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영화가 빚어낸 드라마틱한 순간 2편

Stories: Director's Runway

패션과 영화가 빚어낸 드라마틱한 순간




패션으로 영화하기


영화는 감성을 중시하는 영상 매체다. 때문에 패션 필름은 단순한 피상을 넘어 관객의 마음까지 사로잡는 최고의 무기가 된다. 여기 사심을 가득 담아 엄선한 패션 필름들을 에디터의 한줄평과 함께 감상해 보자.




Ouverture Of Something That Never Ended, GUCCI


2020년에 공개된 GUCCI의 Ouverture Of Something That Never Ended 연작은 장장 일곱 편의 에피소드, 총 러닝 타임이 한 시간 삼십분에 달하는 역대급 길이로 관객을 찾아왔다. 너무 많다. 너무 길다. 동의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여기서 하나의 팁. “당신은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에피소드 1에 나오는 이 대사를 기억할 것. 앞으로 펼쳐질 장황한 대서사시가 누군가의 자아를 찾기 위한 긴 여정이 될 것을 암시하는 중요한 장면이니까.



24.jpg



전체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큰 줄기는 주인공인 실비아의 성장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질풍노도의 상태지만 이제 더 이상 숨지 않겠다 결심하고 당당히 밖으로 나선다. 그동안 잊고 있던 주변을 사려 깊게 살피고,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스스로를 파악하기 위해 분주히 노력한다.

그리고 이 외출은 실비아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복장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춤을 마음껏 즐기고, 사랑하는 이에게 용기 있게 러브레터를 보내며,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피력하는 주체적인 모습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25.jpg

thevision.com

26.jpg

영화 앨리펀트와 파라노이드 파크의 스틸컷 ⓒimdb.com, 연출을 맡은 구스 반 산트와 알렉산드로 미켈레 ⓒvogue.com



미국 출신의 감독 구스 반 산트(Gus Van Sant)의 열혈 팬으로서, 그가 GUCCI의 패션 필름을 연출한다는 소식은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도 같았다. 영화 엘리펀트(Elephant)와 파라노이드 파크(Paranoid Park)에서 보여준 그의 신들린 연출 감각이 패션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대만족! 행복한 감상이었다.


에디터의 한줄평: 빡빡한 철학적 사념을 스타일리시하고 패셔너블하게 전달하려는 시도.




KENZO World, KENZO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에 이어 그녀(Her)로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된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 그가 참여한 KENZO의 향수 KENZO World의 광고는 그동안의 뻔한 향수 광고와는 전혀 다른 무드를 보여주며 화제가 되었다.



27.jpg

스파이크 존즈, 그녀 ⓒbbc.com



내용은 별 거 없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이 필름의 관건이다. 초록빛 드레스를 말끔히 차려입고 연회에 참석한 한 여성. 수줍은 듯 얌전히 앉아있던 그녀가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연회장을 뛰쳐나가는데… 비트가 강한 음악이 울려 퍼지자 갑자기 돌변하여 막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러닝타임 내내 건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알 수 없는 행동들을 이어나간다. 그 모습이 얼마나 기괴한지 마치 영화 포제션(Possession) 속 이자벨 아자니(Isabelle Adjani)의 광기 어린 빙의 연기가 떠오를 정도.



28.jpg
29.jpg

ⓒimdb.com



하지만 묘하게 흡입력 또한 대단해서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뻔한 일상을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감독 스파이크 존즈의 특기인지라, 이러한 강점이 영상의 재미를 극대화시킨 것.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성의 이상한 몸짓도 계속 보다 보면 마치 세상을 향한 맹렬한 투지 같아 보이고, 막판엔 시원한 통쾌함까지 밀려온다. 이 필름, 정말 신기한 구석이 있다.


에디터의 한줄평: 광기 어린 막춤이 투쟁의 몸부림으로 변모하는 과정.




First Light, Alexander McQUEEN


올해 칸 영화제에서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로 감독상을 수상한 조나단 글레이저(Jonathan Glazer). 그 역시도 패션 필름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2021년 Alexander McQUEEN SS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 First Light이 바로 그 작품.



30.jpg

First Light의 스틸컷

31.jpg

Alexander McQUEEN 2021 SS ⓒlulamag.com



영국의 템즈강을 무대로 한 이 필름은 Alexander McQUEEN의 의상을 착용한 모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청춘의 일기장처럼, 그 안엔 우울도 무료함도 치기도 열정도 사랑도 전부 담겨있다. 하지만… 음악이 없다.

이러한 침묵은 조나단의 전작 언더 더 스킨(Under the Skin)을 보았다면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청각적 요소를 제거하고 약간의 소음만을 심어두는 독특한 자신만의 연출 방식을 이 작품에도 적용한 것. 가끔은 생소한 체험이 오히려 관객에게 큰 타격감을 준다는 걸 예측한 현명한 판단이었다.


에디터의 한줄평: 꽃은 피어도 소리가 없다.




French Water, SAINT LAURENT


클로에 세비니(Chloe Sevigny), 샬롯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 줄리안 무어(Julianne Moore), 레오 라일리(Leo Reilly)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탑을 달리는 아티스트들이 총출동한 SAINT LAURENT의 패션 필름, French Water. 몽환적인 기타 선율이 흐르는 오프닝에서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Only Lovers Left Alive)가 떠올랐다면? 당신의 추측이 맞다. 미국 인디 영화계를 대표하는 짐 자무쉬(Jim Jarmusch)가 필름의 디렉팅을 맡았다.



32.jpg

짐 자무쉬,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vanityfair.com

33.jpg

French Water의 스틸컷 ⓒelle.com

스토리는 저녁 약속에 나타나지 않는 샬롯을 찾아 레스토랑 곳곳을 살피는 친구들의 모습을 그린 평범한 일상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불현듯 발견되는 심상치 않은 단서가 이 필름의 묘미다. 타인의 대화를 따라 유령처럼 등장했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샬롯의 모습은 기다림에 대한 시적 묘사로 읽히며, 그 안에서 우리는 떠오름과 잊혀짐을 반복하는 기억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에디터의 한줄평: 대체 프랑스 물이 얼마나 맛있길래?




Amor Fati, MARINE SERRE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Alejandro Jodorowsky)의 영화 홀리 마운틴(The Holy Mountain)이나 브랜든 크로넨버그(Brandon Cronenberg)의 항생제(Antiviral)를 인상 깊게 봤다면, 이 필름 역시도 당신의 구미에 딱 맞을 것이다. (참고로 이 두 영화는 ‘보면 멘털 붕괴되는 영화’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무시무시한 작품들이다!)

성별조차 파악 불능한 인간을 닮은 생명체가 MARINE SERRE의 정체성을 주입당한 뒤 펼쳐지는 모험을 그린 스릴러, 라고 일단 일러두겠지만 그걸 풀어내는 방식이 꽤나 괴팍해서 심한 호불호의 격차가 예상된다.



34.jpg

홀리 마운틴, 항생제 ⓒimdb.com

35.jpg

Amor Fati의 스틸컷 ⓒamorfati.marineserre.com



앞서 언급한 두 영화는 비록 ‘멘붕’ 딱지를 달고 말았지만, 미장센의 측면에선 나름 극찬을 받고 있는 작품들이다. 충분하다 못해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시각적 자극이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결정적 이유. 결국 뭐든 극으로 가면 성공한다. 이 AMOR FATI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무슨 일을 벌이는 건 진 모르겠지만 인과관계, 개연성, 스토리라인, 캐릭터를 다 떠나서 순간순간의 장면들이 호기심을 부추긴다. 아, 필름을 보기 전 하나 숙지해야 할 사항이 있다.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에 버금가는 안구 테러 장면이 등장하니 고어물에 혐오증이 있다면 미리 방어 태세를 취할 것.


에디터의 한줄평: 초현실주의의 옷을 입은 크리처물.




Counter Interlligence, THEBE MAGUGU


2019년 LVMH 프라이즈의 최종 위너, 테베 마구구(Thebe Magugu). 그는 2017년부터 동명의 브랜드를 운영하며 특기인 해체주의적 의상들을 선보이고 있다.

THEBE MAGUGU의 2021 SS 컬렉션과 연계된 작품 Counter Interlligence는 아마 패션 필름 최초의 스파이물이 아닐까 싶은데, 세 여성 스파이가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이 섬세하게 담겨있는 수작이다. VHS 느낌이 물씬 풍기는 빈티지한 연출이 실험적인 실루엣의 의상들을 만나 이룬 독특한 무드가 인상적.



36.jpg

THEBE MAGUGU 2021 SS ⓒanothermag.com


에디터의 한줄평: 7분 30분짜리 패션 필름이 119분짜리 미녀 삼총사 3보다 훨씬 재밌다.




Come Together, H&M


원래 주인공은 가장 나중에 등장하는 법. 이번엔 뛰어난 색채 감각과 공간 연출 능력 덕에 디자인 업계 종사자들의 무한 애정을 받고 있는 감독 웨스 앤더슨(Wes Anderson)이다. 2014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그의 차기작이 영화가 아닌 패션 필름이라니. 팬들은 실망과 기대 사이에서 꽤나 맘고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공개되고 나니 반응은 좋았다. 아니, 터졌다. 성탄절을 기념하여 H&M과 진행한 3분짜리 짧은 필름이었지만 앤더슨의 뛰어난 영상미와 위트까지 모두 담겨있었으니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따로 없었다.



37.jpg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 ⓒimdb.com, mubi.com



이게 끝이 아니다. 그의 초기작인 다즐링 주식회사(The Darjeeling Limited)부터 호흡을 맞춰온 배우 애드리언 브로디(Adrien Brody)까지 가세하여 연기의 퀄리티까지 보장했다. 대체 3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란 의문을 싹 걷어낼 만한 뭉클한 반전도 있어 보고 나면 가슴이 따뜻해질 것. 감독의 꾸러기스러운 연출의 팬이라면 2013년 PRADA의 패션 필름, CASTELLO CAVALCANTI도 함께 찾아보길 권한다.


에디터의 한줄평: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38.jpg



패션 필름은 수많은 이의 노력이 담긴 아름다운 혼종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혼종은 대부분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모습이지만, 이번만은 다르다. 패션과 영화, 둘 다 한 고집하는 분야의 사람들이 작정하고 뭉치면 얼마나 멋진 결과가 탄생하는지 몸소 보여주었으니까.

이 위대한 만남은 결국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었을 것이다.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는 일. 우리는 그들의 협업으로부터 환대의 소중한 가치를 배운다.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jentestore 바로가기

keyword
작가의 이전글패션과 영화가 빚어낸 드라마틱한 순간 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