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Dec 18. 2023

르메르: 진정한 멋은 환상이 아닌 일상에 있다

한국인들은 어쩌다 르메르에 매료되었을까? 

Brand LAB: Lemaire 

진정한 멋은 환상이 아닌 일상에 있다



올해 초 파리에 첫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한 LEMAIRE. 그 뒤를 이을 두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의 위치는 놀랍게도 서울 한남동의 한적한 골목이었다. 많은 패션 피플의 관심 속에 지난 11월 오픈한 이 곳은 1970년대에 지은 2층짜리 한옥을 리모델링 하여 또 한 번 화제를 모았다. 하얀 외벽과 원목의 조화, 뉴트럴 톤의 인테리어는 우리가 익히 알던 LEMAIRE의 무드 그 자체다.



파리 마레지구 중심부에 위치한 LEMAIRE의 플래그십 스토어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LEMAIRE의 두번째 플래그십 스토어 ©lemaire.fr




그들은 공간이 주는 의미를 정말 잘 파악하고 있다. 정적인 풍경에 녹아든 단아한 외관, 화려한 장식 없이 본래의 선과 면을 살려 구성한 내부, 게다가 공적인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집’처럼 느껴지는 연출은 LEMAIRE의 스토어 전반을 아우르는 핵심이다. 다른 무엇의 도움 없이, 오직 자신들의 작품으로만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겠다는 야심찬 포부가 느껴진다. 단지 쇼핑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고객들이 오랜 시간 머물며 LEMAIRE의 분위기를 향유할 수 있을, 사색과 자유의 장이 탄생한 것이다.



©lemaire.fr






가장 LEMAIRE다운 것


일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현실 속에서 시를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Interview, 2013년 10월)





LEMAIRE의 수장, 크리스토프 르메르(Christophe Lemaire)의 패션 철학은 그들의 공간에 묻어난 편안함과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근원을 보여준다. 그는 오직 ’기본에 충실함‘으로써 패션계가 처한 혼돈의 상황에 나름의 질서를 부여하려 노력한다. 매해 수십 개의 브랜드가 뜨고 지며, 정체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반복해야만 하는 이 복잡 미묘한 세계에서 말이다.



LEMAIRE 스튜디오 팀

#LEMAIREPEOPLE ©LEMAIRE pinterest

©lemaire.fr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LEMAIRE다운 것인가?

유연한 실루엣과 젠더리스한 디자인, 뉴트럴한 컬러톤, 이와 결합한 양질의 소재는 LEMAIRE의 시작부터 함께한 변함없는 조건들이다. 그들은 시대를 초월하고 유행을 거부하며 동시에 실용성과 기능성까지 갖춘 옷을 만드는 걸 목표로 한다. 여느 디자이너처럼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옷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시선을 존중하고 가장 유익한 선택으로 인도하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자연친화적인 색감과 웨어러블한 디자인으로 고객의 접근성을 높이고, 소재와 품질에 남다른 심혈을 기울여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는 옷을 추구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장기이자 몇 해가 지나도 변치 않는 그들의 정체성, 즉 LEMAIRE다운 것이다.



LEMAIRE의 아틀리에 멤버들

2022 SS ©LEMAIRE pinterest








크리스토프 르메르와 사라 린 트란


크리스토프 르메르(Christophe Lemaire)는 자신이 천재 디자이너라 불리는 게 터무니없다 하지만, 그동안의 화려한 이력은 범상치 않은 그의 능력을 다시금 증명한다.



크리스토프 르메르 ©somamagazine.com



대학에서 문학과 응용미술을 전공한 크리스토프는 80년대 초 Thierry Mugler와 SAINT LAURENT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패션계에 입문한다. 이후 1990년, 파리의 신진 디자이너를 지원하는 ANDAM 어워즈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브랜드를 설립하는데, 그때 탄생한 게 바로 자신의 이름을 딴 Christophe Lemaire. 현재 LEMAIRE의 프로토 타입이라 보면 된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의 일이다.



ANDAM 어워즈에서 우승한 당시의 크리스토프 ©andam.fr



이처럼 이른 나이의 자신의 브랜드를 갖게 된 크리스토프. Christophe Lemaire는 론칭 이후 10년간 무탈히 지속되는 듯 보였지만, 그 속엔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그가 바라던 크리에이티브한 작업들 외에 처리해야 할 비즈니스적 업무들이 너무 과했던 것.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그는 2000년 LACOSTE의 아티스틱 디렉터 제안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브랜드는 잠시 보류하기로 마음먹는다.



LACOSTE의 파리 부티크. 크리스토프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있다. ©fr.fashionnetwork.com
©vogue.com



“나는 LACOSTE의 이야기, 브랜드의 가치, 우아한 스포츠 스타일, 민주적인 측면을 좋아합니다.” 2013년 Interview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LACOSTE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낸다. 다행히도 그의 손을 거친 LACOSTE는 시크한 스포츠웨어라는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그의 커리어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가 된다.



크리스토프의 마지막 LACOSTE 컬렉션 2011 SS ©vogue.com



이러한 성공의 경험이 그에게 다시 자신감을 안겨주었던 것일까. 2007년, Christophe Lemaire는 재론칭의 수순을 밟는다. 그리고 그는 이 두 브랜드 사이에서 나름의 스타일을 형성해 나가며 활동을 펼쳐나간다.

이렇게 나날이 발전해 가는 그에게 찾아온 경사스러운 소식. 바로 2011년, Hermès의 아티스틱 디렉터의 자리를 제안받게 된 것이다. 그의 Hermès는 여러모로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특히 2013 FW쇼는 “마침내 순수한 프렌치 시크가 탄생했다”는 극찬을 받으며 그의 이름을 패션계에 깊게 새기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Hermès 2013 FW ©vogue.com
크리스토프의 마지막 Hermès 컬렉션 2014 FW ©professional-luxury.com



또한 2011년은 그의 브랜드 Christophe Lemaire에 있어서도 변혁의 해였다. 지금까지 LEMAIRE를 함께 이끌어오고 있는 파트너 사라 린 트란(Sarah-Linh Tran)이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하게 된 것. 이와 동시에 브랜드명도 Christophe Lemaire에서 자신의 이름을 과감히 삭제한, LEMAIRE로 변경하게 된다.



크리스토프 르메르와 사라 린 트란 ©voguebusiness.com



사라는 LEMAIRE의 스타일에 견고한 안정감을 선사한 중요한 인물로, 고유의 심미안과 예민한 감수성을 활용해 크리스토프의 단점을 보완하며 브랜드를 성공으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해낸다. 또한 뛰어난 스타일링 실력 덕분에 인간 LEMAIRE 그 자체라고 불리며 그녀의 오오티디에 호기심을 갖는 팬들까지 생겨났을 정도.



사라 린 트란의 일상복 ©pinterest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창작의 비전을 공유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둘은 LEMAIRE를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럭셔리 브랜드로 성장시킨다.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건 스타일에 대한 공통된 생각 덕분이다. 이들에게 스타일은 개인의 세계를 구성하는 뿌리와 같으며, 때문에 스타일은 결국 자신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lemaire.fr






특유의 무드로 틈새를 공략하다


이처럼 LEMAIRE의 컬렉션은 환상이 아닌 일상, 타인이 아닌 개인에서 출발한다. 이들의 런웨이에서 목격되는 연극적인 연출은 모두 내러티브와 캐릭터를 중시하는 두 디렉터의 철학으로부터 발현된 아이디어다.

캐릭터를 완성해야 그 옷에 깊이를 더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우리만의 이야기를 떠올리려 합니다.

출근길 도시 거리를 떠올리게 하는 사운드 효과나, 산책을 즐기는 듯한 여유로운 걸음, 갑자기 비가 내리는 상황 설정, 모델끼리 인사를 나누거나 담소를 즐기며 짝지어 걸어가는 풍경은 정말 우리네 일상과 별반 다를 게 없다.




©LEMAIRE pinterest



추상적이거나 극적인 변주, 트렌드에 기반한 디자인, 저렴한 가격을 위한 대량 생산, 셀러브리티들을 기용해 펼치는 전투적 마케팅은 LEMAIRE의 컬렉션에선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얼굴이 비교적 덜 알려진 모델이나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 직업의 모델을 쇼에 세워 LEMAIRE만의 진정성을 담아내려 했다.



©LEMAIRE pinterest



갑자기 두 달간 휴가를 떠나야 한다면, 어떤 옷들을 가방에 챙겨갈 것인가?

그들의 영감은 언제나 이런 현실적인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그 안엔 ‘휴가’라는 낭만적인 상황 역시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일상을 영위하면서도 언젠가 그 안에서 실현될 낭만적 상황들에 어울리는 옷을 만드는 것, 나아가 옷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vogue.com



그들의 시그니처 아이템들이라 말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유니섹스한 실루엣을 하고 있다. 루스한 형태의 트위스티드 팬츠나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 비대칭 드레스, 오버핏의 코트가 그렇다. 풍성한 볼륨감과 안정된 착용감으로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완성도 높은 아웃핏을 실현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매해 꾸준히 등장했던 트위스트 팬츠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
비대칭 드레스
오버핏 코트 ©LEMAIRE pinterest ©vogue.com


그에 반해 액세서리들은 그들의 상상력을 잔뜩 담고 있다. 카메라 모양을 한 이름도 카메라 백, 크로와상을 닮은 이름도 크로와상 백, 조개에서 영감을 받은 카를로스 백은 거의 조소 작품에 가까운 모양새다. 주얼리 역시 마찬가지다. 금속의 매끈함과 어우러지는 부드러운 곡선들은 의류의 우아함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카메라 백
크로와상 백
카를로스 백
주얼리 컬렉션 ©LEMAIRE pinterest, ©lemaire.fr



마지막으로 매해 컬렉션의 피날레에 등장하는 크리스토프와 사라의 아웃핏 역시 LEMAIRE의 쇼를 감상하는 또 하나의 재미다. 이 완벽한 커플룩 덕에 LEMAIRE에 입덕하게 된 마니아들도 정말 많다고.



©vogue.com






패션, 예술을 흠모하다


사실 LEMAIRE처럼 샤라웃에 진심인 브랜드도 없다. 아메리칸 원주민 출신인 작가 조셉 요아쿰(Joseph E. Yoakum), 인도네시아의 아티스트 노비아디 앙카사푸라(Noviadi Angkasapura)와의 협업은 물론 매 컬렉션의 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필루스키(Pilooski)까지. 대중성과 인지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직 자신만의 취향으로 선별된 아티스트들과 긴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조셉 요아쿰과 협업한 LEMAIRE의 캡슐 컬렉션 ©wallpaper.com




특히 요아쿰과 앙카사푸라의 작품은 크리스토프와 사라에게 영적인 울림을 안겨준 대상이다. 실제로 두 작가의 화풍에선 뚜렷한 공통점이 목격되는데, 그중 하나는 모국의 민속적 색채가 강하게 녹아있다는 점, 또 다른 하나는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볼펜과 색연필처럼 흔하고 친숙한 도구들을 사용해 작업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예술 평론가 로저 카디널(Roger Cardinal)은 이처럼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 기성 예술의 유파나 지향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창작한 작품에 대해 아웃사이더 아트라 칭하는데, LEMAIRE 역시 이와 같은 아웃사이더 아트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노비아디 앙카사푸라와 협업한 LEMAIRE 컬렉션 ©lemaire.fr


저는 대부분의 현대 미술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 그 이면에는 너무 많은 계산과 상업적 전략이 숨어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웃사이더 예술, 곧 스스로 예술임을 인식하지 않는 예술 속엔 진정성이 있습니다. (Wallpaper, 2022년 9월)

아웃사이더 아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 성별, 인종적 배경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다는 것에 있다. 이는 LEMAIRE가 지향하는 세계, 즉 차별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지길 꿈꾸는 세계와 일치한다. 오직 현실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헛되고 미성숙한 가상현실보다 날것의 작품을 통해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을 복기하는 것. 이처럼 그들의 작품은 인간이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삶에 충실한 태도를 지지한다.



앙카사푸라의 전시가 열리는 파리 LEMAIRE 플래그십 스토어 ©lemaire.fr


LEMAIRE의 두 디렉터, 크리스토프와 사라에게 패션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언어이며, 스타일링은 화법이나 다름없다. 마치 하고픈 말들이 자연스럽게 발화되듯 패션 역시 그렇게 착용되길 원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빠른 변화 속에서 자신의 철학과 의지를 지켜가며 창작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 예측할 수 없는 미래,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경쟁자들까지. 허나 이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고유성을 인정 받으며 동시에 꾸준한 사랑까지 받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LEMAIRE의 순수하고 굳건한 행보는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멋진 방법론을 제시한다. 때문에 우리는 더욱 그들의 미래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Published by jentestore

르메르 최신 컬렉션 구경하러 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