먼이 남기고 간 것들
Brand LAB: CELINE
OLD CELINE VS NEW CELINE
CELINE를 애정하는 이들은 크게 두 파로 나뉜다. 브랜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피비 파일로(Phoebe Philo)의 올드 CELINE파. 전복에 가까운 변화로 브랜드에 새 바람을 일으킨 에디 슬리먼(Hedi Slimane)의 뉴 CELINE파.
특히 올드 CELINE파의 입장은 매우 강경하다. 그들은 2018년, 디렉터의 교체 소식만으로도 절망했으며 이후 새 디렉터가 에디라는 기사엔 좌절까지 했었다고 하니까. 이건 그저 추정이 아니다. 현재 빈티지 시장에서 올드 CELINE의 가치는 30%나 상승한 상태이며, 피비 시절 CELINE의 아카이브 계정으로 유명한 @oldceline 인스타는 어느새 무려 36만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대형 계정이 되었으니. 이는 떠나간 피비에 대한 경의와 불청객 에디를 향한 비판적 제스처, 이 둘을 동시에 상징하는 반응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CELINE의 데뷔는 현재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1945년, 설립자인 셀린 비피아나(Céline Vipiana)가 아동용 신발과 액세서리를 생산하는 브랜드로 런칭한 것이 시작이었고, 50년대에 들어서 여성복 전문 브랜드로 방향을 전환하며 그나마 지금의 CELINE에 가까운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90년대 후반엔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가, 2005년 부턴 PRADA와 JIL SANDER에서 활동했던 이바나 오마직(Ivana Omazic)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기도 했었으나 이렇다 할 두각을 드러내진 못했다. 대신 품질 하나는 믿고 구매할 만큼 공을 들여왔으니, 럭셔리한 패션 피플들 사이에선 나름 입소문을 탔었다고. 바로 이 점이 CELINE가 치열한 패션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이후 2008년, 드디어 피비 파일로가 합류하게 되며 비로소 우리가 아는 CELINE가 완성된다. 설립 이후 줄곧 지루한 디자인이라 비판받던 브랜드를 부진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준 최초의 인물이었으니. 나아가 2019년부턴 에디가 바통을 이어가며 CELINE의 흥행에 가속도를 올리는 중이다. 결국 CELINE의 전성기는 이 둘로 인해 완성된 셈. 때문에 CELINE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선 피비와 에디에 대한 탐구가 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만약 이 둘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면?
"CELINE에서 난 완전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CELINE에서 일하는 이유다.“ 피비는 2014년 The Guardian과의 인터뷰 에서 CELINE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CELINE으로 거취를 옮기기 전 그녀는 Chloe에서 5년을 있었는데, 당시 거스를 수 없는 Chloe만의 확고한 미학 때문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피력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다고.
때마침 그녀가 부임할 당시의 CELINE는 텅 빈 백지와도 같았다. 오랫동안 침체기를 겪어온 탓에 브랜드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무드 조차 제대로 설정되어 있지 않았던 것. 하지만 제한된 상황을 싫어하는 피비에겐 바로 이 점이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는 브랜드를 철저히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기 위한 작전에 돌입한다.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느낌으로.
그건 에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커리어는 매번 혁명에 가까운 변화와 연결되어 있었다. 유서 깊은 Dior과 SAINT LAURENT에서의 행보처럼 말이다. CELINE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부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브랜드의 상징과도 같은 로고부터 바꾸는 것이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을테니. 그는 Yves Saint Laurent에서 Yves를 날려버렸듯, CÉLINE에서 악센트를 날려버렸다. 게다가 남성복 라인까지 새로 런칭하며 서둘러 피비의 흔적을 지워가기 시작했다.
"CELINE의 정체성은 Dior이나 SAINT LAURENT만큼 강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전의 것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에디는 2018년 VOGUE와의 인터뷰 에서 CELINE의 첫인상에 대해 이와 같이 답한다. 또한 전임자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은 브랜드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며, 철저한 존중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색을 발휘하는 것이 디렉터의 역할이라 덧붙인다. 이는 전 디렉터였던 피비의 영향력을 의식한 발언이자 뒤이어 이어질 CELINE의 개혁을 예고하는 선언과도 같았다.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숭배했다. 원래 그랬다." 피비의 CELINE는 아름다움의 추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 CELINE가 그토록 흥행할 수 있었던 건 여성을 위한 관점에서 재해석된, 새로운 아름다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피비는 여성들이 CELINE를 입을 때 자신감과 강인함을 느끼길 바랐다. 또한 여성에게 강요된 성적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차림에서도 해방되길 원했다. 패션이 부담이 아닌 자유로 다가가길 원했던 것. 그래서 그녀는 마치 일상의 유니폼을 디자인하듯 의상을 대했다. 얼마나 실용적인지, 또한 착용감은 어떠한지, 평소 움직임에 불편을 주진 않는지와 같은 기본 조건을 최우선으로 체크했다. 결국 어떤 옷이 ‘실제의 나’에게 어울리는지를 치밀하게 고찰했던 것이다.
그러나 에디의 CELINE는 달랐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이전에 Dior과 SAINT LAURENT에서 보여주었던 슬림핏을 CELINE에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그만큼 진입장벽 역시 높다. 그는 2018년 W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디자이너는 모델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모델을 예술가로 본다."라고 말하며, 신체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명확히 언급한다. 또한 자신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신체가 없다면, 그것은 '구체화'될 수 없기 때문에 캣워크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 덧붙인다.
때문에 에디의 뉴 CELINE는 불특정 다수를 위하지 못한다. 피비의 CELINE처럼 웅장한 함의를 품고 있지도 않다. 보다 개인적이고 내밀한 시선에서 탄생한 그의 작품은 철저히 본인만의 미학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 어쩌면 그에게 패션이란 자신의 창의성과 예술혼을 불태우기 위한 창구 일 수도 있다. ”저는 제 스타일을 찾은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강박적으로 추구해오던 슬림한 실루엣과 가녀린 신체, 음악적 무드들이 디렉터로서의 스스로를 정의하는 조건이나 다름없다 여긴다. 또한 이는 비단 CELINE에서만이 아니며, 그가 머무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실현될 평생의 조건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그렇다. 이런 에디의 철학이 그의 비전을 실현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우리는 전적으로 그에게 의지해 앞으로의 CELINE를 향유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를 바꿔서라도 말이다.
"내가 만드는 모든 것에 사랑과 기쁨을 담고 싶다." 피비는 2018년 SS 컬렉션 을 준비하며 이와 같은 다짐을 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여성이자 한 아이의 엄마로서의 삶을 겪어나가며, 사랑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생기게 된걸까. 이처럼 사랑과 가족은 피비의 CELINE가 품은 따스하고 사려 깊은 무드를 대변한다.
그동안 그녀가 그려 온 CELINE의 여성상은 부드럽고 우아한 힘을 지닌 인물이었다. 어찌 보면 이는 쿨함보다 훨씬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일 터. 하지만 피비는 미니멀리즘이 가진 현대적 무드와 훌륭한 원단을 통해 이 어려운 분위기를 기꺼이 성취해 낸다. 온화한 색감과 울과 실크같은 클래식한 직물들로 컬렉션에 안정감을 부여하며 말이다.
젊음과 음악 그리고 블랙. 이에 반해 에디의 뉴 CELINE는 이 세 단어로 올드 CELINE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여태껏 에디의 손을 거친 모든 작품들이 그랬듯이. 특히 젊음은 화려하고, 모험적인 그의 컬렉션을 정의하는데 딱 알맞은 키워드다. 그의 유년 시절을 가득 채운 다양한 서브컬쳐로부터, 동경하던 락스타의 거침없는 에너지로부터, 힘든 순간엔 항상 위로가 되어주었던 익숙한 멜로디로부터. 우리가 지금 마주하는 뉴 CELINE의 모습은 그가 사랑했던 문화 자체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컬러다. 에디는 CELINE를 위한 블랙을 찾아내기 위해 수백 개가 넘는 샘플을 검토했다고 한다. 블랙이 가진 특별함을 그동안의 커리어를 통해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블랙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은 그동안의 컬렉션 뿐만이 아닌, 흑백만을 고집했던 사진 작업에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세상의 명암을 통해 선명히 드러나는 윤곽의 존재감. 그동안 에디의 의상에서 목격되었던 실루엣에 대한 집착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 피비와 올드 CELINE의 얼굴이나 다름없던 모델 다리아 워보이(Daria Werbowy)는 정말 최상의 궁합을 자랑한다. 이 둘은 닮은꼴로도 워낙 유명해서 얼핏 보면 쌍둥이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게 할 정도. 그 때문일까. 피비는 정말 부지런히 CELINE의 캠페인에 다리아를 등장시킨다. 결국 서로가 서로의 뮤즈이자 페르소나였던 셈.
피비의 심미안이 다리아에게 숨겨진 강인함을 제대로 포착해 낸 것일까. 우아하고 세련된 이미지의 다리아와 부드러운 힘이 실린 CELINE의 의상은 마치 톱니바퀴처럼 한치의 오차 없이 맞물리는 모습이다. 사진 작업은 대체로 유르겐 텔러(Juergen Teller)가 도맡아 진행했는데, 이 셋의 조합은 패션 드림팀이라고 불릴 정도로 패션계와 대중의 찬사를 받았다. 과다 노출 기술을 통해 피사체를 서슴없이 파헤치는 유르겐의 스타일이 신비로운 다리아의 마스크와 충돌하며 이례 없던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포인트.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시너지다.
그렇다면 에디의 뮤즈는 누구일까. 그의 뮤즈는 사람이라기 보단 그가 심취해 있는 락 음악, 그 자체다. 그는 전설의 락스타인 밥 딜런(Bob Dylan)을 시작으로 잭 화이트(Jack White), 스트록스(The Strokes)의 줄리안 카사블랑카(Julian Casablancas)로 이어지는 락의 계보를 그대로 CELINE의 캠페인에 담아내며 자신의 취향을 적극 반영한 작업을 이어간다. 또한 블랙핑크(Blackpink)의 리사(Lisa)와 방탄소년단의 뷔(V)와 같이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케이팝 스타들까지 등장시키는 신선한 장면도 선사하는 중. 이는 한 브랜드의 캠페인을 넘어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들을 조망하려 한, 그의 탁월한 센스가 돋보이는 캐스팅이다.
그렇다면 사진은 누가 찍는가? 직접 찍는다. CHANEL의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처럼 말이다. 칼이야 기용한 포토그래퍼가 맘에 들지 않아 카메라를 뺏은 게 시작이라지만, 에디는 다르다.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갈고닦은 사진 실력을 톡톡히 써먹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한결같이 흑백을 고집하긴 하지만 때문에 CELINE만의 독보적인 무드가 차곡차곡 형성되고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이 둘의 승부를 판가름 하기엔 아직 이르다. 패션계를 홀연히 떠나버렸던 피비가 최근 자신의 브랜드인 PHOEBE PHILO를 가지고 무사 귀환했기 때문이다. 평단에선 올드 CELINE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며 난리지만, 동시에 클래식한 베이스와 현대적 테일러링을 결합한 신선한 매력도 있다고 호평한다. 하지만 에디 역시 지지 않는다. 매번 자기 복제란 비난에 시달리면서도, 그를 지지하는 든든한 팬층과 탄력적인 매출 상승으로 뉴 CELINE의 힘을 보란듯이 증명해내고 있으니까.
아무나 이겨라. 물론 재미로 붙여본 승부이지만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 당신을 위해, 에디터 선정 각 디렉터 별 최애 컬렉션을 소개해 본다. 우선 피비의 2017 SS컬렉션. 자연스러운 오버핏 테일러링과 클래스프(Clasp) 백의 절묘한 매칭, 프랑스의 화가 이브 클라인(Yves Klein)의 작품에서 힌트를 얻은 드레스까지. 무엇 하나 소홀할 수 없는 완벽한 구성을 보여준다.
에디의 컬렉션에선 단연 남성 라인에 주목할 수 밖에 없다. 설립 이후 줄곧 금남의 영역이었던 CELINE의 벽이 산산히 허물어지는 장관을 선사했으니. 특히 2022 봄 컬렉션은 매 순간이 베스트 룩이나 다름없는데, 펑크와 그런지 무드를 에디만의 미감으로 트렌디하게 헤석한 점이 인상적이다.
여성에게 패션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 준 피비의 올드 CELINE, 시대를 풍미했던 문화를 패션에 녹여낸 에디의 뉴 CELINE. 자,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는가? 이 강력한 두 CELINE 사이에서 우리는 영원히 고민을 거듭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걸.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