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도대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네이버에 사랑을 검색하면 무엇이 나올까.
우선 결혼정보회사의 파워링크들이 선두에 있고, 사랑에 대한 글귀들을 전송하는 문자메시지 서비스가 그 뒤를 잇고, 사랑이 제목에 들어간 몇 편의 영화들이 출현하다가 막판엔 안전한 사랑니 발치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치과들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다. 이게 끝이 아니다. 위키 하우(wiki How)가 알려주는 사랑하는 법, 사랑이 중요한 이유, 행복의 비결, 사랑한다고 말하는 (무려) 천 가지 방법... 장장 열 페이지에 달하는 정보들을 공들여 훑고 나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이제 사랑에 대한 글은 그만 써야지...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랑 이야기가 있는데 아직도 사랑이 뭔지 도무지 모르겠네.
그래서 다시 다짐한다. 이번엔 정말 사랑에 대한 글을 쓰기로.
우리는 툭하면 사랑과 결핍을 연관 짓는다. 그리고 종국엔 결핍을 채우는 게 사랑이라 단정한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의 입장에선 조금 억울할 수도 있다. 자칫하면 욕망과 혼동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결핍엔 두 가지 사전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람. 다른 하나는 다 써 없어짐. 보자마자 모두가 알아챘을 테지만, 사랑과 어울리는 결핍은 철저히 전자 쪽이다. 반면 후자는 사랑에겐 오히려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될 것이다.
인간 역시 사랑과 욕망이 분리되길 원한다. 욕망의 맹목성으로부터 사랑의 숭고함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결핍은 그 과정에서 매번 나타나는 불청객이다. 욕망은 저절로 자라나는 게 아닌,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하지만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고, 그 결핍은 영원히 결핍될 수 없다. 모든 게 넘쳐나는 과잉의 시대에도 결핍은 건재하다. 한 때 기브 앤 테이크란 자본주의의 진리도 믿어봤지만 결과는 어떤가. 우린 아직도 공허함에 몸부림치고 있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고 채워주어야 하는 것이 여전히 사랑이라 한다면 아마 사랑은 평생 슬플 것이다. 채워지지 않은, 혹은 채워주지 못했다는 상실감에 매 순간을 허덕여야 할 테니까.
그러나 사랑이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결국 결핍의 힘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평론가 신형철의 말을 소환해 본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게 욕망의 세계"라면,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 지가 중요한 게 사랑의 세계"라고. 사랑은 서로의 있음을 갈망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없음을 함께 견뎌내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기에, 우린 평생 서로를 떠날 필요가 없다"고. 때문에 우린 결핍을 반갑게 맞이해야 한다. 채워야 할 "극복의 대상이 아닌, 함께 동행 해야 할 삶의 반려"로서 말이다.
그렇게 사랑 안에서, 나의 없음은 비로소 나의 무기가 된다. 채워야 한다는 욕망의 강박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을, 사랑을 할 수 있으리란 용기로 바꾸는 무기. 이런 나의 없음이 당신의 없음을 마주하는 순간, 서로가 서로의 결핍을 마주하는 그 순간, 결핍은 더 이상 사랑의 한계가 아닌 사랑의 조건으로 거듭난다.
바야흐로 애증의 시대다. 드라마와 소설은 물론 기사와 게시글, 밈들에서까지 애증이란 단어를 자주 마주친다. 물론 끔찍한 일이 등장하는 건 아니니 다행이지만 알쏭달쏭한 남녀사친의 마음이나, 연락이 뜸한 지인, 게다가 음식이나 가끔 특정 야구팀... 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도 우린 쉽게 애증을 발견한다. 그만큼 사람들이 애증을 쉽게 떠올리고, 이에 공감하며, 동의한다는 소리다.
그에 비해 애증이란 단어가 처한 상황은 너무나도 혹독하다. 애정과 증오라는, 결코 이해 못 할 서로가 절대적인 규칙에 묶여,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관계로 맺어지고 말았으니. 당신은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 지독한 관계가 내 안의 어떤 감정을 정확히 가리킬 때의 두려움을. 영원히 풀 수 없을 난제와 같은 감정이 불현듯 마음을 차지했을 때 닥쳐올 엄청난 여파를.
여기 애증의 감정을 완벽히 고증해 낸 두 영화가 있다. 공교롭게도 둘 다 박찬욱의 작품이다. 하나는 박쥐(Thirst, 2009), 다른 하나는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 2022). 박쥐의 상현(송강호)과 태주(김옥빈)는 애증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관계다. 흡혈로 생을 유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부의 신념만은 지키려 했던 상현, 이와는 반대로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정말 밥 먹듯 살생을 일삼는 태주. 하지만 이들은 세상에 단 둘 뿐인 뱀파이어로 고립되어 서로가 서로를 떠나지 못한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서로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끊임없는 의심으로 상처 주면서도, 살인의 공범으로 묶여 버린 상태다.
그들이 보여주는 애증의 과정은 가히 충격적이다. 신념은 버려지고, 오해가 솟아나며, 믿음은 익사하고, 사랑이 붕괴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반복되는 애정과 증오의 얼굴을 목격한다. 마치 애와 증의 비율을 균등히 하여, 애증의 균형을 유지하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결국 벼랑 끝에 선 상현과 태주는 작열하는 태양빛을 받으며 함께 불타 죽는다. 서래는 자신이 판 모래 구덩이 안에 스스로 들어간 뒤, 그 위로 몰아치는 파도의 힘을 빌려 영원한 미결 사건을 만든다. 그리고 해준은 어딘가 서래가 있을지 모를 해변 위에 홀로 남겨진다. 참으로 다행이다. 이 지독한 관계에도 끝이 있다는 게. 하지만 그 끝 역시 참으로 지독하다. 함께 죽느냐. 아니면 홀로 남겨지느냐. 이건 영화의 경우가 아니냐고? 과연 그럴까.
"나를 추앙해요." 한때 전국을 추앙 신드롬으로 물들였던 어느 드라마의 대사. 이 단어가 이토록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던가. 높이 받들어 우러러본다는 추앙의 의미처럼, 사랑만으론 부족하니 추앙하라는 주인공의 심정처럼, 어떤 열렬한 감정에 대한 환상이 우리 맘 속 어딘가에 서려있던 걸까. 하지만 이 사랑을 뛰어넘는 추앙으로도 부족하다 말하는 게 있다. 바로 숭배다.
추앙과 숭배의 차이는 자율성에 있다. 추앙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것이라면, 숭배는 그만둘 수 없거나 그만두어선 안 되는 것이다. 음, 이걸로는 부족할 테니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의 영화 마스터(The Master, 2013)와 요르고스 란티모스(Yorgos Lanthimos)의 작품인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8)를 비교하며 둘의 차이를 더 극명하게 살펴보자.
우선 마스터의 주인공인 프레디(호아킨 피닉스)의 경우다. 극심한 알코올 중독에 틈만 나면 폭력을 일삼던 프레디는 우연한 계기로 만나게 된 한 종교 단체의 마스터, 랭케스터(필립 셰이모어 호프만)에게서 정신적 평안을 얻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마스터를 믿고 의지하며, 전적으로 따르게 된다. 그러나 가까이서 경험한 마스터는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엄청난 카리스마 뒤에 너무도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숨겨져 있었던 것. 하지만 프레디는 이에 분노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의 경험들을 통해 홀로 설 수 있으리란 믿음을 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랑만큼 강렬한 추앙(Respect)의 놀라운 업적이다. 스스로 대상을 선택하고, 맘껏 높이 받들어 우러러본 뒤, 언젠간 안녕을 고할 수 있을 자유가 있는. 그렇게 프레디는 마스터를 떠난다. 오랜 추앙의 끝이 해방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반해 숭배는 그 대상부터 차원이 다르다. 일단 숭배의 대상이 되려면 신성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신성함은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한 것" 이기에 인간은 결코 이를 경험하지 못한다. 인간은 신성함을 증명할 수 없기에, 우리가 신성하다 부르는 것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신성함의 대상은 예고 없이 불시에 출현한다. 여기엔 어떤 인과관계도 필요 없다. 신성함의 진위를 판단하기 이전, 이미 대상은 마음을 침범해 있다.
이유를 붙일 수 없는 사랑의 대상처럼 말이다. 킬링 디어의 마틴(배리 케오건) 역시 그렇게 스티븐(콜린 파렐)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치 사랑을 갈구하는 듯 행동한다. 보통의 인간인 스티븐(콜린 파렐)은 마틴이 신성한 대상임을 알아채지 못한다. 때문에 마틴은 스티븐에게 확실한 믿음을 주기 위해 자신의 끔찍한 능력을 개시한 뒤 이를 빌미로 사랑을, 나아가 추앙을 초월하는 숭배를 요구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가 그래왔듯이. 이것이 바로 신성하다 불리는 자들의 거부할 수 없는 힘이자, 진짜 숭배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로서 숭배는 절대 그만둘 수 없는 것이 된다. 숭배를 포기한 순간, 상상할 수 없는 불안이 닥쳐올 테니까.
그리고 마침내, 사랑에 빠진 우리를 가장 괴롭게 하는 그것이 도래했으니. 바로 소유욕이다. 널 내 것으로 만들고 말겠어...라는 말에 심쿵한다면 당신은 분명 소유의 노예! 반면 이 지긋지긋한 소유욕으로부터 탈출을 결심한 이들도 있었으니 바로 폴리아모리(Polyamory)다. 이 생소한 명칭은 많음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폴리(Poly)와 사랑을 뜻하는 라틴어 아모르(Amor)의 합성어로서, 말 그대로 한 번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의 수에 제한을 두지 않는 다자 연애 라이프 스타일을 뜻한다. 얼핏 보면 최악의 바람둥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전혀. 그들에겐 나름의 규칙이 있다.
일단 당연히 상대방의 동의는 필수다. 또한 상대를 독점해서도 안되며 스킨십의 범위, 휴일의 데이트 상대, 연락 빈도수 등 세세한 안건까지 철저히 고려해 관계 안에 있는 모두를 진심으로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이게 무슨 댕소리냐 하는 사람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미국 콜로라도를 기반으로 한 폴리아모리 공식 커뮤니티(www.lovingmorenonprofit.org) 엔 2016년 기준, 50개국의 3만 8천 명이라는 인원이 가입되어 있다고 하니 지금쯤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이쯤되면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단점만이 가득한 같은 이 생소한 연애관에도 나름의 이점이 있다고 하니까.
우선 앞서 말했던 소유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첫째로 꼽는 장점이다. 비독점이 최우선의 원칙이니 그래야 할 수밖에 없을 듯. 저는 질투가 많아서 안되겠는데요. 상관없다. 그들도 질투를 느끼니까. 요점은 이 질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폴리아모리들은 질투를 컴퍼션(Compersion)화한다. 이 생소한 단어는 다자 연애를 이해하는 이들만이 사용하는 용어인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애하는 것을 보며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즐기는 걸 의미한다. 또한 매해 10만 쌍이 넘는 부부가 이혼하고 섹스리스 부부가 30% 이상인 현실에서 가정의 파괴를 막기 위한 대안으로도 강력 추천한다고. 물론 경험자의 조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는 소유를 향한 욕구을 이렇게 분석한다. "집착은 결국 실재감의 부족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고 집착하는 것은 만일 소유하지 않으면 그 사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갑자기 영화 봄날은 간다의 명장면이 떠오른다. 변심한 애인의 차를 몰래 긁다 들킨 가여운 상우(유지태)가 말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아마 관객 모두가 동의했을 상우에 말에 감히 이렇게 답해본다. 그래, 맞다고. 네 말처럼 사랑이란 감정은 변하는 게 아니라고. 대신 사랑의 대상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이건 명심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로서 우린 더 이상 소유에 얽매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랑을 믿는다면 그걸로 충분하니.
요즘처럼 사랑이 위협받는 시절이 있었던가. 뉴스만 틀면 사랑이란 이름을 빙자한 각종 악행들의 소식이 들려온다. 아무리 보고 들리는 게 다가 아니라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사랑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 그리고 안타깝다. 이미 그렇게 되었을까 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우릴 매료시킨다. 사랑을 다루는 영화나 소설, 노래 따위가 진짜 사랑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모든 게 결국 흔해빠진 사랑 얘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이토록 원하니까. 그리고 이로써 사랑은 권장과 강요의 압박에서 해방된다. 사랑을 주세요. 사랑을 받아야 해요. 사랑을 해야 해요. 이런 귀찮고 식상한 말들로부터 말이다. 그래도 사랑은 계속된다… 라 외치는 ‘나는 솔로’의 슬로건처럼,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사랑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을 테니까. 대신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결국 흔해빠진 사랑 얘기들이란 걸 알면서도 우리가 사랑 얘기에 열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 넘쳐나는 사랑의 서사들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도 무관심도 아닌, 고립이다. 이를 전제로 그동안의 당신의 기억을 잘 더듬어 보자. 이제껏 당신이 마주했던 모든 러브 스토리들을. 그와 더불어 당신이 경험했던 모든 사랑의 순간들을. 이제 깨달았는가. 그 순간은 전부 고립되지 않기 위한 누군가의 의지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그리고 바로 이 의지가 사람을 사랑으로 향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음을.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고립의 공포 속에서 우리가 갈망한 건 무엇이었나. 쾌락? 물질? 소유나 정복? 아니다. 오직 ‘나’의 외침에 반응하는 누군가의 응답이었다.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러므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우린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사랑을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 사람은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는 그 태초의 믿음이 우리를 기꺼이 응답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사랑도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 프랑스의 소설가 뒤라스(Marguerite Duras)는 이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일러준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못한 이 세상에서 결코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사람과 사랑, 단 둘 뿐이라고. 이 둘만 있다면 해결되지 못할 문제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같이 가야 해. 죽지 말아야 해. 세상이 지옥이어서 우리가 아무리 선하려 해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악마야. 함께 있어야 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로를 보고 만지고 노래하며 사람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해.” -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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