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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

Interview: Sarah’s Moon


Interview: Sarah’s Moon


나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

안신영 작가의 복슬복슬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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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는 존재하기가 어려운 실. 여러 개의 실이 한 데 엮여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나는 한 명의 인간이지만 결코 하나의 정체성만을 지니지는 않았습니다. 오늘은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이자, 실과 바늘로 나만의 세상을 끊임없이 직조해 나가는 작가 안신영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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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안신영


작가님의 작업을 처음 마주할 사람들을 위해 작가님의 작업 세계에 관해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2011년에 우진을 임신하고 출산하면서 아이 용품을 모두 직접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이 사라즈문(Sarah’s Moon)의 출발입니다. 처음엔 구름 모빌, 가랜드, 아이의 양말과 옷과 액세사리 신발 등등을 만들다가 2014년경에 모빌 판매를 시작으로 본격 활동하게 되었어요.


벌써 10년 넘게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데, 초반에는 아이가 저의 강력한 뮤즈이자 작업 세계의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더 확장되어 제가 만들고 싶은 것을, 다양한 재료로, 유연하고 즉흥적인 에너지를 담아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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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초대해주신 작업실, 집 한켠에 자리 잡고 있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집은 휴식의 공간이라 때로는 작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지치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는 작가님만의 비결이 있을까요?


내가 마음가짐이 되어있을 때는, 그냥 모든 것에서 좋은 기운과 아이디어와 영감을 받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에게는 ‘영감’ 자체보다도 주변에 널린 아이디어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는 명민한 레이더를 유지하는 일이 더 중요한데 이러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흐름을 타는 일이 중요해요. 그 흐름을 타는 일의 핵심은 그냥 매일매일 작업 테이블 앞에 앉아 뭐라도 만드는 성실함인 것 같아요.


저는 성실함이 자연스럽지 못한 사람이라서, 저의 성실함에는 반드시 즐거움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다행히도 작업은 늘 즐거워서 그 덕분에 거의 매일매일 비슷한 시간에 테이블에 앉아 뭐라도 만드는 그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4.jpg 안신영 작가님의 작업 노트


작가님 작업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소재가 새와 꽃인 것 같아요. 새와 꽃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요?


새는 어릴 때부터 동경해 왔어요. 초등학교 때는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변진섭의 ‘새들처럼’이기도 했고요. 가사 내용처럼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나에게는 ‘자유’라는 가치가 너무나 중요해서, 그렇게 어릴 때부터 새가 상징하는 자유를 좋아했구나 싶어요. 딱히 자유가 제한된 경험을 하며 살아온 것도 아닌데, 그냥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것 같아요.

그래서 허술한 듯 유연하고 보는 이에게 자유를 주는 작업을 좋아하기도 하고, 제가 하는 작업에도 반드시 융통성과 즉흥성을 통해 자유를 담아내려고 노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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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무신론자인 제가 언젠가 혹시 신을 믿게 된다면, 그것은 꽃 때문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하고 있어요. 정말 감각이 끝내주는 창작자의 개입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거든요. 하지만 꽃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하게 된 것은, 아이가 어릴 적 화병에 꽂아 놓은 꽃이 시들어서 슬프다고 엉엉 울었던 일이 계기가 된 것 같아요. 그때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고자 시들지 않는 꽃을 처음으로 만들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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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계속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 나라는 사람에게 몰두할 시간이 없어지자, 그제야 뭔가를 만들고 창작하는 일들의 순수한 즐거움과 그것이 나의 정체성에 차지하는 지분 같은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아요. 시작은 그렇게 창작하는 일에 대한 즐거움이었다면, 그걸 10년 넘게 계속해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나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사실 이예요. 나는 그저 안신영.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엄마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하고 아내, 작업하는 사람, 배우는 사람, 누군가의 친구, 다양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는 늘 균형감각을 유지해야했고,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늘 스스로의 에너지와 집중력을 쪼개어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골고루 배분해야 했어요.


엄마 역할이 조금 망한 날에는 다른 역할들로 위로를 받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엄마 역할을 잘 해냄으로서 위로를 받고, 그렇게 내 안의 다양한 역할들이 서로를 돕고 위로해 주면서 단단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요. 그 덕분에 처음의 다짐 ‘ 가늘게 라도 좋으니 길게 길게 살아남는 사람이 되자’ 을 어느 정도 잘 지켜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일단 오래오래 살아남아야 성공도 하고 부귀영화도 누릴지도 모르고(!) 그런 거니까요.




엄마이자 딸, 안신영


‘육아란, 아이를 통해 어린 시절 나의 서사를 회복하는 것’.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을 구경하다가 발견한 문장인데요. 작가님의 유년 시절은 어땠나요? 궁금합니다.


7.jpg 안신영 작가님의 유년시절


저는 어쩌다 보니 다이나믹하게 이동하는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서울에서 태어나 부산으로 내려가 살다가, 아빠가 미국 주재원으로 발령이 나셔서 미국에서도 몇 년 살았어요. 덕분에 ‘유년 시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설레이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탄 기억이라든지, 미국 학교의 파란 잔디밭, 알록달록한 컵케익과 늘 내용물을 궁금하게 하는 구디백, 눈이 가득쌓이 설산과 산장 그리고 처음 스키를 타던 감각, 방학 때마다 아빠 차를 타고 미국 여기저기를 여행 다니던 기억-처럼, 당시의 제 또래 아이들이 경험하기 힘든 기억들로 가득해요.


그리고 어릴 때의 저는, 사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도, 무척이나 엄마쟁이였어요. 중학교 때는, 친구들이 학교 끝나고 같이 놀러 가자는 걸 ‘이따가 약속이 있어서 안 된다’고 둘러대고, 집으로 돌아가서 엄마랑 놀다가 같이 동네 슈퍼에 갔는데 하필 거기서 친구들을 마주쳐서 그날 뒤로 ‘마마걸’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랑 죽이 정말 잘 맞는다든지, 엄마랑 코드가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엄마는 저에게 ‘왜 모든 것을 그렇게 일부러 예민하게 생각하냐’고 자주 핀잔을 주셨고, 그럴때마다 저는 ‘나는 일부러 예민하게 생각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이렇게 타고난 건데..’라고 서운해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이가 어릴 때, 어떤 한 가지에 꽂혀서 그것에 대해 깊고 예민하게 파고들 때마다 그러한 아이의 마음과 성정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제 유년 시절의 서사가 회복되는 경험을 했어요. 육아의 목적이 ‘나의 회복’이 될 수는 없지만, 아이는 느닷없이 그것을 내게 주었고, 그러므로 아이는 이미 저에게 (해야 할 효도라는 게 있다면) 해야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은 어린 시절부터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일에 자연스럽게 애착이 생겼나요? 어떻게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미국에 살 당시에는, 아시아인이 흔치 않았어요. 반에서도 저 혼자 아시아인이었고 처음엔 영어도 서툴러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혼자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쉬는 시간마다 자기도 친구들이 그려 달라며 제 책상 앞에서 줄을 서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저를 가장 심하게 놀려대던 짓궂은 백인 남자아이도 그 줄에 합류했죠. 그 아이의 차례가 되었을 때 저는 당당하게 그림을 그려주지 않겠다고 말해주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나의 재능이 힘이 되는 경험을 했어요. 생각해 보면 그 아이에게 좀 모질게 굴었던 것 같긴 하지만, 그때 느낀 ‘내가 상황을 내 재능으로 통제한다’는 기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그리고 그 경험이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출발이었던 것 같아요. 그 재능을 어쩌면 강제적으로 발생시킨 것이, 언어 소통의 어려움이었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미술의-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는-소통으로서의 가능성을 어린 나이에 처음 경험해 본 거죠.


거기에 더해, 엄마가 손재주가 좋으셨던 것 -누구보다도 예쁜 송편을 만드셨어요-도 당연히 저에게 스며 들었을 거로 생각해요.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저는 아름다운 것에 눈이 밝았고, 감사하게도 어린 나이에 여러 곳을 다니면서 아름답고 이국적인 것들을 많이 보았고, 내가 생각한 것을 손으로 늘 만들어낼 수 있었어요. 그렇기에 제가 예고를 가고 미대를 가고 지금까지도 작업을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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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이들 아웃핏이 더 예쁘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뭐랄까, 타인의 시선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자유분방함에서 오는 매력이 있달까요? 혹시 우진의 옷 입기로부터 영감을 받았던 적이 있나요?


지금은 우진이가 한참 또래와 비슷하게 입고 다니고 싶어 하는 나이가 되어 그러한 자유분방함이 많이 사라졌지만, 초등학교 때는 내내 반드시 꼭!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다녔어요. 유치원 때 -아마 그때는 실수로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갔는데 선생님이 너무 멋지고 개성 있다고 칭찬을 해주신 거예요. 그 기억이 좋았는지 그 뒤로 정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짝짝이로 양말 신기에 꽂혀있었어요.


그때그때 아이가 하는 경험에 따라 스스로에 대한 정의가 풍부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부모로서 큰 즐거움이에요. 언젠가는 하얀 바지를 입고 있던 아이가, 검정색 유성마카로 양쪽 무릎 부분에 느닷없이, 웃는 얼굴(눈코입)을 그린 적이 있는데 그게 너무 귀여워서 그대로 계속 입혔던 기억도 나네요.

지금은 반대로, 제가 타인의 시선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시기로 접어들고 반대로 아이는 타인의 시선 속에 사는 시기로 접어들어.. 제가 좀 튀는 옷을 입거나 모자 같은 것을 쓰고 나가려고 하면 ‘엄마 진짜 그렇게 입고 나갈 거야?’라며 싫은 티를 냅니다. 그런다고 제가 아이 눈치를 보지는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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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작가님이 나중에 어른이 된 우진에게 물려주고 싶은 옷이 있나요?


아빠가 물려주신, Burberry 트렌치코트요! 이상하게도 저는 예전에도 지금도 Burberry 라는 브랜드- 특히 트렌치코트와 클래식한 체크 패턴이 참 좋아요. Burberry 체크에는 언제봐도 안심이 되는 무해하고 정겨운 미감이 있는 것 같아요. 아빠가 저 어릴 때 영국 출장길에 사오신 트렌치코트를 몇 년 전에 저에게 주셨는데, 저에게도 잘 맞아서 제가 잘 입고 있어요. 아이가 어른이 되면 물려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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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기억을 모두 품고 옛날로 돌아간다면?

어린 시절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 궁금합니다.


Don’t take yourself too serious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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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안신영


작가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영화처럼 장면이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글을 많이 읽으시는지요! 재밌게 읽으신 책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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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의 코어에는 책에 대한 사랑이 있어요.


초등학교 때 가장 좋아했던 작가는 헤르만 헤세였고, 중학교 때는 고전문학에 빠져서 세계 문학전집을 다 읽었던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요슈타인 가이더, 이영도를 좋아했고, 20대에는 폴 오스터와 무라카미 하루키, 30대에는 김연수, 앨리스 먼로 ,밀란 쿤데라 40대에 들어서는 테드 창, 정세랑, 김초엽처럼 sf 작가들을 많이 읽었어요. 요즘에는 수전 손택의 글들도 새삼스럽게 좋고요.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작가들과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은 책을 추리는 것은 너무나 어렵지만,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이고, 최근의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룰루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예요. 이 모든 책에 대한 사랑의 출발점에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있고요. 우진이가 어렸을 땐 타자기로 서로에게 편지를 쓰거나, 우진이가 제게 시를 팔아 용돈벌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종종 꺼내보는 소중한 기록이죠.


13.jpg 우진과 안신영 작가님이 서로에게 주고받은 시. 타자기로 직접 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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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인스타그램, 브런치 채널 불문하고 촘촘한 기록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꾸준하게 기록하는 나만의 팁이 있을까요?


저는 늘 기록하고 글을 쓰는 행위를 좋아했는데, 왜 그런걸까… 생각해 봤어요. 그건 아마도 제가 그릇이 크지 못한 사람이라 그런 것 같아요. 생각한 것들을 어떻게든 쏟아내고 표현하지 않으면, 마음이 쉽게 가득차 버려서 옹졸해지고 말거든요.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기록을 하는 거라 꾸준하게 기록하는 팁은 없지만 요즘 와서 자꾸 이런저런 생각을 모아서 한 번에 기록하자고 미루게 되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그냥 자기에게 잘 맞는 매체를 찾아 짧게라도 생각이 날 때 가볍고 쉽게 기록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어설프고 기록할만한 가치가 없는 생각이란 없는 것 같아요. 생각은 쉽게 휘발하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질이 되기 때문에-설사 그렇게 변한 생각이 최초의 생각보다 더 완성도가 높고 성숙한 생각이다 하더라도- 처음 그 생각을 건져 올렸을 때의 그 신선함 감각 같은 것은 따라잡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러한 기록일수록, 먼 훗날 복기하게 되었을 때 받게 되는 위로도 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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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서 크리스마스를 참 좋아하신다고요. ‘일 년 중 가장 즐겁게 작업하고 즐겁게 판매하는 오너먼트’도 그렇고, 최근 우진의 그림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하게 된 크리스마스 리본도 감탄하면서 봤습니다. 작가님에게 크리스마스는 어떤 홀리데이일까요?


미국으로 이사 간 첫해, 첫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온 가족이 다같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러 갔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 크리스마스 트리와 오너먼트를 파는 커다란 공장형 몰에 갔던것 같은데 어린 저의 눈에는 북극에 있다는 산타 마을에 들어선 기분이었어요. 한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풍경이었거든요.


그 다음 해에는 다 같이 시내..그러니까 맨하탄으로 나가서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보았는데, 가족이 모두 가장 예쁘고 단정한 옷을 차려입고 다같이 앞에서 세 번째 쯤 되는 자리에 앉아서 관람했던 기억도 나요. 그런데 이상하게 공연이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고 엄마가 입었던 치마와 신발이 단정하고 예뻤던 것만 기억이 나요. 가는 길에 보았던 백화점과 거리의 크리스마스 장식과, 록펠러센터 앞의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 한인교회 성탄절 행사 속 연극에서 -예수님의 탄생- 마리아 역을 맡았던 너무나 예뻤던 어떤 언니의 모습, 이런 모든 감각과 기억들이 시즌마다 다 떠오르니 크리스마스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죠.


한편으로는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조금은 슬픈 감정도 함께 떠오르는 시즌이기도 해요. 그리움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지만, 연말에는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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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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