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영화가 빚어낸 드라마틱한 순간 1편

Stories: Director's Runway

패션과 영화가 빚어낸 드라마틱한 순간




패션계를 뒤흔든 씨네키드의 반란. 그들이 이뤄낸 프레임 속 아름다운 혁명에 대하여.




패션과 영화의 위대한 만남


패션과 영화는 소문난 단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패션은 고심한 작품들을 효과적으로 노출시킬 매체가 간절할 테고, 영화는 텅 빈 프레임을 장식할 매력적인 장치가 필요할 테니.

보다 더 정확한 해답은 '미장센(Mise-en-Scène)'에서 찾을 수 있다. 아마 우리가 가장 자주 접했을 영화 용어 중 하나일 미장센은 직역하면 '무대에 배치하다(Placing on Stage)'라는 의미로, 본래 프랑스 연극에서 쓰이던 단어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 연출자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배우와 조명, 사물들을 놓아두는 행위를 통칭하던 것.



1.jpg

ⓒfr.wikipedia.org



훗날 영화가 발명된 뒤엔 이러한 바탕이 그대로 옮겨와, 사각의 프레임 속을 채울 모든 시각적 요소의 연출을 칭하는 개념이 되었다. 그렇다면 미장센은 곧 감독의 스타일이나 다름없는 셈. 한 프레임 안에 담긴 시각적 요소들이 이루는 조화와 의미, 상징들이 영화의 메시지와 분위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2.jpg

박찬욱, 아가씨

3.jpg

요르고스 란티모스, 송곳니 ⓒthecinemaarchives.com

4.jpg

라스 폰 트리에, 멜랑콜리아 ⓒbloody-disgusting.com



영화를 보는 우리가 감독의 머릿속을 이해하기 위해선 더더욱 미장센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시나리오를 일일이 찾아볼 수도, 영화의 제작 과정을 전부 살펴볼 수도, 감독과 직접 대면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이건 감독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떠나는 관람객들을 붙잡고 자신의 의도를 요목조목 설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말로 풀어낼 수 없는 것들도 종종 있을 것이고.

때문에 미장센은 감독이 관객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또한 비주얼 스토리텔링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한 문장도 연출자에 따라 천차만별의 장면들로 표현될 수 있으니 말이다.



5.jpg

왕가위, 화양연화 ⓒew.com



그럼 다시, 패션과 영화의 협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패션의 꽃인 런웨이 역시 연극적 요소가 다분하다. 무대가 될 장소를 물색하고, 그 위에 작품을 세우고, 음악과 동선까지 철저히 계획하고, 나아가 모델의 워킹과 표정까지 신경 써야 되니 일종의 연기 지도까지 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게 하나 빠졌다. 바로 '스토리'.

패션이 영화감독의 능력을 탐하는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 '스토리텔링'에 있다. 그들은 무대와 영상에 스토리를 심는데 숙련된 기술자이자, 앞서 말한 미장센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공략하는 것에 능숙하다. 이 탁월한 재주가 패션이 만들어낸 유혹적인 캐릭터들과 만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혁명이다.



혼자 보기 아까운 런웨이들 (Feat. 영화감독)


황동혁 & Louis Vuitton Woman's Pre-Fall 2023



지난 4월, 잠수교에서 열린 Louis Vuitton의 2023 Pre-Fall 런웨이. 패션계의 선두에 있는 럭셔리 브랜드가 한국에서 단독 컬렉션을 개최하다니! 국내 패션 피플들의 관심은 절정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이 연출에 참여한다는 놀라운 소식까지 더해져 패션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도 이 쇼에 관심을 보였다. 드라마의 인기는 물론이며 한류의 영향력이 얼마나 여러 분야에 침투하고 있는지 실감케 한 기분 좋은 뉴스였다.



6.jpg

황동혁 감독 ⓒnetflix.com



쇼의 곳곳에 등장한 한국적 색채는 차오르는 국뽕을 만끽하게 만드는 공감의 향연이었다. 오징어 게임에서 어린 시절 추억의 놀이를 이용해 스릴 넘치는 스토리를 쌓아갔던 감독의 남다른 연출력이 이번 런웨이에서도 빛을 발한 것.



7.jpg

ⓒlofficielsingapore.com

8.jpg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호남 농악소리 연주를 시작으로 산울림의 아니 벌써, 뒤이어 이어지는 익숙한 음악들은 참석한 이들의 눈과 귀를 활짝 열리게 만든 신선한 선곡이었다. 이에 더해 잠수교 기둥에 새겨진 번호들과 푸른 조명, 세기말 전사를 연상케 하는 의상까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온갖 요소들이 모여 바로 여기, 서울 한복판에 잊지 못할 황홀한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9.jpg

ⓒvogue.com




미셸 공드리(Michael Gondry) & Louis Vuitton Men's FW 2023



확실히 Louis Vuitton은 영화인들과의 협업을 즐기는 것 같다. 올해 1월 남성 라인 런웨이에서도 영화감독인 미셸 공드리와 그의 동생인 올리버 공드리(Oliver Gondry)를 섭외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제대로 통했다. 그들은 브랜드가 원하는 ‘스토리’를 확실히 쇼에 심어 넣어 주었고 덕분에 이 런웨이는 관객의 뇌리 속에 오래오래 길이길이 남게 되었으니.



10.jpg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두 주연 배우와 미셸 공드리 ⓒdazeddigital.com



컬렉션은 2021년,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어린 시절 스토리를 담고 있다. 모험심이 가득한 소년의 방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세트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그곳을 종횡무진 횡단하는 모델들의 재치 있는 애티튜드까지. 이 모든 건 꿈 많은 소년이었던 버질의 추억들을 반영한 연출이라고 한다.



11.jpg

ⓒframeweb.com



하지만 이 쇼는 더 포괄적인 뉘앙스로 읽힌다. 유색 인종이었던 버질의 파란만장한 소년기, 그 자체가 도시의 소외된 하위문화에 대한 기록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벽지에 낙서를 하고, 소파에 앉아 공상에 잠기고, 다트 놀이에 열중하는 모델들의 모습은 소외된 문화의 뿌리와 그 배경을 헤아리게 하는 깊은 사유의 계기가 되어주었다.



12.jpg

ⓒeu.louisvuitton.com



우리에겐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과 ‘무드 인디고(Mood Indigo)’ 등의 영화로 알려진 미셸 공드리. 그의 장점은 동심의 추억과 러블리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미장센에 있다. 그는 영화를 연출하기 전 먼저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데뷔해 주목받게 된 케이스인데, 덕분에 그의 작품에선 다른 영화와 확연히 다른 독특한 분위기가 마구마구 느껴진다. 그의 팬이라면, 리드미컬한 움직임과 다채로운 색감으로 충만한 뮤비 작품들도 반드시 살펴볼 것. 수많은 영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올 테니.


영상 보러가기




니콜라스 윈딩 레픈(Nicolas Winding Refn) & PRADA Women's SS 2023


덴마크 감독 니콜라스 윈딩 레픈이 연출한 단편 Touch of Crude. 올해 PRADA의 SS 런웨이는 이 한 편의 영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브랜드의 수장인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 라프 시몬스(Raf Simons)가 제시한 ‘인간의 삶 자체가 빚어낸 옷’이라는 주제를 니콜라스 만의 시선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14.jpg



영화 속엔 다양한 자아를 상징하는 여성들과 그녀들을 관찰하는 렌즈가 달린 검은 상자가 함께 등장한다. 짙은 개성을 품은 캐릭터들은 각자 분리된 공간에서 오직 이 상자만을 통해 서로를 엿보고 대화를 나누며 남몰래 감춰두었던 진실을 조심스레 풀어낸다. 그 진실은 아주 개인적인 행위로, 때론 누군가를 향한 분노와 투지로, 혹은 남몰래 꿈꾸는 몽상으로 읽힌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기 등장한 검은 상자처럼 여성들의 삶을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살피겠다는 결심, 또한 이를 바탕으로 여성과 가장 밀착된 옷을 만들겠다는 PRADA의 의지다. 난해함으로 악명 높은 감독의 명성답게 이 작품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이처럼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도 감독의 의도이니 구미가 당긴다면 직접 관람해 보는 것을 추천.



15.jpg

ⓒnumeromag.nl



런웨이 현장의 세트와 분위기 역시 이 단편의 연장선이었다. 어둠을 가로지르는 빛의 길과 검은 벽에 뚫린 창문의 강렬한 색감, 온몸을 죄어오는 것만 같은 긴장감이 느껴지는 선곡까지.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연출되었다는 설명에 걸맞게 각각의 요소들이 씬들과 완벽한 합을 이루고 있는 점이 감탄을 자아낸다.



16.jpg

ⓒwww.pradagroup.com



니콜라스는 화려한 영상미로 관객을 사로잡는데 정평이 나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난해한 스토리 때문에 호불호가 너무 심한 게 약점이라면 약점. 그러나 시각적 자극이 절실한 그대여,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영화 온리 갓 포기브스(Only God Forgives)나 네온 데몬(The Neon Demon), 넷플릭스 드라마인 코펜하겐 카우보이(Copenhagen Cowboy)를 반드시 찾아보길 바란다. 영화를 잠식하는 미장센의 막강한 힘을 체감하게 될 것이다.



17.jpg

온리 갓 포기브스

18.jpg

네온 데몬

19.jpg

코펜하겐 카우보이 ⓒimdb.com, netflix.com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 & FENDI Couture AW 2021


코로나로 몸살을 앓았던 2021년의 패션계는 런웨이 필름의 풍년이었다. 접촉과 대면이 금지된 상황에서, 영상 매체야말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고객을 묶어둘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으니.

그중에서도 FENDI의 2021 AW 쿠튀르 런웨이는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이탈리아의 신예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와 영화 음악의 거장 막스 리히터(Max Richter)까지. 그들의 타겟이 혹시 영화팬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20.jpg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두 주연 배우와 루카 구아다니노 ⓒtagblatt.ch



작품은 기대만큼이나 대단했다. 카메라를 빤히 응시하는 케이트 모스(Kate Moss)를 필두로 크리스티 털링턴(Christy Turlington), 엠버 발레타(Amber Valletta)등 전설적인 모델들의 등장에 FENDI만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의상이 더해져 미적 충만감은 배가 되었다.



21.jpg

ⓒglobalfashionreport.com



이 필름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세대인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의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핑크와 화이트, 골드와 같이 포근한 색감이 가득한 장면에서도 왠지 모를 서늘한 기운이 풍겨져 나오는 건 아마 이러한 영향 때문인듯 하다. 렌즈를 향하는 모델들의 표정과 그들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시선, 층계를 오르듯 조금씩 상승하는 음악의 구성, 마치 미로와 같이 얽혀 있어 전체를 파악하기 힘든 공간의 구조들. 이 모든 요소들을 이용해 잔잔한 안락함에 날카로운 불안감을 심어둔 것. 덕분에 러닝 타임 내내 양극의 이질감이 한 영상에 공존하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작품이 탄생했다.

22.jpg

파솔리니, 데카메론

23.jpg

파솔리니, 라 리코타 ⓒartforum.com


2편에서 계속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jentestore 바로가기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젠 그냥 즐겨도 돼, 유니폼 스타일링