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and Color Black
무난하니까, 심플하니까, 튀지 않으니까. 만약 당신이 이런 이유로 블랙 코디를 선택했다면, 아직 블랙이 가진 진정한 매력을 몰라서 하는 소리!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만큼 다양한 취향을 포용할 수 있는 컬러가 바로 블랙이다. 때로는 우아하게, 때로는 편안하게, 때로는 섹시하게. 어떤 상황에서든 당신을 돋보이게 만들어 줄 최고의 컬러인 블랙의 매력을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자.
빛이 있으라. 문헌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문장이라 볼 수 있는 성경 속 이 한 마디는 세상의 탄생을 알리는 최초의 선언이었다. 그리고 이 반대엔 어둠이 있었다. 블랙은 이 어둠의 상징이자, 자연이 선사하는 색이다. 또한 인간이 빛과 색의 개념을 인지하기 이전부터 이미 마주하게 될 가장 처음의 색이다. 하지만 검은색은 엄밀히 말하면 색이 아니다. 여기서부턴 약간의 과학 지식이 필요한데, 검은색은 빛의 스펙트럼에서 나타나지 않는 영역이다. 때문에 많은 과학자들은 검은색을 색상으로 치지 않는다. 결국 검은색은 빛의 부재이자, 파동의 부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사물들의 검은색은 사실 완벽한 검은색이 아닌 것이 된다. 그저 은은한 색과 빛을 가진 어두운 계통의 색일 뿐이다.
이러한 의문스러운 특성들 덕분에 블랙은 자주 미스터리함의 상징처럼 쓰인다. 실제로 많은 작품 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은 비밀을 품은 채 두문불출하거나, 음지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이름 모를 해결사로 나타나거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인물로 등장한다. 이처럼 완전히 해석될 수 없는 신성함과 무한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유혹적 면모를 동시에 풍기는 색이 바로 블랙이다.
영화 <더 배트맨, 2022>
영화 <콘스탄틴, 2005>
영화 <저수지의 개들, 1996>
그렇다면 우리는 영영 완벽한 블랙을 마주할 수 없는 걸까? 애석하게도 답은 Yes. 빛조차 모조리 흡수하는 블랙홀 안으로 들어가야 그나마 가능할 텐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 '인간이 만든 블랙홀'이란 수식어가 붙은 신기한 물질이 있다. 빛 흡수율 99.965%를 자랑하는 반타 블랙(Vanta Black)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반타 블랙은 가시광선뿐만 아니라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자외선과 적외선까지 흡수하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물체를 평면처럼 보이도록 만들어버린다. 때문에 이 반타 블랙이 제품이나 옷에 쓰일 일은 거의 없다.
인도 출신의 아티스트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는 2016년, 거액을 주고 이 반타 블랙의 예술적 사용에 대한 독점권을 취득했다. '독점'이란 단어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예술계에서 이러한 이기적인 아니쉬의 행동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다. 반타 블랙을 사용한 아니쉬의 작품은 관객에게 마치 차원의 문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초현실적인 체험을 안겨주었고, 생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색과 마주한 이들은 그것이 주는 울림 앞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이후 2019년, MIT에서 빛 차단 99.995%의 리뎀션 오브 베니티(Redemption of Vanity)라는 반타 블랙보다 더 어두운 물질을 개발했고, 이 색의 독점권은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사실상 이 소동은 욕심쟁이 아니쉬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Anish Kapoor, Void Pavillion V(2018) 경계를 무너뜨리는 검정의 힘
블랙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는 좋은 무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과학자들과는 다른 맥락에서 검정을 부정했지만, 정작 그의 회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색은 검정이었다. 또한 광기 어린 화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스페인의 화가 고야(Francisco Goya)는 인간이 가진 근원적 공포를 표현하기 위한 색으로 주저 없이 검정을 선택했다.
Witches' Sabbath (The Great He-Goat), Francisco Goya (부분), (1821-1823)
검정의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했던 앞선 두 화가와는 달리 빛의 화가 르누아르(Auguste Renoir)와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Pablo Picasso)는 검정을 색의 여왕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문학 작품 속 등장하는 색 관련 표현 중 4분의 1을 검정에 빗대었으며, 검은 사각형(Black Square, 1915)의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와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주자인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은 물질 세계를 초월하는 순수한 영역을 그려내기 위해 검정을 사용했다.
Jackson Pollock, Black and White Painting III, 1951
Kazimir Malevich, Black Square, 1929
Auguste Renoir, Two Girls in Black, 1881
한편 블랙은 에로티시즘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마치 베일 뒤에 가려진 것에 더 호기심이 증폭되는 인간의 심리를 반영한 듯, 블랙 슬립과 언더웨어, 스타킹, 스모키 아이는 관능미의 표상이다. 또한 순결함의 상징인 웨딩 드레스와 대척되는 블랙 드레스 역시 당시 불길하다 치부되던 색상을 과감히 의복 전체에 적용한 사례로, 여성을 둘러싼 모든 이데올로기들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한다. 여성을 갑갑한 코르셋으로부터 자유케 한 코코 샤넬(Coco Chanel)의 블랙 드레스나,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블랙 턱시도를 여성에게 알맞은 형태로 변형시킨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의 르 스모킹(Le Smoking)이 바로 그 예이다.
clclt.com, Coco Chanel
SAINT LAURENT Le Smoking 2019 fashiongonerogue.com
"검은색은 겸손하면서도 거만하고, 게으르면서도 편안하며 동시에 신비롭다." 아방가르드 디자인의 선두주자인 Yohji Yamamoto의 수장 요지 아마모토는 블랙이 가진 가장 큰 매력으로 이질적인 분위기를 모두 품을 수 있는, 유연한 수용성을 꼽는다. 이는 모든 색을 흡수함으로써 발색되는 블랙의 정체성과도 일맥상통한다. 그의 컬렉션을 아우르는 전반적인 키컬러가 블랙인 이유 역시도, 난해함을 앞세워 다채로운 해석을 유도하는 아방가르드의 사상과 같은 결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자유로움을 사랑했으며 때문에 디자인 역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는 해독 불가한 옷들 앞에서 고뇌에 빠진 우리에게 정답을 강요하는 대신 애초에 해석할 필요가 없는 것들도 있다는, 반전의 태도를 일깨워 준 것이다.
2023 SS, 2021-22 FW, 2019 SS, 2023-24 FW ©yohjiyamamoto.co.jp
블랙 탑, 블랙 레더 팬츠, 다리를 감싸는 블랙 부츠와 블랙 롱 헤어. 이 몇 가지 힌트 만으로도 우리는 쉽게 릭 오웬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1994년, 자신의 이름을 본 딴 브랜드 Rick Owens를 론칭하였고 200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하나의 색감으로 통일된 룩을 주로 선보이는데, 가장 선호하는 색은 역시 블랙이다. 가장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색. 그에게 블랙은 가장 완벽한 캔버스였다. 이에 더해진 독특한 컷팅과 다소 실험적인 디자인들은 블랙이 주는 묵직한 무게감을 한결 가볍고 세련되게 변신시켰다. 신체의 특징을 섬세히 파악하고, 몸에서 읽어낸 실루엣의 삭제와 드러냄을 적절히 조절해 옷에 적용하는 것 역시 릭 오웬스만이 할 수 있는 장기다.
2022 SS, 2021 SS, 2022 FW rickowens.eu, Rick Owens의 디자이너 릭 오웬스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 앤 드뮐미스터는 동명의 브랜드 Ann Demeulemeester의 설립자이자, 총괄 디렉터다. 첫 컬렉션을 제외한 나머지 컬렉션은 거의 블랙의 향연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블랙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드러내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그녀에게 블랙은 곧 ‘순수함의 산물’이다. 매 시즌 블랙을 선택하는 이유 역시 색과 장식에 의해 디자인이 산만해지는 것을 피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작품을 이끌어가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하우인 셈이다. 강하고, 영원하며, 아름답고 고전적이라는 여러 가지 매력을 품은 블랙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이 그녀의 창작 전반을 지배하는 신념이다. 인간이 품은 낭만성과 공격성, 나아가 모든 감정의 영역에 이를 수 있는 색은 오직 블랙뿐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2023 SPRING, 2022 FALL, 2021 FALL, 2020 SPRING
팬데믹과 자연재해 등 최근 다사다난했던 현재를 전격 반영한 것일까. 최근 여러 브랜드들의 런웨이에선 올 블랙의 룩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시인의 시와 함께 반전의 메시지를 던진 Balenciaga의 2022 FW를 시작으로 , 온몸과 얼굴을 블랙으로 덮은 Maxmara와 Coperni, Y/Project의 룩들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애쓰는 인간의 본능을 반영한 듯 보인다. 또한 위태로운 사회 분위기 속 기성세대의 체제에 저항을 꾀하려 하는 아나키즘적 색채가 짙게 드러나는 블랙 룩도 Dior, Alexander McQueen의 런웨이에서 목격되었다. 이처럼 죽음과 애도, 혁명과 저항, 불안과 공포까지 여러 브랜드가 블랙을 활용해 세상에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시도했다.
Balenciaga 2022 FW, Maxmara 2023 RESORT, Coperni 2022 FALL, Y/Project 2022 FALL
Dior 2023 RESORT, Alexander McQueen 2023 SPRING
오랜 기간 CHANEL의 수장이었던 칼 라거펠트.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그는 항상 블랙 슈트를 고집했는데, 이젠 그 복장이 유니폼처럼 굳어져 다른 옷을 걸친 그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가끔 칠흑 같은 청바지나 벨벳, 실크와 같은 소재로 변화를 주긴 했지만 그래도 한결같이 블랙만은 고집했다. 그건 임종 직전까지 총괄을 맡았던 CHANEL의 컬렉션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류와 신발, 액세서리는 물론 전 세계에 퍼져있는 CHANEL 스토어의 인테리어에서 까지도 블랙은 마치 클래식함과 모던함이 함께 농축된 진액처럼 곳곳에 어우러져 작용한다.
CHANEL, SOHO
옷이 꼭 아름다울 필요가 있는가? COMME des GARCONS의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Rei Kawakubo)의 옷은 마치 기능성을 철저히 무시하려 작정하기라도 한 듯, 기괴하고 난해한 형상이다. 하지만 디자인의 착상 자체가 보편적인 미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최종 목표는 감히 상상으로도 닿을 수 없을 새로운 옷이기에 어쩌면 이 정도의 발칙함은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일지도 모르는 셈이다. '검은 장미(A Black Rose)'란 제목으로 개최된 COMME des GARCONS의 2022년 가을 컬렉션은 이번엔 그녀가 블랙을 자유와 독립의 상징으로써 풀어냈음을 보여준다. 이는 어둠과 혼돈, 아나키즘을 주제로 한 블랙 의상들을 꾸준히 선보여 오던 COMME des GARCONS의 행보와도 완벽히 맞물린다. 가와쿠보는 2018년, 가디언(Guardian)과의 인터뷰에서 "나의 작품은 일종의 풀 수 없는 선문답과 같다."고 고백했는데, 접근성이 무척 떨어진다는 최악의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가와쿠보를 패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여성 디자이너로 거듭나게 만든 건 결국 이런 독특함 때문이었다.
COMME des GARCONS 2022 FW ‘A Black Rose’
올해 유독 셀럽들의 파파라치에서 자주 보였던 올 블랙 룩. 헤일리 비버(Hailey Bieber)는 자칫하면 음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올 블랙 착장을 애슬레져 스타일로 발랄하게 해석해 내는 남다른 센스를 발휘했다. 그렇다면 카일리 제너(Kylie Jenner)는 어떠한가? 블랙이 가진 고급스럽고 세련된 느낌은 그대로 가져가면서도, 강렬한 소재를 선택하여 러블리하며 관능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언니인 켄달 제너(Kendall Jenner) 역시 심심치 않게 올 블랙의 착장을 선호하는데, 그녀의 선택은 블랙과 대비되는 컬러의 무늬들로 포인트를 준 상의를 착용하는 것으로, 산뜻한 켄달만의 개성을 마음껏 발산했다.
패셔니스타를 언급할 때 빠지면 섭섭할 지지 & 벨라 하디드(Gigi & Bella Hadid) 자매의 올 블랙 룩은 트렌디하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긴 가죽재킷을 매치한 지지와, 2000년대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은 벨라의 카고 팬츠는 이 둘의 취향은 물론이며, 시대까지 반영한 감각적인 아웃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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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심리에서 검은색은 =힘을 상징한다. 때문에 블랙을 선호하는 사람은 오히려 색이 가진 이미지와는 달리, 외로움을 많이 타고 남들에게 보이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 지 과도하게 신경쓰는 경향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끈기형으로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니까. 문득 홀로 된 기분이 들거나 어쩔 수 없이 인파가 득실대는 장소로 외출해야만 할 때, 블랙 룩을 선택해 보는 건 어떨까? 검은색이 지닌 특별한 기운이 어딜가나 당신을 든든히 지지해 줄 것이다.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