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달리는 LOEWE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Stories: Fashion and Surrealism
이것은 패션이 아니다.
인간은 발걸음을 모방하려 했을 때, 다리와는 닮지 않은 바퀴를 창안했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현실주의를 실천한 것이다.
(기욤 아폴리네르, <티레시아스의 유방> 서문)
예술계의 타노스 다다이즘이 장렬히 전사하고, 공허한 예술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초현실주의. 다다의 끝없는 예술 부정과 파괴에 염증을 느낀 예술가들은 인간의 무의식과 꿈, 상상력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초현실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초현실주의는 1920년 프랑스를 기점으로 전 세계의 퍼진 예술 운동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목표는 예술의 위기에 창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다다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 그들 역시 한때는 다다에 충실했던 다다이스트들이었기에, 과거의 실패를 청산하기 위해선 남다른 각오를 해야만 했다.
친애하는 상상력이여, 그대에게서 내가 특히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용서를 모른다는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초현실주의 운동의 큰 줄기는 1924년, 프랑스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의 <초현실주의 선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인간에겐 정신의 가장 위대한 자유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참담한 현실에 실망한 예술가들의 영혼을 깨웠다.
초현실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으로, 의식을 관장하는 논리적 사고와 이성을 잠재우는 대신 꿈과 무의식을 해방하여 초현실적인 미를 창조하려 하였다.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활동인 상상력은 이를 실현시키는 단 하나의 도구이자, 당대 예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비책이었다.
이러한 발상은 한평생 인간만을 연구하던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이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내세우는 초현실은 곧 프로이트가 그토록 강조했던 무의식의 세계와 일치한다.
너 T야? 아마 당신이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이런 농담을 던진다면 그들은 격분할 것이다. 인간의 내적인 힘과 본연의 정서에 집중하고, 꿈과 이상을 좇으며, 무엇보다 자유를 사랑하는 그들에겐 가장 큰 모욕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요즘 유행하는 MBTI로 따져보자면... 명백한 INFP의 성향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미지의 배반은 누가 봐도 파이프를 그린 그림 밑에 단 한 줄의 문장을 추가함으로써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 작품은 지금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발표되자마자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에 마그리트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긴다. "그것은 그려진 것일 뿐 파이프가 아니다. 만약 그 그림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다'라고 썼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림 속 파이프는 단지 이미지일 뿐이지 실재하는 오브제 즉 파이프 그 자체가 아니라는 소리다.
이게 무슨 장난질이냐며 투덜대고 있을 당신, 생각해 보라. 실제 삶에서 이미지와 실재를 혼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비일비재한지. 이처럼 마그리트는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정의하기 어려운 간극을 포착해 냄으로써 보는 이의 독창적인 사유를 이끌어낸다.
골콩드(1953)
마그리트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익숙함과 낯섦이 한 화폭 안에 공존하는,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초현실주의에서는 이를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 부르는데, 익숙한 사물을 그곳이 있어선 안 될 새로운 맥락에 배치해 독특한 분위기를 구성하는 표현 기법을 뜻한다. 바로 이러한 원리로 독특하고 신비로운, 마치 꿈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그려지는 것.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런 작품들이 관객의 마음속 깊이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에겐 콧수염 아저씨로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그 역시 자신의 무의식을 작품의 대상으로 하는 초현실주의적 화풍을 보여주었다. 특히 녹아내리는 듯한 시계로 가득한 기억의 지속은 실제 그가 두통에 시달렸을 때 보았던 광경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또한 그는 회화뿐만 아닌 영화로도 자신의 예술혼을 표출했는데, 전설적인 영화감독인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과 합작한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는 초현실주의 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난해함도 난해함이지만, 중반부에 등장하는 고어적 코드 때문에 관람 전 반드시 주의를 요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하는 초현실주의 작품은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이다. 15-16세기 무렵에 활동한 화가이기에 시기상으론 초현실주의 창시된 20세기보다 거의 400년이 앞서 있지만, 그 독특한 화풍 덕분에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란 칭호를 부여받은 인물이다.
보스는 생애나 작품에 대해 알려진 게 별로 없고 일기나 편지 등도 전혀 남기질 않아 베일에 싸인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작품 역시도 그 궤를 따르려 하는 듯 수수께끼투성이다. 얼핏 보면 성서에서 영감을 받은 듯 보이지만 그러기엔 상식 밖의 상황들이 곳곳에서 출몰한다. 낙원이라 보기엔 불길하고, 지옥이라 보기엔 평안하며, 죄를 짓고 있는 자들의 표정은 너무 순진무구하다. 이 의문투성이의 그림을 해석하기 위해선 보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극히 개인적인 상상력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물로 재탄생될 수 있는지 다시금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패션과 초현실주의가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27년,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가 설립한 브랜드 Maison Schiaparelli. 30년대 초반까지 니트웨어 중심의 의류들을 제작하며 브랜드를 성공 가도로 이끌었던 그녀는 1930년대 중반, 초현실주의자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그들의 철학에 깊게 매료된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컬렉션에 융합시키기 위한 여러 시도를 거듭한다.
특히 살바도르 달리와의 협업은 100년 가까운 시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그들이 선보인 랍스터 드레스는 중고 매장이 아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을 정도니까.
하필이면 왜 랍스터일까? 태고적의 원초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동시에 요리가 되면 선명한 붉은색으로 변하는 랍스터는 당시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인기 있었던 모티브로, 성적 은유의 상징이었다. 엘사는 달리의 랍스터 스케치를 순백의 드레스에 그대로 이식해 에로틱한 긴장감을 심어두었던 것.
리본과 타이 등의 장식을 프린트나 자수 등으로 평면에 재현해 눈속임을 의도한 트롱프뢰유(trompe l’oeil) 기법은 엘사의 시그니쳐다. 요즘엔 기술의 발달로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엄청난 아이디어로 인정받으며 그녀를 성공하게 한 일등공신이 되어주었다.
달리와의 합작인 스켈레톤 드레스(Skeleton Dress)와 티어 드레스(Tears Dress) 역시 트롱프뢰유 작품이다. 스켈레톤 드레스에선 충전제를 사용해 인간의 뼈를 그대로 재현했으며, 티어 드레스에선 마치 천이 찢긴 것만 같은 착각을 주는 무늬를 새겨두었다. 이처럼 그들은 실제와 허구 사이의 충돌을 조장하여 관객에게 독특한 감상을 주고자 했다.
아쉽게도 엘사의 Maison Schiaparelli는 제 2차 대전 이후의 위기를 이겨내지 못해 1954년 한 번의 파산을 겪고 마는데, 이후 2014년 Schiaparelli란 이름으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그들의 최근 컬렉션에서도 설립자의 미감을 계승한 초현실주의적 향취가 짙게 풍긴다.
미국 출신의 사진작가 만 레이(Man Ray)는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아우르는 개성 있는 분위기의 작품들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사진을 단순한 재현의 도구가 아닌 새로운 표현 매체로 받아들였고, 이를 통해 사진계의 혁명을 일으킬만한 유의미한 시도들을 이어나갔다. 과거엔 기록을 남기는 데 불과했던 사진을 엄연한 미술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게 만든 전설의 인물이다.
그가 찍은 패션 사진 역시 범상치 않다. 베니티 페어(Vanity Fair)와 보그(Vogue),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등 저명한 패션 잡지에서 러브콜을 보낸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뿐만 아니다. 그 영향력은 현대의 패션 포토그래퍼와 디자이너에게도 큰 영감이 되었는데, 때문에 패션계에서 만 레이의 흔적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초현실주의적 시선으로 본 패션은 어떤 모습일까? 기대하시라.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던 그보다 더한 놀라움을 선사하리니.
초현실의 핵심은 일상의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데 있다. 어떤 존재나 사물의 기능이 가진 강한 고정관념을 상상력을 이용해 단숨에 비틀어버리는 것. MAISON MARGIELA와 Jean Paul Gaultier의 머리카락을 활용한 의상과 모자, MARC JACOBS 2008 SS에 나타난 거꾸로 된 신발처럼 말이다. 이처럼 친근한 것을 내세워 일단 관객을 유혹함과 동시에 대상에 충격적인 변주를 주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이끌어 내는 것이 초현실주의가 가진 위력이다.
과장과 왜곡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증폭시키는 요소다. 우리가 미처 간과하고 있는 것들을 과장하거나, 의례 그렇게 믿어왔던 것을 왜곡시켜 시선을 끌고 대상에 대한 깊은 고찰까지 이끌어내는 것. 최근 JW ANDERSON의 컬렉션이나 Louis Vuitton의 2023 SS에서 보여주었던 과감한 시도들은 모두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볼 수 있다.
이분법적 사고는 초현실주의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세상에 대한 온갖 편견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 패션 역시 이러한 정신을 기꺼이 계승한다. 그 어느 분야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외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이 되어버린 패션계. 이를 타파하기 위한 방책은 전혀 다른 성격의 것들을 결합해 생경한 이미지를 창조해 내는 것이었다.
초현실주의에게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욕망을 대변하는 강력한 무기다. 억압된 성적 욕망을 외부로 발산하고, 이를 통해 이성의 지배 아래 놓인 인간 본성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또한 대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들을 독립시키기 위해서도 에로틱한 모티프를 사용하는데, 주로 여성의 신체를 작업에 접목하여 사고의 전복을 꾀한다.
인간의 상상은 절대로 경험을 뛰어넘지 못한다. 이젠 하나의 슬로건처럼 굳어진 상상력엔 한계가 없다는 주장은, 상상력이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을 미지의 무언가를 소환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상력은 오직 인간의 경험들 안에서 오감을 통해 수집한 정보들을 재구성한다. 결국 상상력과 현실은 서로 가장 멀리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상상력과 광기를 혼동케 하지 않을 단 하나의 이유다. 설령 그게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상력엔 나름의 맥락과 체계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광기는 아니다.
이런 면에서 패션은 초현실주의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패션계에서 벌어졌던 온갖 기행들을 떠올려보라. 당신은 그것이 패션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결국 패션은 초현실주의를 통해 광기란 오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 더욱 너그럽게 패션을 대하라. 내게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이라 말했던 마그리트처럼,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상상력을 활용해 현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니까. 현실을 도피하거나 붕괴시킴으로써가 아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무엇보다 사랑하며, 지금 여기, 이 곳에서 찬란한 꿈을 좇을 수 있도록 말이다.
자유라는 낱말 하나가 아직도 나를 열광시키는 모든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