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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Jan 19. 2024

패션계의 낭만주의자, 네가 참 궁금해

샌디 리앙부터 시몬로샤까지. 러블리함으로 물든 패션 트렌드 전격 분석

Stories: Romanticism

패션계의 낭만주의자, 네가 참 궁금해




낭만이 뭐라고 생각해?
친구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에 무턱대고 질문을 던졌다. 겨울철 마트 근처의 군고구마 냄새, 볕을 쬐며 즐기는 점심시간 막판 십 분 전의 꿀잠, 콧 속까지 얼어버릴 것 같은 날씨에 연인과 함께하는 노천탕… 모두 그럴듯한 대답들. 충분히 공감 가는 내용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답한 H의 톡을 보기 전까지는.
왼손잡이들에게 맞추어진 세상.
잡담으로 뒤덮여가던 화면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왠지 숙연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H를 제외한 우리 모두는 오른손잡이였고, 왼손잡이가 겪는 일상의 고충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뜬금없는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준 사랑스러운 친구들 덕에 나는 낭만에 대한 몇 가지 조건을 찾을 수 있었다. 첫째로, 낭만은 일탈과는 다르다. 일탈이 현재 상황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낭만은 현실을 거스르지 않고도 충분히 가능한 소박한 행복에 가깝다. 다시 말해 일상에서의 과감한 변화를 추구한다거나 무리하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이는 낭만이 가진 사전적 정의와도 일치한다. 현실에 메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둘째로, 낭만에는 어떠한 경향도 없다. 철저한 개별 맞춤 시스템이다. 군고구마 냄새와 꿀잠과 노천탕에는 서로 공유하는 감정은 있을지 몰라도, 이를테면 포근하고 따뜻함 같은, 그러나 트렌드처럼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하고 가야지라는 가이드라인 따윈 없다. 때문에 우린 여태껏 남의 눈치 안 보고 자신만의 낭만을 마음껏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낭만주의, 네가 참 궁금해


자, 그럼 세상 모든 왼손잡이의 대표인 H의 대답, 오른손잡이들한테 맞춰진 이 세상이 왼손잡이화 되길 원했던 그의 낭만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그저 특이 케이스로 분리해 격리시켜 버리면 그만일까. 아니다. 이는 오히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정점을 찍었던 낭만주의(romanticism) 사조와 연관 지어 보면 꽤 흥미롭게 풀어낼 수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wikipedia.org



낭만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유일한 인식의 수단으로 삼았던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탄생했다. 낭만주의 이전의 유럽은 어떤 문제든 이성의 합리적 판단으로 해결할 수 있다 믿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
사회적 질서와 제도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라는 명분으로 치열하게 진행되었던 이 혁명은 오히려 인간이 가진 광기와 공포 등 비이성적인 면을 더욱 부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때문에 계몽주의에 대한 신뢰는 서서히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그 대신 인간의 이성이 하찮게 여겼던 개인의 직관, 감성, 상상력 등이 화두에 올랐다. 바로 이것이 낭만주의의 핵심이다. 사회 보단 개인에, 외형보단 인간의 내면에 집중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오랜 싸움으로 정신적 피폐함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이러한 낭만주의는 마른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낭만주의의 초석을 다진 독일의 슐레겔 형제 ⓒoxfordsong.org



이윽고 이러한 경향은 예술계에까지 퍼져, 당시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 있던 고전주의도 함께 타깃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고전주의가 중시했던 보편의 미, 엄격한 규칙에 강력히 저항하며 보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적인 것, 불규칙적인 것으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했다. 그리고 점차 즉흥적이며 감성적인, 창작자 자신의 감정과 철학을 드러내는 작업을 추구해 나갔다.



윌리엄 터너, 눈보라 ⓒartsy.net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 호의 뗏목 ⓒbritannica.com



낭만주의 운동은 결국 “어떤 종류의 보편성에도 강력히 저항하는 것(낭만주의의 뿌리, 이사야 벌린)”이다. 마치 오른손잡이가 질서이자 규칙처럼 작동하는 세상에서 왼손잡이의 주체성을 강하게 어필했던, H의 낭만처럼 말이다.





낭만에 대한 패셔너블한 해석


날이 갈수록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온갖 종류의 보편성과 투쟁 중이다. 고기를 먹지 않거나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다거나… 때론 SNS를 안 한다며 비난하는 시대 역시 바로 지금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과거처럼 무력을 사용해 격렬히 전투하지 않는다. 대신 각자의 신념을 강력히 어필할 수 있는 매체를 찾아 나선다.
패션도 그 중 하나다. 그렇게 따지면 2023년의 패션계는 낭만주의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프코어와 젠더리스 등 묵직하고 강렬한 트렌드의 틈 속에서, 그동안 등한시 되었던 로맨틱한 무드가 굳건히 피어났기 때문이다.



Molly Goddard 2023 SS, MM6 Maison Margiela 2023 SS
CHANEL 2023 SS, Victoria Beckham 2023 SSⓒvogue.com




그러나 2023년의 로맨틱 무드는 그저 페미닌한 색채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모든 소녀들이 함께 꾸었던 공통의 꿈을 패션으로 펼쳐내려 한다. 지나간 것에 대한 향수와 추억 속의 의미 있는 순간들, 나아가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다채로운 상상들을 가미하여 말이다. 이것이 바로 패션이 낭만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이 아닐까.

이러한 경향은 올해 2024년에도 꾸준히 이어질 전망이다. 작년 트렌드의 핵심이었던 발레코어와 Simone Rocha, Sandy Liang에서 쏘아 올린 탐스럽고 러블리한 리본 디테일은 지난 해 받았던 열렬한 사랑을 동력 삼아 최근 컬렉션에서도 여전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치 기억 속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아련한 잔상들과 훌쩍 커버린 우리 사이의, 사라지지 않는 인력처럼.



LOVESHACKFANCY 2024 SS, Collina Strada 2024 SS
VALENTINO 2024 SS, Maryam Nassir Zadeh 2024 SSⓒvogue.com







Sandy Liang


Sandy Liang의 디렉터 샌디 리앙(Sandy Liang) ⓒharpersbazaar.com




발레코어의 선두주자이자, 여러 셀럽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Sandy Liang. 브랜드의 디렉터 샌디 리앙(Sandy Liang)이 생각하는 낭만은 대단한 게 아니다. 어린 시절 일기장 속에나 등장할 법한 소소한 행복의 순간들이 그녀에겐 바로 낭만이자 영감이다.



SSENSE에서 공개한 Sandy Liang 2024 SS 컬렉션의 무드보드 ⓒ트위터 @venusianruby




그녀는 엄마의 오래된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TJ MAXX(미국의 중저가 아울렛)의 미끄러운 스포츠 샌들을 신고 있었다.
Sandy Liang의 2024년 컬렉션 무드보드엔 이러한 글귀가 적혀있다. 엄마의 옷장을 몰래 뒤적이며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던, 모든 소녀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문장이다.



2024 SS
2024 RESORT, 2023 FW
2023 FW
2023 SSⓒharpersbazaar.com, ⓒvogue.com, ⓒallure.com



샌디 리앙은 여성스러운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을 순수하고 연약하지만,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니고 있는 소녀들에게서 찾는다. 어린아이 같은 행복이야 말로 우리 안에 내재된 가장 근본적인 낭만이 아니겠냐는 물음을 던지며 말이다.



샌디 리앙의 인스타그램 @sandyliang



Sandy Liang의 컬렉션은 종종 Dior의 드레시한 분위기와 비교되곤 하지만, 보다 웨어러블한 의상들을 선보인다는 점에 있어 차이점을 보인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무대보단 일상에도 녹아들 수 있는 진정한 낭만을 추구하겠다는 샌디 리앙의 특별한 관점이 깊게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Sandy Liang의 의상을 착용한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와 제니 ⓒpopsugar.co.uk, ⓒgrazia.sg
2018 SS ⓒofficemagazine.net







Cecilie Bahnsen


디자이너 세실리에 반센(Cecilie Bahnsen) ⓒhurs-official.com




Cecilie Bahnsen의 수장, 디자이너 세실리에 반센(Cecilie Bahnsen)은 2023년 7월 ELLE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취향과 삶, 모두에서 매우 낭만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면, 반드시 Cecilie Bahnsen의 컬렉션을 검색해 보길. 보자마자 백 퍼센트 동의할 테니까.



2024 SS
2023 FW
2019 FWⓒvogue.com, ⓒforbes.com




세실리에 반센은 풍성한 실루엣과 다소 과장된 퍼프소매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마치 동화 속 공주님이 입을 법한 의상을 선보이지만, 의외로 그녀의 의상을 선호하는 모든 이들은 겉모습에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편안한 착용감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다. 역시 미니멀리즘을 사랑하는 덴마크인의 피는 무시할 수 없는 걸까. 러블리한 드레스에 블랙 양말, 그리고 아식스 운동화. 이젠 공식처럼 되어버린 Cecilie Bahnsen만의 시그니처 룩이다.



2023 SS ⓒfashionista.com
Cecilie Bahnsen X ASICS ⓒhypebeast.com




화려함과 절제가 공존하는 룩. 이 진귀한 무드는 여성이 가진 환상과 현실의 기능성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기에 만점짜리다. 또한 이것이야 말로 패션만이 품을 수 있는 포스트-낭만주의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낭만은 절대 유행을 타지 않으니.



Cecilie Bahnsen의 의상을 착용한 아리아나 그란데와 그레이스 반더월 ⓒfashionsizzle.com, ⓒpopsugar.com
ⓒharpersbazaar.com







Simone Rocha


Simone Rocha의 디렉터 시몬 로샤(Simone Rocha) ⓒscmp.com




리본과 진주하면 떠오르는 브랜드. Simone Rocha는 어느 날 혜성처럼 우리 앞에 나타났다.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들의 강점인 발랄한 분위기와 걸리시한 감성이 그동안 메말라있던 패션계의 페미닌함을 가득 채워주었으니. 그래서인지 Simone Rocha의 컬렉션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어떤 아이템이라도 좋으니 하나쯤은 무조건 가져야만 할 것만 같다고.



2024 SS
2023 FW
2022 SS ⓒvogue.com, ⓒculturedmag.com




이 매력적인 브랜드의 주인인 시몬 로샤(Simone Rocha)는 2022년 10월 Wallpaper와의 인터뷰에서 디자이너로서의 자신의 철학을 당당히 선언한다.
브랜드의 아이덴티티가 진정한 당신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시몬의 작업은 언제나 개인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일본 여행에서 보았던 벚꽃이나, 프로방스에서 보았던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거대한 거미 작품(마망, Maman)을 떠올리며 말이다. 참고로 루이스 부르주아는 시몬이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루이스 부르주아, 마망 ⓒhero-magazine.com
2020 SS ⓒwmagazine.com




개성적이면서도 개인적인 것. 시몬은 언제나 자신의 의상이 입는 사람의 스타일에 무난하게 스며들길 바란다. 착용자가 적응해야 하는 옷이 아닌 옷이 착용자에게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누가 입던 그 스스로의 매력이 온전히 드러나게끔 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헤아리고 그들 각자의 내면을 존중하는 일.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진정한 낭만주의자다.



Simone Rocha의 의상을 착용한 리한나와 나탈리 포트만 ⓒvogue.com
클로에 세비니와 알렉사 청 ⓒwmagazine.com
2017 SS ⓒwhowhatwear.com




패션과 낭만. 이 둘 사이의 끈질긴 인연은 저 먼 과거에서부터 이어져왔다. 과격한 단속을 피해 가며 장발에 미니스커트를 고집했던 시대에도, 귀 밑 삼센치의 단발령에 맞서 학교 담벼락을 타고 넘었던 시대에도, 용한 수선집을 수소문하며 교복 리폼에 혈안이 되어있던 시대에도, 우리는 납득할 수 없는 보편성의 강요에 맞서 참 열심히도 싸웠다. 오직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마라.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이 나는 거다.
어느 드라마에 등장했던 주인공의 대사. 그에게 낭만은 삶의 이유이자 계기나 다름없다. 나는 이 명대사를 감히 패션에 적용해 보려 한다.
우리가 왜 (옷을) 사는지, 무엇 때문에 (옷을)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마라.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패션도 끝이 나는 거다.

질문의 답은 이미 나왔다. 스타일을 지키기 위해.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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