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nd LAB: ENFANTS RICHES DÉPRIMÉS
Brand LAB: ENFANTS RICHES DÉPRIMÉS
우울한 부잣집 아들이
패션에 미치면 생기는 일
패션계의 악동, ENFANTS RICHES DÉPRIMÉS. 그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과 혁명의 메시지.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ENFANTS RICHES DÉPRIMÉS(이하 ERD). 직역하면 우울한 부잣집 아이들이라는 뜻. 낯선 프랑스어에 고개를 갸웃할 독자들을 위해 특별히 독음도 추가한다. 앙팡 리쉬 데프리메.
로스앤젤레스와 파리를 기반으로 2012년 설립된 이 브랜드의 주인은 앙리 알렉산더 르비(Henri Alexander Levy). 그는 패션 디렉터라는 신분 외에도 자신의 이름을 건 작품을 선보이는 아티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그야말로 이쪽 분야에선 타고났다.
그래서인지 브랜드의 설립 배경도 남다르다. 2010년대 초의 패션계는 전통적인 럭셔리 브랜드들을 선호하는 것이 부와 권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때. ERD는 이런 뻔한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 위해 태어났다. 부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공허함과 아이러니를 담은 작명 센스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단순한 제품 판매를 넘어, 소비 문화 전반을 향한 신랄한 질문을 던진다. 피상적이고 과시적인 럭셔리 브랜드의 고정관념을 겨냥함으로써 말이다.
나아가 그들은 현대 사회에 만연하게 퍼진 고독과 허무 역시 표현하고자 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가졌고,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뭐든 할 수 있지만 그렇기에 우울해져 버린, 아이들의 정처 없는 방황 그대로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냉소적이면서도 반항적인 그들의 시선은 상업적 성공을 넘어서 문화적 저항으로 패션계의 기록되었고 그 기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펑크 정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ERD. 하지만 그들의 반항적인 몸부림은 그저 치기 어린 몸짓이 아니다. 그 안엔 반짝이는 진정성이 있다.
11살 때부터 영국발 펑크 밴드 더 클래시(The Clash)와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를 즐겨 들었던 디렉터 앙리. 생동감 있는 멜로디와 에너지 넘치는 퍼포먼스, 직설적이면서도 풍자적인 가사는 단숨에 그를 매료시켰다. 하지만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그의 부모는 그를 차세대 리더로 키우기 위해 기숙 학교를 보내며 학업을 강요했다. 그렇다. 부잣집 우울한 아이는 바로 앙리 자신이었다. 결국 마약 중독자 시설까지 전전할 정도로 몸과 정신이 악화되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열심히 재활 치료를 받았고 성적도 향상해 UCLA 미술 학부에 합격했다. 비록 부모는 예술을 하겠다 선언한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해 모든 지원을 끊어버렸지만 그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브랜드라는 목적을 세우고 그에 몰입했다.
결국 그가 펑크를 창작의 기반으로 선택한 건 운명이었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잘 아는 것을 담은 브랜드. 때문에 ERD엔 그의 인생이 담겨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펑크뿐만이 아니다. 여러 소설가와 미술가들의 영혼이 담긴 예술 작품들까지 그에겐 모두 큰 울림이었다.
하지만 이런 확고한 취향 덕에 호불호가 심히 갈리는 것 역시 ERD의 특징이다. 그들의 룩북을 보면 깨닫는다. 확실히 그들은 남들과는 다르다. 90년대 헤로인 시크, 루 리드(Lou Reed)와 피트 도허티(Pete Doherty)의 퇴폐미, 사진가 유르겐 텔러(Juergen Teller)의 발칙함... ERD에게 영감을 준 많은 요소들은 보편적인 미와는 완전히 반대의 노선을 타고 있다.
우리는 이미 패션 커뮤니티에서 고립된 것 같지만, 후회하진 않아요.
앙리는 MARVI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덧붙여 자신의 철학을 엘리트 펑크(Elitist Punk)라는 새로운 표현으로 지칭한다. 개념적으로 엘리트와 펑크는 서로 완전히 상충되지만 소수의 집단이 같은 신념으로 결속력을 다지고 함께 미래를 도모한다는 점에선 꽤나 닮아있다.
사실 그들의 집단에 속하기 위해선 꽤나 비싼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티셔츠는 5-60만원선, 스웻셔츠도 100만원을 훌쩍 넘는데다 니트와 데님 아우터도 2-300만원대로 만만치가 않다. 결국 ERD의 패션은 취향의 차이에서 오는 분리와 고립, 그리고 고립 속에서 이뤄진 운명 같은 만남을 대변한다. 누군가는 그들의 굳건한 신념과 재치있는 디자인에 동의하며 기꺼이 가격을 지불할테니 말이다. 모두를 만족시키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다는 걸 그는 이미 그동안의 경험에서 충분히 깨달은 듯 하다.
ERD 컬렉션의 매력은 시즌마다 변화하는 감성과 트렌드를 반영하면서도 비판적인 메시지와 독창적인 미학을 잃지 않는 데에 있다. 스트릿 풍의 자유로움과 예술적 실험 정신을 결합한 독특한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 역시 이들의 강점. 단순히 고급 소재와 정교한 재단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철학을 묵묵히 디자인에 녹여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폐쇄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도 꽤나 성공을 이뤘는데 그 뒤에는 엄선된 의류를 한정적으로 판매하는 절대적 소량 생산의 철칙이 있다. 또한 몇몇은 손수 제작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마치 이런 아이템을 획득한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인물이 된 듯 한 착각이 들 정도로. 이러한 신비로운 방식은 여러 고객들의 소유욕을 자극했고 패션에 가장 민감한 셀럽들도 격렬히 반응했다. ERD의 첫 번째 셀럽 고객이 누구냐고? 놀라지 마시라. 바로 GD다. (COMPLEX, 2016.03)
파리의 버려진 주차장에서 열린 FW24 컬렉션. 펑크 베이스에 바로크적 감성을 더한 독특한 무드는 관객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앙리는 자신의 런웨이를 한 편의 영화처럼 꾸미길 원했으며 보는 이들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하길 원했다. 때문에 무대가 아닌 방치된 장소를 택했고, 이에 빈티지한 고급 자동차들과 녹색 조명, 짙게 깔린 안개를 더해 거친 느와르 분위기의 쇼를 완성해냈다.
가장 최근 컬렉션인 SS25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매 회사인 소더비(Sotheby's)의 파리 본사에 세트를 설치해 진행되었다. 벽 쪽엔 케이지를 설치해 감옥처럼 꾸며, 억압 속에서 피어나는 미의 절정을 은유했다. 권위를 상징하는 테일러링 재킷과 나폴레옹 재킷이 차례로 등장하고 이에 각종 레더 아이템을 곁들어 억압과 침묵, 지배에 대해 다뤘다. 이번 쇼에도 역시 시대 의상을 반영한 룩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이 역시 부와 사치에 조롱당하는 상류층에 대한 세련된 풍자로 읽힌다.
나의 컬렉션은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것이다. 그 당시 나를 사로잡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쇼에 모습을 드러낸다. (앙리 알렉산더 르비, NSS MAGAZINE, 2024.10)
우울하고 공허한 ERD의 세계엔 오직 하나, 디렉터 앙리의 취향만이 존재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하나의 취향으로 거듭났고 그 취향은 다신 없을 독보적인 브랜드를 창조해 냈다. 그렇기에 다시금 느낀다. 때로는 사소하지만 때로는 전부일수도 있는, 그래서 누군가에겐 절대적 일지도 모르는... 취향이란 이토록 오묘한 것임을.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